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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est Korea 최성은 기자(2009.2월7일 송고)
Corea의 영원한 우정 17세기 네델란드 핸드릭 하멜(Hendrick Hamel)
Chai ba da . Chief President Corea Hamel Memory Society
1653년 8월 16일 새벽 하멜 일행이 타고 있던 스페르웨르호가 한국 제주 해안에 표착하여
난파된지 356년이 되는 해다 이 배는 대만 해협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좌초하여 배는 산산조각 동강이 난 후 침몰하였다.당시 배에 승선하였던 사람들은 하멜을 포함해서 모두 64명이며, 이 사고로 인하여 선장 에그베르츠를 포함하여 28명이 아까운 목숨이 희생되었다.생존자들은 한국에서 13년 억류되어 있는 동안 21명이 숨지고 최후 15명만이 살아 돌아갔다.그는 13년만에 귀국하여 조선에서 겪었던 일들을 보고서를 써 냈다 이 보고서가 “하멜표류기“라는 책으로 모국인 네델란드어.불어.독일어.영어판으로 번역 출판되면서 한국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청년이다. 일행들은 난파후 1654년 6월에 제주을 출발하여 완도 해남 영암을 거쳐 서울에 왔다.하멜 일행들은 2년동안 서울에 머문뒤 다시 강진 병영 남원,순천 여수로 이송되어 갔다.하멜 일행들은 1668년9월 여수에서 탈출하여 13년동안 억류생활을 마감하고 일본으로 탈출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하멜은 1630년 네델란드 호르콤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650년 11월6일 네덜란드의 텍셀(Texel)항을 떠난다
나가사키 상관일지 (Dagregister Nagasaki)』의 1668년 8월14일의 기록에 의하면, 1651년 7월 4일에 훠헬 스트라위스(Vogel Struijs)호의 포수로서 바타비아(Batavia)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빠르게 승진을 거듭하여 서기가 되었다. 서기는 선박의 항해 유지와 재무 관리를 맡아 보는 것이다.
하멜은 1653년 6월18일에 스페르붸르(Sperwer)호에 승선하고 바타비아를 출발해 포르모사(Formosa, 현재의 타이완 )로 향하였다. 이 배에는 코르넬리스 세사르 (Cornelis Caeser) 신임 타이완 총독도 승선하고 있었다.
7월16일에 타이완에 도착하여 세사르 Caeser 타이완 총독으로부터 다시 일본으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고 7월30일 일본을 향하여 타이완을 출발했다.
하멜은 이 보고서에서 조선의 외교,정치,풍습,지리,종교등 사회 전반에 대한 내용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하멜 표류기는 그 당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 국제 사정과 해양사를 살피는데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된다.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기록들은 하멜의 관찰력과 기록정신은 물론 그의 책임감이 뛰어남을 알수 있다.
하멜의 난파순간
난파 당시 상황을 그의 기록은 이렇게 남기고 있다
-한치 앞을 분간할수 없는 어둠속에서 순식간에 벌어 졌다
동료들이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을 눈앞에서 지켜 보면서도 뛰어들지 못하였다.
파도가 순식간에 한두번 배의 선수와 선미를 덮치고 휩쓸기를 몇 차례 배는 의미 중심을 잃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새벽 1시경 한 동료가 육지다 하는 순간 쉴새 없이 몰아치는 비바람으로 앞을 분간할수 없었다 이 순간 배는 바위에 충돌하면서 산산조각 동강이가 나고 말았다.선실에 갖혀있던 동료들은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해 죽어갔고 갑판위 동료들은 캄캄한 바다로 뛰어 들었다.육지로 간신히 몸을 의지한 동료는 15명인데 대부분 알몸이었다. 부서진 배 속에서는 아직도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도저히 살려낼수가 없었다.
날이 서서히 밝아서야 혹시나 살아 남은 동료가 몇이나 될까 여기저기 여러차례 불러 보았다.결국 살아남은 사람은 36명에 불과 하였다.
하멜 자신도 간신히 살아 남은 처지였음을 알게 된다.
-입었던 옷은 갈갈이 찢어지고 온 몸은 한군데도 성한곳이 없었다.
캄캄한 어둠속에 목소리로만 확인할수 있었던 동료들은 날이 밝아서야 여기저기서 하나둘 나타 났다. 피투성이로 범벅이된 동료들은 폭격을 맞은 모습가 다름이 없었다.
처절했던 이 당시 순간들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해안으로 떠 밀려온 5-6구 동료들의 시신부터 가까운 해안에 묻었다.
몸을 가눌수 있는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썰물이 빠져나간 해안에 금방 숨을 거둔 선장 에그베르츠의 최후 모습을 발견 하였다.
