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매일 새벽 출근길 (사진: 김도성 제공) |
일과는 이렇다. 새벽 4시쯤 일어나 출근할 준비를 하고, 5시 30분에 집에서 나가 7시가 되기 전에 회사에 도착한다. 지하철로 한 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그사이에는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다. 본사에서 식자재를 나르다가 8시부터는 고기 주문에 맞게 고기를 가공한다. 11시쯤 점심을 먹고 오후 5시에는 일이 끝나야 하지만 동작이 느린 나는 보통 5시를 넘기고, 늦으면 6시도 넘긴다. 애초에는 힘들더라도 시간만 채우면 되는 육체노동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제시간에 퇴근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잠시라도 쉬기가 어렵다. 좌우간 책을 읽으며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하면 파김치가 된다. 나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 분이 한둘일까. 하지만 나도 힘들다. 늦은 저녁을 먹고 씻으면 9시가 다 돼간다. 이제 곧 자야 한다. 그래야 내일 또 일할 수 있다.
잘 산다는 것은 〔 〕이다 사는 한 누구나 산다. 잘 사는 한 누구나 잘 산다.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런데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은 자신이 살되 잘 살지는 못한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적어도 잘 사는 게 아닌 것이 무엇인지 안다. 따라서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아는 것을 모른다고 묻는 것 같다.
오히려 사람들은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살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직감적으로 의식한다. 모를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저 질문은 지식의 유무를 묻는 게 아니다. 모를 수 없는 것은 알 수도 없다. 그것은 고통과 닮았다. 나는 나의 고통을 모를 수 없다. 그래서 고통은 앎에 속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당신이 나의 고통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소리친다. 사실 그렇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알 수 없다. 내가 당신의 고통을 모를 수 없듯이 말이다. 이런 쓰린 말도 있다.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살지만 살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다만 이 말을 과감하게 부정하거나 위로하며 이어갈 수 있을 뿐이고, 어떨 땐 이 말의 무게에 그저 침묵할 따름이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다는 부담감은 바로 이러한 위태로운 지점을 드러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문법적으로는 옳은 저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무엇’은 없다고 봐도 괜찮을까? ‘잘 산다는 것은 이다’처럼 비문일지라도 말이다. 이게 너무 심하다면,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도 없는 저 ‘무엇’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일단 이 자리를 비워두면 어떨까? ‘잘 산다는 것은 〔 〕이다.’ 그러면 아직 문장도 아니고 비문도 아닌 이 (비)문장에 빈칸이 생긴다. 이 빈칸을 없음이나 모자람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짙고 딱딱한 질문이 한결 흐릿하고 물러진다. 아직 채워지지 못한 저 빈칸이 혹시 스스로의 아픔이 아닐까 하는 의인적 감상이 들 정도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만약 저 빈칸이 정말 아픈 상처라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감히 내가 잠시 거기 들어갈 수 있을 듯한 기분이다.
‘하나님이 없다’와 ‘돈이 없다’ 가운데 본인에게 어느 쪽이 더 아픈지 그리스도인들에게 묻는 건 공허한 질문일까? 누군가에게는 너무 모진 질문일까? 당연히 둘 다 있어야 하니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뭔가 거창하고 위압적이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지금 나에게는 이 두 가지가 불확실하거나 보잘것없어서다. 이것들은 나의 결핍들이다. 나는 이 결핍들 때문에 항상 아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결핍들은 이제껏 쭉 쌓여온(또는 쌓아온) 결핍이고 나에게는 수고롭고 무겁다. 이렇게 말하니까 이번에는 저 빈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커진다. 마음이 헝클어진다. 빈칸을 마냥 낭만적으로 여길 수도 없고 거추장스럽다고 없애버릴 수도 없다. 빈칸이 빈칸이 아니다.
