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은 독학으로 사물의 이치를 깨쳤고, 여름에는 삼베, 겨울에는 광목으로, 옷 한 벌에 바리때 하나만으로 지냈고, 그나마 한 벌 옷도 여든이 되도록 손수 기워입는 ‘無所有의 삶’을 실천했다.
특히 ‘성철불교’라는 독보적인 불교이론을 확립한 성철스님은 8년동안 눕지도 자지도 않는 長坐不臥(장좌불와) 수행을 했고, 그리고 성전암에 철망을 두르고 10년동안 칩거생활도 했다. 또한 안정사 천체굴에서 수행할 때에는 어느 누구든 3천배를 올리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았다.
또한 백일법문을 통해 선종의 핵심사상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정립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곧 불교의 근본진리가 禪과 敎를 통해 中道에 있음을 밝히고, 선종의 정통한 종지가 돈오돈수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동서고금 서적 섭렵
성철 큰스님은 1912년 임자년 4월 10일에 지리산 깊은 산골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합천 이씨 집안에 태어난, 스님의 속가 이름은 영주(英柱)였다.
“우리 마을에 개구쟁이가 하나 있었지. 돈이 필요하면 집 대문 밖에서 동네가 떠나가도록 제 아버지 이름을 부르곤 했어. 그러면 그 부모는 동네가 부끄러워서라도 아이에게 돈을 주었고, 아이는 그 돈으로 저 하고 싶은 것을 하고는 했제...”
성철스님은 그 개구쟁이는 바로 스님 당신이었다고 한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내가 남에게서 배운 것이라고는 소학교 6년과 서당에서 배운 자치통감(自治通鑑)이 전부여. 그것 말고는 다 혼자 공부해서 알았지.”
성철 큰스님은 모든 것을 오로지 독학으로 배우고 깨달았다. 그 만큼 독서량은 엄청났는데, 그것은 스님의 열반 뒤에 발견된 ‘서적기’만 보면 알 수 있다. 스님이 스무살이던 때, 적은 그 서적기에는 스님이 그 때까지 읽은, 팔십여 권의 책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스님은 훌륭하다는 동서고금의 책을 아무리 읽어도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성철스님은 우연히 어떤 스님에게서 영가 대사의 [증도가]를 얻어서 읽게 되었고, 그 책을 읽는 순간 마치 캄캄한 밤중에 밝은 횃불을 만난 듯 했다.
‘아, 이런 공부가 있구나.’ 그것은 참으로 큰 충격이었다. 스님은 그 때까지 불교 경전은 한번도 대한 적이 없었다.
‘삶의 근원’ 구하던 청년, 화두참선
스님은 그 길로 바로 대원사로 갔다. 영원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구하려고 집을 떠나 깊은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성철스님은 대원사 주지스님의 배려로, 그 곳에서 스스로 영원의 문제를 풀기 위한 참선길에 들어갔다. 스님은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사람들이 가고 오는 것도 모른 채, 밤낮으로 정진하였다.
스님은 한번 결심하면 번복하거나 멈추는 일없이 그대로 실행하거니와 그런 태산 같은 의지로 정진하여 삼매에 들었다.
성철스님은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 는 이른바 무(無)자 화두를 가지고 참선에 정진하였다. 스님 말씀으로는 그 때에 정진에 든지 ‘42일 만에 마음이 다른 데로 도망가지 않고 동정일여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스물여섯에 가야산 해인사 동산스님에게 出家
1936년 초겨울에 성철스님은 김법린, 최범술 해인사 큰스님들의 권유로 해인사로 갔다. 그 무렵 해인사에는 당대의 선지식인 동산스님이 백련암에 머물고 있었다.
성철스님을 본 동산스님은 곧 큰그릇임을 알아차리고, 퇴설당에 자리를 마련해 주며 출가를 권하였다. 성철스님은 처음에는 참선만 잘 하면 그 뿐이지 승려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도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형식이 무슨 소용이겠느냐하는 생각에서 였다. 그런데 결제날 동산스님의 법문은 성철스님의 마음 자리에 운명의 싹을 틔어 놓았다.
“여기 길이 있다. 아무도 그 비결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대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는, 그러나 그 길에는 문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길 자체도 없다.”
성철스님은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여 1937년 정축년 3월에 동산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이영주’라는 속인의 옷을 벗고 ‘성철’이라는 법명으로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수행의 길에 든 것이다.
출가 삼 년만에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스님은 마침내 칠통 같은 어둠을 깨뜨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본 것이다.
성철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당신의 경지를 점검하기 위해 운수납자의 여정에 오른다. 깨달음이 이루어지면 닦음도 단박에 이루어지는 ‘돈오돈수’가 참으로 견성의 경지이기 때문이었다.
