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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48)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종종 논쟁의 대상이다. 주된 쟁점은 ‘예수의 부활이 육신의 부활인가, 아니면 영혼의 부활인가’다. 예수의 부활이 육신의 부활이라면 2000년 전 바리사이들의 믿음과 통하는 셈이다. 반면 예수의 부활이 영혼의 부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의 초상. 렘브란트는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유대인 마을로 들어가 수년간 살면서 유대인의 고유한 얼굴을 관찰했다. 그리고 예수의 초상을 그렸다. 중앙포토
이화여대 교목을 역임한 김흥호 목사는 다석 유영모의 제자다. 김 목사는 그리스도교는 물론 유불선(儒佛仙)에 두루 눈이 밝았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기독교 도인’이었다. 김흥호 목사 생전에 나는 이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입니까, 아니면 영혼의 부활입니까?”
김흥호 목사는 오히려 내게 이렇게 되물었다.
“2000년 전에 숨을 거둔 예수의 육신이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고 합시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걸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것을 스스로 되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보다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숨진 예수의 주검을 내려서 눕혔다는 돌판.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찾은 순례객들이 그 위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그는 ‘과거의 부활’이 아니라 ‘현재의 부활’에 밑줄을 그었다. ‘예수의 부활’이 아니라 ‘나의 부활’에 방점을 찍었다. 김흥호 목사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이 아니라 나의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성숙해지면 예수와 내가 하나가 됩니다. 예수 안에 거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진정으로 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예수의 부활은 물리적 부활이다. 그들은 예수의 육신이 죽었다가 되살아났다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수의 부활’이라고 여긴다.
골고타 언덕에 서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왜 우리는 그렇게 믿고 싶을까. 영혼이 아닌 육신이 되살아났다고 믿고 싶을까. 어쩌면 거기에는 ‘나의 욕망’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골고타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 예수는 이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지고, 다시 부활했다고 한다. 백성호 기자
이 몸뚱이를 가지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은밀한 기대. 예수의 육신이 부활했으니 예수를 믿는 나의 육신도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은밀한 욕망 말이다. 그런 욕망이 우리의 믿음, 그 아득한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는 달리 말했다. 그는 하늘나라는 욕망의 통로로 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통해서 온다고 했다. 십자가는 욕망의 소멸을 뜻한다. 그래서 예수는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무너뜨리라고 했다. 그렇게 영적으로 가난해지라고 했다. 그럴 때 비로소 ‘영원’ 안에 거한다고 했다.
동트기 직전의 갈릴리 호수 풍경이다. 새 한 마리가 자유롭게 호수의 수면 위를 가르고 있다. 백성호 기자
태초부터 우리 안에 깃들어 있던 ‘신의 속성’ 속으로 말이다.
짧은 생각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
실제 신약성경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의 어록으로
말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런 거함은
그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절로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했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니
나는 구원을 받았다.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여기에는
커다란 결핍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이런 식의 공식에는
예수의 십자가는
있지만
나의 십자가는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있지만
나의 죽음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부활은 있어도
나의 부활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에고와
예수의 속성은
그냥 겹쳐지지 않습니다.
저절로
거해지지 않습니다.
내가
나의 십자가를 통과하며
나의 에고가 포맷될 때,
비로소
내가 예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까지
말한 겁니다.
그렇게
예수를 따른다고
예수 안에 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통에
기름이 한 방울
떨어진다면
물과 기름이
하나가 될까요.
아닙니다.
기름이 물통에
들어갔지만
그냥 위에서
둥둥 떠다닐 뿐입니다.
물과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름에게
자기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통과하며
기름의 속성이 포맷되고
물의 속성,
다시 말해
내 안에 있는 신의 속성이
드러날 때
비로소 물과 기름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우리는 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거기에 담긴
더 깊은 뜻을
길어 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예수의 십자가만
바라보던 우리에서
나의 십자가를
찾아가는 우리로
바뀔 테니까요.
그래야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듯
우리도
예수 안에 거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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