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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포에니 전쟁 後期(BC210~ BC206)
이 시기는 난전의 시기다. ‘한니발’은 거점을 많이 잃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 서남
부에서 웅거하며 로마 군과 맞서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철천지원수인 30살도 안 된 스키피오
에 의해 ‘한니발’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의 기지가 함락당하고 ‘한니발’의 동생이 형
과 같은 코스로 이탈리아로 들어왔으나 패하고 전사했다.
이런 저런 상황으로 이 시기는 ‘한니발’이 조금씩 밀리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한니발’과 직접
싸워 제대로 이긴 로마 지휘관은 없었다. 로마는 제해권을 갖고 있고 스페인이라는 큰 기지를
점령하고 심지어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절대 동맹인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國에 비밀협정
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막강한 기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두 전쟁 당사국 본국에
서 전쟁을 대하는 태도나 체계가 큰 차이가 났다.
■ 2차 포에니 전쟁 末期(BC205 ~ BC201)
“시칠리아”에는 몇 개의 나라나 自治都市가 있었는데 1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의 속주나 통제
하에 있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半島로 쳐들어간 다음에 시라쿠사 왕국이 카르타고로 돌아
섰었으나 로마에게 다시 함락되었다(아르키메데스가 살해 된 전투). 함락 직후 로마는 땅의
소유권은 로마에 두지만 시라쿠사 시민들이 임차료(약 10%)만 내고 경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소유권만 빼면 예전과 차이가 나지 않는다. 로마가 상대를 공격할 때는 처절하게 하지만 그
후에 그들을 다루는 방식은 그 시대의 여타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른 방식을 보였다.
이 때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에 상륙해서 온갖 술수를 동원해 전통적인 카르타고의 友軍이고
기마병의 산지인 누미디아(Numidia, 현재의 알제리아)를 내분을 이용해서 손에 넣고 카르타
고와의 전투에서도 이겼다. 혼란에 빠진 카르타고는 ‘스키피오’가 제시한 강화조약에 합의했
다.
- 한니발 군을 半島에서 철수시킨다.
- 카르타고의 스페인에 대한 권한을 포기한다.
-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누미디아(Numidia)의 독립권을 인정한다.
- 배상금을 지불한다.
이 상황은 ‘한니발’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16년간 이탈리아 반도를 휘저어 놓았고 로마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한니발. 역사 속의 명장이
라고 하는 로마의 ‘스키피오’도 평원에서 맞붙어서는 대안이 없다고 하는 ‘한니발(Hannibal)’
은 개인적인 기록이나 자료가 아주 희박하다. 그의 업적을 이탈리아의 신전에 새겨놓았는데
철천지원수인 로마인들이 파괴하지 않은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어쨌든 본국이 흔들리는 통에
그는 본국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이 아닌 카르타고로 철수했다. 그의 위대한 공적은 오히려
이탈리아에 남아있다.
그의 철수 소식을 듣고는 온 로마제국 사람들은 잔치를 베풀고 기쁨을 만끽했다고 한다. 무엇
을 뜻하겠는가? 그와 맞서 ‘持久戰’을 펼치며 견뎌낸 ‘파비우스 막시무스’ 장군도 ‘한니발’이
철수한지 한 달 만에 72세로 죽었다. 이런 사람 때문에 로마는 막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자마 전투(BC202 Battle of Zama)
사르디니아에서 로마에 보내는 朝貢船을 카르타고가 나포한 사건으로 대립하다가 카르타고
가 이 선박의 송환을 거부하는 일로 다시 전쟁이 발발했다. 그들은 돌아온 ‘한니발’을 믿었다.
이 전투의 복잡한 전개과정은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가 상세하게 전투대형까지 첨부해서 책에
다 써 놓았다.
그걸 쓰면 상당한 분량이 될 것 같아 빼지만 고대 세계에서 논란이 되는 이 전투에서 결과적
으로 ‘한니발’은 ‘스키피오’ 軍에게 패한다. 막강한 기병의 공급처이며 우방국가였던 “누미디
아”가 로마의 꼬드김과 내분으로 로마 쪽으로 넘어간 것이 ‘한니발’의 패전의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양 측에서는 강화조약을 체결하는데 그렇게 가혹하거나 피눈물 나는 조건은 아니었다. 그
정도라면 패전국으로서 얼마든지 받아들일 만한 조건이었다. 다만 특이 한 것은 로마에서 쓸
만한 카르타고人의 자제 중 14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이 100명을 인질로 요구했다. 그 이유
는 그들을 로마로 데려다가 교육시키고 자기네 문화에 동화시킴으로써 로마의 동조자로 만들
고자 함이었다. 로마는 다른 나라에도 이런 요구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탁월한 방식이다.
결국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제압했다고 해서 “아프리카누스”라는 별명을 남겨준 채 2차 포에니 전쟁은 끝이 났다.