기도 인간이라면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두려움 때문에라도,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수양 때문에라도, 특별히 그리스도인이라면 신과의 만남 때문에라도 기도한다. 나도 기도했다. 어릴 적에는 가정과 교회에서 배운 대로 식사기도부터 했다. 어떻게 기도를 배웠는지 회상해보면 기도를 더듬더듬 따라 하면서 배웠던 것 같다. 부모님이나 교회 선생님이 하는 기도의 말을 듣고 모방했다. 남들 앞에서 기도를 잘하는 친구가 있었는가 하면 부끄러워하거나 무서워하는 친구도 있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기도를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징표로 여겨지기도 했다. 나의 유년기는 개신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였고 그만큼 기도는 으레 격렬하고 열광적이었다. 이제 와서 보면, 어른들의 정제되지 않은 바람과 회한이 날것으로 뒤섞인 기도의 말들을 고스란히 학습하고 내면화하는 시기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는 몰락한 교회와 곤궁한 가정형편, 그리고 마찰이 잦은 부모님 아래서 허망함에 젖어 살았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사무치는 외로움에 신비 체험을 통해서라도 꿈에서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상당한 고행을 하기도 했다. 몇 시간이고 간절히 무릎을 꿇은 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못한 일들을 회개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이런저런 착한 일들을 하겠다고 기도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어린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환상조차 볼 수 없었다. 곧이어 최선을 다했는데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고등학교 즈음에 내린 결론은 하나님은 단지 믿음의 대상이지 감각이나 정서 또는 감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나의 이 결론 역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한 말들과 기도로부터 얻은 결론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가 학문을 배우면서 내가 성장하고 나의 신앙을 형성해온 토양을 되돌아보게 됐다. 과감히 말한다면, 취약했던 나의 신앙적 경제적 환경은 한국 개신교의 하수구 어디쯤 있었지 않았을까. 하수구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수구에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목사로서 이 오물들을 벗겨내려고 열렬히 금욕적으로 외적 결핍을 추구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교회가 부흥하고 성공하는 비결이라면 철천지원수처럼 대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믿음을 구정물로부터 지켜낸 결과, 교회 교인은 20년이 훌쩍 넘도록 권사님 세 분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런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경멸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아버지 자신의 내면세계와 가장으로서의 책임이었다. ‘하나님 죄를 물 마시듯이 짓는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할 때 내가 나의 말을 하는데 나의 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기도의 말은 분명히 내가 말한 것인데 이 말들이 하나님은 물론이고 내 자신과도 상관없는 듯한 그런 느낌. 기도의 말에 하나님도 없고 나도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나의 핍절하고 채워질 수 없는 마음이 요동쳐 애원하고 요청하는 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엉망이 되는 삶을 본다. 20대 중반 이후로 내면이 혼잡하게 뒤엉켜 있던 나는 하나님을 염원만 했지 실제로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하나님에 관한 말만으로는 기도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한 계기가 있어, 시간과 절차를 지켜가며 드문드문 기도한 지 1년이 돼가는 최근까지도 내적세계는 전혀 정리되지 않았다. 고된 일을 마치고 밤에 기도하노라면 흥건히 흘러 있는 침에 민망하거나 떠오르는 잡념에 허우적거리다가 헛수고했다는 좌절감에 빠지기 일쑤다. 나는 아직 생각과 감정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니 기도 가운데 말씀을 묵상하며 떠오른 말이나 느낌, 이미지들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의 것인지 구분하는 것은 요원하다. 기도 안에는 온갖 것들이 난립한다. 어떨 때는 내가 숨기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 의식되면, 의도적으로 그 내용을 회피하기 때문에 기도에 있어서 나 자신조차 내가 하는 기도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기도해도 나의 그 무엇이 변하지는 않기 때문에 조바심이 없을 수 없었다. 또 실패하는 건가. 그럼에도 기도에로의 훈련을 하며 경험한 것들이 있다.
기도란 어떤 자리 자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기도는 몸의 자리 같다. 몸의 자리라는 건 몸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보내는 어떤 장소를 가리킨다. 사실 이 장소 때문에 기도가 하늘로 오른 후에 흩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땅에도 굳건히 박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설사 기도의 자리에 하나님도 없고 나 자신도 없다고 하더라도 내 몸과 이 몸이 위치한 그 장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장소가 바로 주님이 초대한 자리라고 배웠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내가 그러하듯이 하나님도 인격체라면, 기도의 말은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도란 하나님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최소한 나의 몸을 준비하는 것이고 하나님 역시 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내가 나만의 기도의 말을 하려면 누군가 나를 먼저 불러야 한다. 그래야 내가 대답(말)할 수 있으니까.