8년간 눕지 않고 자지 않는 長坐不臥 수행
그러는 사이에 성철스님은 그 수행의 예봉과 다문박식으로 제방 선원에서 명성이 자자해졌다. 특히,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 그 유명한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은 큰 화제가 되었다. 눕지도, 자지도 않는 장좌불와 정진은 동화사 금당에서 견성한 뒤로 여덟 해 동안 줄곧 이어졌다. 스님은 그 여덟 해 동안에 밤중에도 잠은커녕 졸음으로 고개 한 번 떨구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일제로부터 나라가 해방되었다. 해방은 스님들에게 한국 불교의 본래 면목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봉암사 결사’가 그것이다. 성철스님이 이끈 봉암사 결사는 선종 본디의 종풍을 살리고 옛 총림의 법도를 이 땅에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성철스님은 이 때에 ‘공주규약(共住規約)’이라 하여 대중이 함께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규칙을 직접 만들었다. 이는 바로 부처님 법대로 살려는 참으로 엄격한 실천궁행이었다.
‘한국 불교의 르네상스’라고 할 이 봉암사 결사는, 성철스님 생애에서도 퍽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거니와, 오늘날 우리 불교가 지니고 있는 질서와 형식이 거의 모두 봉암사 결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만큼 불교사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안정사 천제굴 시절, 삼천배 기도 후에 만나
스님은 이 곳에서 처음으로 신도들에게 그 유명한 삼천배를 시키기 시작했다. 스님을 만나려면 젊은이든 노인이든 재벌이든 장관이든 누구 할 것 없이 먼저 부처님 앞에서 삼천배를 해야 했다. 절은 그 행위 자체가 참회요 공덕인 것이다.
삼천배는 그것을 삼천 번씩 되풀이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마음의 때를 닦아 없애 나가는 과정이다. 스님이 신도들에게 예외없이 삼천배를 시킨 까닭은, 아마도 쉬임없이 무릎과 허리를 폈다 구부렸다 하며 삼천 번 절하는 동안에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스스로 마음의 먼지를 닦아 없애서 자기를 바로 보게하려는 방편에서였을 터이다.
스님은 또 삼천배 기도 말고도 신도들을 위한 수행방법의 하나로 아비라 기도라는 독특한 예불의식을 만들어 전해 주었다. 이 아비라 기도는 삼천배의 예배 절차와 함께 그 뒤로도 줄곧 이어져 큰스님 살아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해인사 백련암에서 이어지고 있다.
성철스님은 이렇듯 신도들에게 기도를 통한 참회와 수행을 철저히 가르치는 한편, 당신 스스로도 평생을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일체 중생을 위한 백팔배 참회 기도를 함으로써 수행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1955년 겨울에 대구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그뒤로 십년 동안 한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스님은 퇴락한 성전암을 수리하고는 그 둘레에 철조망을 둘렀다. 그렇게 둘러친 철조망 안에서 일체의 바깥출입을 삼가면서 스님은 차곡차곡 한국 불교의 앞날을 준비하였다.
뒷날 ‘성철 불교’라 일컫게 된 독보적인 불교이론과 실천 논리를 확립합니다.
그 성전암 시절에 불필 스님과 그 도반들에게 공부 잘 하라고 손수 지어 준 글이 있다. ‘성팔이 노트’는 윤회 이야기로 시작된다.
성철스님은 평생 윤회에 대해서 많은 법문을 하였을 뿐더러 서구의 과학적 이론이나 실험 사례를 빌어서 윤회가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려고 힘썼다. 한편 스님의 법어집인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 나오는 ‘수도자에게 주는 글’도 바로 그 노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백일법문’을 설하다
1965년 성철스님은 마침내 굳게 닫은 성전암 문을 열고 나왔다. 그 길로 김용사에서 대중들을 모아 놓고 스님의 사상을 거침없이 토해 내기 시작하니 그것이 대중 앞에서 한 최초의 법문이었다.
봉암사에서 결사의지를 되살려 자운스님, 청담스님과 함께 해인사를 총림으로 키우는 데에 뜻을 모았고, 성철스님은 그 뜻을 받아들여 1967년에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해 겨울, 성철스님은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법석을 열어 사부대중을 위해 하루 두 시간씩 일백일 동안 법문을 하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백일법문’ 입니다.
‘백일법문’을 통하여 스님은 흐트러진 불교교리를 정리하여 집대성하고 조계종의 법맥을 바로잡고 나아가 선종의 핵심 사상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었다.
곧, 불교의 근본 진리가 선과 교를 통해서 중도에 있음을 밝히고 선종의 정통한 종지는 돈오돈수에 있음을 천명하는 한편 불생불멸의 진리는 원자물리학이나 양자 역학에서 또한 입증된다는 내용이었다.
일체가 불생(不生)이요, 불멸(不滅)이라는 것이다. 일체가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니, 사람도, 짐승도, 초목도, 돌도, 허공도, 해와 달도 전체가 모두 불생불멸이지 생멸은 없다.
성철스님은 불생불멸의 중도법문을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를 들어서도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일대 사상을 중도(中道)로써 전한 백일법문으로 한국의 불교는 선종, 교종 할 것 없이 모두가 불교의 사상에 대해서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
마음의 눈을 가리는 세 가지 독은 욕심내고, 성 내고, 어리석은 것인데, 그 가운데 탐욕이 근본이며 탐욕은 이기주의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따라서 지금의 모든 행, 불행은 스스로 만든 결과라고 하였다. 이기주의와 물질문명에 병든 이 사회에 스님의 그 말씀은 청량한 법음이었다.