이 때만 하여도 정확한 위치도 확인 할수 없었다
인기척도 없는 넓은 벌판이 펼쳐 있고 멀리 높은 산이 보일 뿐이다.
해안선에는 부서진 배에서 떠 밀려온 온갖 잡동산이로 어지럽혀 있었다.
사슴가죽이며 포도주 통이며 소금에 저린 돼지고기와 찢어진 돛들 뿐이였다
하멜은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하멜은 20대의 청년으로써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수많은 고난들을 이겨냈다.
제주에서 두차례 탈출에 실패하고 서울에서 동료 두사람이 감옥에서 끝내 숨진것도 못 보고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길을 떠난다, 이들 선원들은 항해,의료,총포기술,지리,조선造船,그림등 다양한 개성과 직종들을 가진 선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한번 항구를 떠나면 보통 귀환하기 까지는 3년여에 가까운 해상생활에 메달린다.
일반적으로 다른 항해 기록들에서는 선상 반란들이 일어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여 예기치 않는 불상사가 벌어지기 일쑤이다.그러나 이 배의 선원들의 선상사고는 찾아 볼수 없다.
이 당시 무역 항해 선단들이 안전하게 귀환 하는 경우는 7-8활에 불과하다
2-3활은 예기치 않은 기상과 해상 사고로 조난되거나 기타의 해상 사고로 희생된다그래서 이들의 살아돌아 가면 기적적인 일들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게된다
하멜 일행들이 년령은 12세 급사 소년에서부터 30대 조타수 선원에 이르기 까지 다양 하였다.선원들은 한국말을 쉽게 익혀 나갔다
제주에서 서울,강진으로 유배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약간의 의사를 주고 받을수 있었다.
특히 사찰로 찾아가서 스님들로부터 많은 세상 돌아 가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고장의 풍습.제도.심지어 정치상황들을 들을수 있었다. 바로 이들이 언어 소통에 많이 익숙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 당시 표정들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한국의 사찰에 스님들을 찾아 다녔다.
그들은 매우 인자하고 쾌활하여 전날에 벌어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거나 다른 나라의 풍습이야기를 해 주면 대단히 즐겁게 여겼다. 승려들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좋아 했던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하였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네델란드의 국민들의 2-3개 국어를 할수 있는 능력을 이해할만 하다.
나무꾼이 되어 구걸생활
유배지에서 관리들은 추운 겨울에는 3리그밖에 있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도록 하였다.
하멜은 그 당시 표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입은 옷들은 나무를 해 나르며 다 낡고 찢어졌다. 추위는 점점 몸을 오그라들게 하였다. 이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집집을 돌아 다니며 구걸을 하기로 하였다
이곳 지방민들의 피부색깔이 다른 우리 일행들을 향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수취심을 극복하고 입을것을 얻기 위하여 소금 한 주먹을 얻기위하여 마을밖에 까지 나갔다
이 기회에 추운 겨울을 겨우 지낼수 있었다
하멜은 수많은 고초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을 인간적으로 대접하는 관료에 대하여는 칭찬을 털어 놓기까지 한다.
하멜은 더 이상 이러한 날들을 보낼수 없었다.동료들과 함께 탈출을 모의 하였다.
탈출에 성공한하멜은 일본 주재 상관에게 보고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탈출을 위해 본격적으로 배를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걱정과 슬픔을 안고 이 나라에서 노예 생활을 하기보다는 한 번 모험해 보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저희들은 의심이 많은 사람들 때문에 매일 괴로움도 겪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친한 朝鮮 사람 중에서 매일처럼 저희들에게 왔습니다.술과 음식을 얻어 먹고 가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저희들은 그에게 술대접을 하엿습니다.섬에 같이 가서 솜을 사오는 데 필요한 배를 살 수 없는가고 말을 꺼냈습니다.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 배 타고 솜을 사 올 수 있게 되면 사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승낙하여 얼마 후에 배를 하나 사왔습니다. 저희들은 값을 치르고 배를 인수 했습니다. 그런데 배를 판 사람은 저희들이 자기 배를 샀다는 것을 알자, 만일 저희들이 그 배를 타고 도망가기라도 하면 자기는 死刑될 것이 틀림없다고 하며 도로 물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거의 갑절되는 값을 치르고 그를 달랬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눈앞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약을 서둘렀습니다. 저희들은 즉시 돛이랑 닻, 그리고 밧줄이랑 노 따위의 必需品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날을 택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길잡이 삼아 탈주하려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그 날 저녁 모두가 흥분한 가운데 쌀이랑 물, 그리고 그 밖의 필요한 물건들을 나르며 달이 지자 성벽을 넘어 배가 있는 데로 집합했습니다. 그리고 우선 섬으로 가서 식수를 구하고 나서는, 곧 이어 순풍을 만나고 또 썰물에 올라탔습니다.