하루는 기도를 하는데 계속 묵상했던 말씀에서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문자로만 받아들여졌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는 문구가 불현듯 나를 부르는 목소리로 들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여.’ 아주 담담한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아직까지 내 안에서 맴돌고 있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지만 그 목소리는 내 내면에서 이제껏 감지하지 못했던 감각으로 들려왔고, 이게 나의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내가 아는 착각의 감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안심하고 그 목소리를 나의 목소리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였다.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그 목소리가 사라질까 봐 아직도 대답하지 않고 애써 곱씹고 있다. 마냥 좋아하기엔 무한히 뒷걸음만 치다가 이제 겨우 반걸음을 내디뎌 보는 느낌이다. 나의 생활은 아직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노동 아버지는 목사라는 직분을 수행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깊은 만큼, 목사라는 직업 자체에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분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반대하지는 않지만, 목사야말로 가장 보람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전하곤 했다. 목사가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몇 달 전에는 대학원(석사)을 졸업하고 도매 정육점 일자리 권유가 들어왔을 때, 주저 없이 일에 뛰어든 나에게 아버지는 지나가듯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목사로 성공하지 못해서 네가 목사의 길을 가지 않는 거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속으로 소리쳤다. ‘저는 아버지의 목회가 실패했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어요. 아버지가 실패한 건 가장이고 가족생활이에요. 저는 아버지가 타협 없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웠어요. 하지만 가장으로서 아버지는 너무나 무책임하셨던 거 아닌가요?’
평소에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지 않아서 힘들어했고, 자연스럽게 불만도 아버지의 무(無)노동에 관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돈을 (‘많이’가 아니다) 전혀 벌지 않는다. 어떤 날 어머니의 타박이 심해지면 아버지는 기분이 상해 방으로 들어가고 나와 동생은 민망해하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년 전에는 이런 말도 들었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목사의 노동에 관한 말이 나왔고, 내가 “바울도 노동자였다”고 말하자, 약간 흥분한 아버지는 “예수님을 봐라, 목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화가 나고 답답해지려다 갑자기 왠지 슬퍼졌다. 옳고 그름을 떠나 아버지가 그토록 순수한 말을 할 수 있는 그 정도로 황폐해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인지하기 싫은 예감 때문에 말이다. } 평생을 개척 교회에 머문, 목회와 가족생활의 실패를 하나님의 섭리와 신앙으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가난하고 수줍음 많은 목사가 아버지다. 아버지의 서재 여기저기에는 아버지도 소위 보수신학, 개혁신학을 공부하러 유학가고 싶어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중학교에 가서도 축구선수를 하고 싶어 했지만 할머니는 반대했고, 그 후에 젊을 때는 폐렴에 걸렸다가 회심하고 목사가 되셨다. 아버지는 겸손했지만 리더십을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여러 가지 사건과 분란이 겹쳐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인가 교회에는 채 10명도 남지 않았다. 아버지도 젊을 때는 꿈과 이상으로 드높으셨을까? 아버지도 자신의 못남과 가난으로 인해 ‘그냥 목사 하지 말고 노동하며 살까’ 고민한 적이 있었을까?