스님은 피고 지기를 되풀이하는 이 자연계가 무상하기 짝이 없어 보여도,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라고 하였다. 그래서 중생들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윤회의 고리에 갇혀서 억겁을 두고서 나고죽는 고통스런 순환을 되풀이하면서, 인간으로, 동물로, 미물로, 때로는 초목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난다고 하였다.
“마음의 눈을 뜨고 지혜의 광명을 보면 내가 부처요, 이 사바세계가 극락이다”
마음을 가리고 있는 번뇌의 구름을 걷고 지혜의 광명을 볼때 중생들은 비로소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 영원한 생명속에 무한한 능력을 가지는 대해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스님은 또한 일러주었다.
바로 그 곳에 윤회를 벗어난 영원한 자유와 절대적 행복이 있으며 이 광명은 영겁이 다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요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중생들을 향해 외치셨다.
그렇다면 부처는 어떤 방법으로 될 수 있는가? 스님은 거기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바로 화두참선이라고 일러주었다.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일상과 몽중과 깊은 수면의 경계에서도 오로지 화두를 참구하여 근본 무명까지 없어진 구경에 이르게 되면, 마음에 쌓인 먼지가 다 없어져서 본디부터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불성 곧 자신의 부처를 자기의 힘으로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70년대 말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한국불교는 또 한차례의 거센 부침을 겪어야 했다. 점차적으로 위기의 국면에 빠져들고 있던 한국불교계가 그 때에 선택한 분이 바로 성철 큰스님이었다.
큰스님이야말로 허물어져 가는 불교를 받쳐줄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성철 큰스님은“내 이름을 빌려주어서 불교가 중흥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며 제7대 종정직을 수락하였다.
그 때까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던 성철 큰스님은, 이 때에 취임법어 하나로 대뜸 세간을 술렁이게 하면서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삼십년 동안 해인사 지킨 ‘가야산 호랑이’
‘종정 안한다는 말만 하지 말라고 해서 종정이 되었으나 산중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스님은 종정 취임식 날에도 서울의 취임식장에 가지 않았을 뿐더러, 1991년에 다시 제8대 조계종 종정에 재추대되어 입적하기까지 끝끝내 산승이기를 고집하여 평생 그 말씀을 지켰다.
일찍이 그 박학다문함과 장좌불와 팔 년, 동구불출 십 년 같은 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거니와, 또 그 독보적인 사상과 선풍으로써 이땅의 불교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성철큰스님은, 1967년 이후로 줄곧 가야산 해인사를 지켜오는 동안에‘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또 큰스님은 ‘도를 이루려면 가난부터 배워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었다. 음식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 정도면 된다며 소식으로 일관해왔는가 하면, 여름에는 삼베, 겨울에는 광목으로 옷 한 벌에 바리때 하나만으로 지내는 청빈한 삶을 이어 왔으니, 그나마 그 한 벌 옷도 여든 나이가 되도록 손수 기워 입었다.
“스님, 입고 계신 옷이 저희가 보기에는 상당히 남루하고 누더기입니다만 몇 년 동안 입으셨습니까?”
“삼십 년 넘었어. 이 옷이 두 갠데 번갈아 가며 입어. 삼십 년 넘었어. 거의 사십년 됐어.”
“평상시에 안 입고 예식 있을 때에만 입으십니까?”
“장 입고 다니는 옷이라.”
“늘 입고 다니시는 옷이군요.”
“오늘 특별히 입고 나온 줄 아는 모양이네. 나 장 입고 다니는 옷이야.”
“......”
“나 제일 못났기 때문에 좋은 옷 입을 자격이 없어. 아무 자격이 없는데 좋은 옷 입을 수가 있나.”
스님을 찾아온 어느 기자와의 대화 한 자락입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퇴설당에서 열반
그러나 큰스님은 삼십 년 남짓 한결같이 다니던 가야산 포행길을 언제부터인지 힘겨워하기 시작하였다. 가야산 호랑이도 한 자락 가사 밑에 어느덧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있었다.
“스님, 한 말씀만 여쭈겠습니다.”
“뭐를?”
“일천삼백만 불자가 있는데 그 불자들에게 한 말씀만.”
“한 말씀만? 내 말에 속지마라. 자신의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내 말 말이여. 내 말한테 속지말어.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
1993년 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님법어집’ 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되는 것을 보고 나서 두 달만인 그해 11월 4일 아침에 성철 큰스님은 열반하였다.
“내 말에 속지 마라”는 말을 던져주고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그 날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스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참선 잘하라!” 그 한 말씀이 마지막이었다. 그러고는 제자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처음 출가한 그 방에서 마지막 열반의 길에 드니, 행운유수(行雲游水)의 사문의 길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법랍 59년, 세수82세로 큰스님은 열반 게송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김서영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