다음 9월5일에는 동이 트자 마자 바람이 멎었기 때문에 돛을 내리고 노를 저었습니다.
돛을 내린 것은 그들이 추적해 올 때 발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녁이 되어 강한 바람이 역시 서쪽에서 불어 왔기 때문에 조선의 땅이 완전히 멀어졌습니다. 탈출 이틀째 9월5일 아침 날이 밝아 오자 우리 앞에 섬이 나타 났다
인근 해안에서 어부 한사람이 고함을 치며 우리를 향해 부른다
일본으로 탈출은 힘겹게 성공하였다.
이들이 네델란드로 귀환할 때 최후 생존자는 15명에 불과 하였다.
낯선 조선땅에서 49명 아까운 젊은 목숨들이 숨져 간 것이다.
하멜은 네델란드로 돌아가서 한국을 미워하거나 원망을 털어 놓지 않았다.
그는 한국인들을 향해 따뜻하고 고마운 나라로 표류기를 통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하멜은 진정 한국을 사랑한 청년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하멜에 대하여 아무런 보답이나 우정의 손길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이 땅에서 숨져간 49명의 넋들을 제되로 추모하지도 못했다.
필자는 혼자 이들의 고통스런 희생들을 알게 된 1999년부터 6월부터 저는 이들의 고혼을 추모하고자 새로운 난파 해안을 찾아 (대정읍 신도2리)을 찾아서 막걸리 한 잔을 떠 놓고 매년 이들의 넋을 위로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제되로 제단이라도 만들어 이들의 숨져간 넋을 기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여러해 전부터 해 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작년부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Corea Hamel Memory Society를 창립하여 1999년5월에 이어 두 번째로 희생자에 대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필자는 네델란드의 온화한 국민성처럼 하멜은 인정넘치는 젊은이라고 말한다.
이들 청년의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은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교훈과 감동을 심어주고 있다.는 것이다.그러함에도 이러한 역사문화에 대한 관심들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이것은 앞으로 정부와 함께 한국과 네델란드의 우호증진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리라 믿고 있다.
필자는 20여년 동안 고대 한일 문화 이동 뱃길을 연구하는 고대해양 탐험가이다.
1996.5.고대 한일해로 해양문화 이동뱃길 탐사대장으로 제주에서 나가사키 두 차례 2001년월 전남 영암에서 규슈 사가현 가라쓰항 까지 모두 세차례 통나무로 엮어만든 원시형태의 뗏목배를 타고 탐험항해를 하였다.
이런 한.일 고대뱃길을 탐험하기 전부터 하멜 난파표류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을 해 오고 있다.이러한 공로로 이 분야 역사문화 탐험과 연구 업적으로 2000.5.해양수산부 장관상.2007년 대통령 상 2008년 장보고 대상을 받았다.
글쓴이:채바다 chai bada 한국하멜기념사업회 회장 Corea Hamel Memory Society Chief President
문의: 010-3744-2539 mail: chaibada@hanmail.net
추신:필요한 인물 사진은 www.ttebe.net 홈페이지 바다박물관 인사말에 사진 첨부 요망
기타 문의 사항 연락 바람
질문 내용에 대한 답변
Japp씨의 전시회를 시작으로 해서 어떻게 그분이 하멜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한국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러한 필자의 노력들이 한국과 네델란드 친선과 우호 증진에 커다란 징검다리가 될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네델란드 대사관을 몇 차례 찾았다.
하멜 후손이나 관련 기념사회를 찾고자 함이였다.
마침 한국주재 네델란드 대사관 김만석 상무관을 만나 네델란드 하멜 재단 얍 스냅 사무총장,Dick Van Zanten 회장을 알개 되어 서울 방문길 만나게 되어 서로 우호증진을 위해 협력해 나가자는데 합의를 모았다 2008년 8월22일 제주도서귀포 학생문화회관에서 355주년 하멜및 동료 희생자 49위 추모문화제 행사를 하였다.
이 자리에는 한스 브릭 주한 네델란드 대사 제주도 부지사 등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 하였다.
향후 계획.
1.당시 하멜을 비롯한 동료들을 위한 추모행사를 매년 해 나갈 것이다.
2추모공원과 추모비를 건립한다
3.하멜과 연관된 도시들과 문화 관광 교류 활성화를 펴 나간다.
4.선장 Egvertz 출신 도시 암스텔담과 로텔담에 선원들 후손들을 찾는 작업과 이 도시들과 자매 결연을 만들어 갈것이다.
5,한.네델란드 역사문화 관광 축제를 펼쳐 나간다.
추모행사에 따른 사진자료들은 cafe.daum.net/ihamel 에서 보시면 됩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첫댓글 참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계속 관심 가네요.
2010년 신묘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