★ 두 장군의 간단한 비교
한니발 : - 대적하기 어려운 탁월한 전쟁 지휘관
- 정치나 행정에 취약하다.
- 평생 친구가 없다는 특성
스키피오 : - 뛰어난 감각과 유연한 사고방식
- 사람을 잘 다루고 제 편으로 만드는 기술이 탁월하다.
- 정치적인 술수도 강하다.
■ 제 2차 포에니 전쟁 이후(BC200~BC183)
BC197: 아테네와 다른 그리스 민족 국가를 내리 누르고 있던 마케도니아와 로마의 충돌(마케도니아-親카르타
고, 여타 그리스 국가는 親로마). 압도적 로마의 승리 → 강화협약 체결
★ 새겨둘 만한 Speech : “무장한 적에 대해서는 무장한 마음으로 대하지만 무장을 푼 자에게
는 무장을 푼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로마인의 방식이다.” 이는 마케도니와의 전쟁이
끝난 후 강화협약에 불만인 원로원 의원들에게 ‘플라미니누스’가 한 말이다. 로마인들
의 기본 자세와 자신감이다.
** 참고 : BC323년에 Alexander가 죽고 마케도니아 제국은 휘하 장군들이 나눠 먹었
다. (내부 알력으로 Alexander의 부인과 자식들이 다 살해되었다고 한다.)
◑ 이 시기쯤에 지중해 세계의 강자는 로마,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등인데
로마와 카르타고를 빼고는 모두 Alexander의 후예들이다. 패권은 단연 로마다.
◑ 2차 패전 후 한니발(Hannibal)의 시리아(Syria) 망명
국내의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한니발(Hannibal)의 노력에 대해 政敵들은
일방적이라고 비난하고 시리아(Syria)와 내통했다며 로마에 고발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한니발(Hannibal)은 극도로 실망하여 시리아로 망명했다. 당시 그리스와 에게海 쪽의 강자인
마케도니아와 시리아는 옛날 생각만 하고 로마와 맞붙었다가 크게 패했다. ‘스키피오’의 유연
한 전술과 수하 장수들의 훌륭한 학습효과로 판판이 깨진 것이다. 결국 地中海 세계의 패권
은 로마의 것이 되었고 로마가 위험인자인 ‘한니발 (Hannibal)’ 의 인도를 요구하자 다시
달아났다. 참 ‘한’ 선생의 신세가 말씀이 아니네……
그 시대의 영웅이고 결정적으로 “카르타고”의 ‘한니발(Hannibal)’을 이겨 최대의 강적을 쓰러
뜨린 뒤 그리스, 중근동의 적을 격파함으로써 로마가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게 만든 名將
‘스키피오’는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15년이 지난 BC187년에 政敵들에 의해 고발을 당했
다. 명분은 시리아가 항복할 때 지불한 현금을 유용했다는 것이다. 세계사에서 로마의 최고
웅변가로 알려진 ‘大카토’(Marcus Porcius Cato) 일파에 의해 탄핵된 것이다.
◑ 大카토(Cato)
- 反카르타고 및 反스키피오의 성향이 아주 강했다.
- 보수주의 및 국수주의자였다
- 反헬레니즘(로마의 전통을 고수)을 고집
이는 스키피오가 독보적으로 튀는 것을 싫어하는 태도인데 이 성향은 혈통인가 보다.
스토아(Stoa-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풍을 이은 금욕주의적 행태) 학파인 그의 증손자
‘小카토’가 ‘카에사르’(Caesar-시저)의 독재적 행태가 싫어서 ‘카에사르’의 반대세력인 ‘폼페이
우스’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패해 자살한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 스키피오는 죄가 있는 지는 모르나 원로원의 탄핵 판결을 기다리기 싫다고 곧바로 별장
으로 가서 공직에서 은퇴하고 젊어서부터 괴롭힌 병마와 싸우다 BC183년(탄핵 고발 후 4년)
52살의 나이로 죽었다. 자신을 변호해서 원로원의 탄핵을 멈추게 한 ‘그라쿠스(Gracchus)’에게
딸을 시집 보냈다. 나중 외손자들이 정치개혁에 나서 훌륭한 업적을 세웠으나 살해당했다.
◑ 이때 한니발(Hannibal)은 흑해 연안의 ‘비티니아(Bithynia)’에 도망가 있었으나 로마의 압박
(신병인도)이 가해지자 자살했다. 향년 64세였다. 두 명의 영웅이 동시에 사라졌다. 포에니
전쟁의 두 주연 배우가 사라진 것이다.
◑ ‘大카토’는 ‘스키피오’에게 망신을 주고 84세까지 살며 카르타고를 기필코 멸망시켜야 한다
고 주장하고 그리스 문화의 유행을 경계했다. 대단한 웅변가이며 보수적인 애국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속말로는 정적을 씹는 데 치중한 사람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미래지향적인
‘스키피오’에 대해 ‘大카토’는 온고지신 (溫故知新)을 중시하는 성향의 인물이다.