나에게 재화란 있고 없고, 필요의 문제였지, 좋은지 싫은지 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에 재능이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그 일을 선택하고 준비하는 경우는 없진 않지만 흔치도 않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인생의 부침을 겪고 난 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경우도 있다. 이미 늦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어머니는 악착 같은 면이 있어서 한동안 동네에서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폐지와 고철을 수거하며 팔곤 했는데 나는 그런 어머니가 부끄럽지 않았고 리어카가 무거우면 대신 끌고 가기도 했지만, 내심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근면함 때문이기도 했을 거다. 어쩌면 도대체 아버지는 왜 노동하지 않았는지 그 반발심으로 정육 일을 하고 있는 나와 비슷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기억하건대 아버지는 내가 학생 때 문제집이나 책 대여점에서 책을 빌려 본다면 그래도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내게 어떤 활동적인 면보다는 독서를 한다든지 음악을 즐긴다든지 정적인 면을 자주 보여주셨다. 물론 텔레비전 시청은 늘 어머니와의 다툼거리였을 만큼 좋아했다. 여름에 더울 때는 공항에 가서 책을 보다가 햄버거를 먹고 오곤 했다. 이러다 보니 나 역시 독서를 좋아했고 동적이기보다는 사색적으로 변해 갔다.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아르바이트를 하자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게 스물네 살 때였다. 나 역시 수줍음 많고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웠다. 호주의 워킹홀리데이와 정육점 일을 계기로 어떤 육체노동도 잘 먹고 잘 자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다간 돈도 못 벌고 책도 못 읽으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작년 한 해 동안 책을 백만 원어치를 넘게 샀다. 스스로도 내가 미친 것 같았다. 석사를 마칠 때는 이제 공부는, 정신노동은 끝이라고 다짐하고 육체노동이 진정한 노동이자 기도라고 생각하고 육체노동하며 살자고 정육 일을 시작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읽을 시간도 없고 읽지도 못할 책을 저렇게나 사대는 것을 보면 내 안에는 여전히 어떤 결핍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어떤 순간적인 욕구나 단순한 구멍이 아니다. 공부를 다시 하면 채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이 결핍은 이것저것이 얽혀 있는 역사가 있는 결핍이다. 이 결핍의 역사를 어떻게든 기도의 자리로 가져가 풀어놓아야 하는 걸까? 그제야 나는 무엇을 하든 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노동이 기도가 되려면 반대로 얼마나 힘들게 기도가 노동이 돼야 하는 걸까? 쉴 틈 없는 노동으로밖에는 살아갈 길 없는 한국 사회에서.
빈칸 속 하나님과 돈 요즘 드는 생각은 도대체 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냐는 것이다. 이제껏 언급했던 무언가 부족한 것들을 채우려고? 하지만 결핍을 채우려 한 적도 없지는 않지만 오히려 저 결핍들 자체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됐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나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가진 돈은 보잘것없다. 하나님도 돈도 마법처럼 순간적으로 채워질 수 없다. 그럼에도 계속 기도하고 노동해야 하는 것은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돈을 여전히 어떤 결핍으로 그대로 두기 위해서가 아닐까. 어느 정도로 하나님을 확실하게 인식해야 불확실하지 않다고 할 수 있고, 어느 정도로 돈이 있어야 부족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들은 아무리 더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 〕이다’라는 빈칸을 채우려고 아무리 많은 것들을 집어넣어도 끝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없는 것과 돈이 없는 것은 똑같진 않지만 닮았다. 하나님의 부재가 하나님의 현존보다 더 확실하다는 의미에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부재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물론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돈의 결핍이야말로 돈을 추구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라기보다는 돈의 결핍이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과 가치를 가늠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는 척도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이 둘은 긴밀하다. 나에겐 하나님이 없고 기도의 말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게 다가올 수 있고 나를 불렀을 때 짧은 대답일지언정 나의 기도를 할 수 있다. 나에겐 돈이 없고 천금을 얻을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노동을 통해서 나의 욕구들을 확인할 수 있고 천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너무 아프도록 하나님과 돈의 부재를 내버려두는 건 좋지 않겠다. 아무리 결핍이나 부재가 중요한들 이것들 자체가 살아가는 목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처가 덧나는 대도 자꾸 건드리거나 꽃이 피기도 전에 잘 자라고 있는지 뿌리를 들춰보고 싶은 마음이 일기도 한다. 항해하고 있던 배를 버리고 바닷속으로 들어오라는 세이렌의 유혹하는 노랫소리에 홀리듯이 말이다. 앞에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를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라고 정의했었다. 하지만 이 질문 자체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 이 질문 자체를 생각해보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이러한 시도 자체가 저 빈칸에 매몰되지 않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이 글을 통해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내게 짐으로 남아 있지만 동시에 나를 이해하는 어떤 통로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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