■ 마케도니아 멸망(BC179~BC167)
세게 밀고 나왔다가 ‘스키피오’에게 된통 당한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5세’는 로마의
“온건한 제국주의(국가의 존립을 인정한 강화 조약)”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지냈다. BC179년에
그가 죽고 로마에 반감이 많은 아들 ‘페르세오스’가 왕에 즉위한 후 그리스 국가들을 부추겼다.
▶마케도니아의 왕위
원래 ‘필리포스5세’는 正室의 아들인 둘째 ‘데메트리오스(Demetrios)’를 사랑했으나 그가
로마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온 뒤 성향이 親 로마로 바뀌었다. 첫째이면서도 첩실의 아들인
이복 형 ‘페르세오스’가 모함해서 독살 형을 당했다. 나중 이를 자책하고 ‘필리포스 5세’ 가
죽자 그가 왕위를 차지한 것이다.
욕심만 앞서는 ‘페르세오스’는 전통 강국의 위세를 보이고자 했으나 포에니 전쟁을 통해
정교한 “전쟁기계”로 바뀐 로마에게 변명의 여지없이 패했다. 포로가 되어 로마로 압송되고
마케도니아 왕국은 문을 닫았다.
■ 카르타고의 멸망(BC149 ~ BC146)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는 자치국이기는 하지만 戰力도 약화되었고 로마의 승인
없이는 교전권 행사도 못하는 나라였다. 스페인(에스파냐), 시칠리아, 사르데니아 등 해외 영토
를 다 잃고 본국의 농장경영 만이 경제력의 기반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로마의 자치국인 카르타고가 옆집 “누미디아”에 대한 경계와 질시였다.
“누미디아”는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 때 강력한 기마병력으로 적진격파에 엄청난 힘을
보태준 우방이었으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의 교활한 공작과 내분에 따른 정권의 교체로
로마 편으로 돌아서서 “자마(Zama)” 전투에서 한니발이 패하도록 만든 큰 요인 중 하나였다.
그 후 점차 강해지는 “누미디아”가 불안해서 공격을 한 것이다. 이는 “교전時 로마의 승인”을
깬 것이다.
그 와중에 또다시 로마에 반기를 든 그리스에 대해 로마는 짜증이 났다. “잘해줘 봐야 뒤통수
치는 것들”이라는 생각에 카르타고까지 가혹한 요구를 받게 되었다. 즉, 首都를 파괴하고 내륙
신도시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흥분한 카르타고의 全 人口(전투병력은 2만)가 항전했다.
해변가의 성 안에서 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농성전이라는 처절한 전투 끝에 카르타고는
완전히 궤멸됐고 5만 명의 시민이(아이들까지) 노예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지역에
소금을 뿌려 이후 100년 동안 황무지로 버려두었다. ‘저주받은 땅’ 카르타고가 건국한 지 700
년 만에 씨도 없이 망한 것이다.
다시 사람이 살게 된 것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재건한 뒤이다. 따라서 카르타고 원래의
문화유적은 없다고 한다. 이런 잔인한 수법은 로마가 흔히 하는 수법이라고 하는데 여러 날을
두고 불타면서 사라지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사령관 ‘스키피오 아밀리아누스’(‘스키피오 아프
리카누스’의 양자)도 “언젠가 로마도 저런 일을 당할 것”을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 이 시기에 로마는 “카르타고”, “코린트(그리스)”, 에스파냐의 “누만티아(13년 뒤)”를 말살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역사가들은 평한다. 著者는 다르게 보았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고
말 많고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던 그리스人은 그 기간 동안 입을 다물고 SOC 사업이나 질서
있는 평화를 즐겼고 반면 로마는 거친 자연환경에서 반골기질인 에스파냐를 완전히 평정하고
“로마化” 작업을 완수 했다.
하지만 카르타고의 경우는 다르다. 과거의 악몽(한니발) 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고집스럽고
교활하게 카르타고의 제거를 주장한 大카토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 결과 카르타
고가 없어진 뒤 누미디아의 팽창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 셈이다. 역설적으로 한니발
(Hannibal)’과의 전쟁 경험을 통해 짧은 기간에 로마가 中近東, 그리스일대, 北아프리카, 에스
파냐를 평정하는 챔피언이 될 힘과 경륜을 얻게 되었다.
첫댓글 “무장한 적에 대해서는 무장한 마음으로 대하지만 무장을 푼 자에게는 무장을 푼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로마인의 방식이다.” 우리 이니는 핵무장한 적을 두고 아군의 무장을 해제하려하고, 적과 내통하여 그들을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니 세상에 이런 지도자가 어디에 있을까? 이게 로마인의 방식이 아니고 대깨문의 방식인가? 정말 만고 역적이라 아니 부를 수 없다.
잘 되는 나라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