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왕족, 귀족, 실업가 유지의 자제들이 모여든 '경성유치원'

▲ <매일신보> 1917년 3월 29일자
예상 이상(豫想 以上)의 호성적(好成績)
사랑스러운 유치원의 수료식
<매일신보> 1917년 3월 29일자
귀족과 및 실업가 중의 유지의 발기로써 설립된 경성유치원에서는 28일 오전 10시에 그 유치원 안에서 원아의 보육수료식을 거행하였더라. 내빈으로는 백작 이완용, 자작 조중응, 남작 이윤용, 남작 김춘희, 송영 경기도장관, 상전 시학관, 백완혁, 조선태, 김한규, 여규형, 박종환 등 제씨더라.
정각이 되매 내빈이 착석하고 풍금소리에 발을 맞추어 행렬을 지어 착석하였으며 좌우로는 원아의 모자 부형이 다수히 참관하는 중에 원아의 국가봉창이 있고 다음에 수료생과 아직 수료치 못한 아해에게 태전 원장으로부터 증서를 주고 수료생에게 대한 상품과 일반원아에게 대하여 인도고공한 개식, 조자작의 기증한 공책 연필 등의 상품수여가 있었고 다음에 수료생 총대의 유창한 국어답사가 있고 수료생의 졸업식 노래와 재원생의 형님 누님 작별하는 '사요나라'의 고운 노래소리가 관객의 칭찬을 받았고 일회, 이회의 수료생으로 다른 학교에 가서 성적이 좋은 아해에게는 조자작으로부터 특별한 상품을 기증하였더라. 다음에 송영 도장관과 조중응 자작의 수료생에 대한 훈유로 식을 마치었는데 원아의 원장의 앞에 나가 예를 베풀고 증서를 받으며 진퇴하는 모양이 단정하고 규모가 발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통하다는 감동을 일으키더라.
이번은 유치원 창설후 제3회의 수료식인데 수료생은 남자 일곱 명이라. 첫째는 백완혁씨의 영손 상길(象吉)인데 작년에 그 부친의 여의인 아해이라. 영광스러운 마당에 상복의 그림자는 잔잉하고도 기특하여 보이더라. 다음은 조자작의 차남 문호(文鎬), 박승직씨 아들 두병(斗秉), 김한규씨 아들 일환(佾桓), 심상각씨 아들 도섭(道燮), 조민희 자작의 아들 중철(重鐵), 변호사 이종희씨의 아들 보상(輔商)으로 그 중에서 공사립학교에 가는 아해가 세 명이라 하며 미수료생이 27명이라 하더라. 일, 이회의 수료생 21명에서 열한 명은 내지인 소학교에, 여덟 명은 보통학교에서 공부하고, 두 명은 가정에서 수학하는데 그 중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아해로 특별히 우등의 성적을 얻어 이날 조자작의 기증한 상품을 탄 아해가 다수함은 유치원 당무자의 제일 기꺼하고 자랑하는 바이라. 그 아해는 조동윤 남작의 아들 중구(重九)는 종로소학교에, 김진옥씨의 영양 용(瑢)이는 여자고등보통학교부속보통학교에서, 박종환씨의 영양 조자(照子)는 종로소학교에, 김춘희 남작의 아들로 고 김홍집씨에게 입후된 교영(敎英)이는 서대문소학교에서, 백완혁씨의 영손 창덕(昌德)은 앵정소학교에, 민영휘 자작의 외손 이달재(李達宰)는 일출소학교에, 박용환씨의 아들 진원(震遠) 등 일곱 명은 그 중에도 남보다 뛰어나게 성적이 좋은 아해들이라.
이에 대하여 설립자의 한 사람되는 조중응 자작은 말하여 왈 "유치원을 설립한 이래로 이 같이 성적이 의외에 좋았으므로 금년 봄에는 더욱이 양가의 자제로 수십인을 선발하여 보육을 하기로 작정하였노라" 하며 박종환씨는 말하기를 "나의 아들과 딸의 남매가 이 유치원에서 보육을 받고 나갔는데 두 명이 모두 학교에 가서 성적이 우수한 것은 실로 희한한 일이라. 자기는 자기의 실험으로 말미암아 학교에 보내기 전에 아해를 유치원에 보내여 가르칠 필요가 크게 있는 줄로 생각하노라" 하더라.
[사진설명] 아기네 모여 앉아, 유치원수료식

▲ <동아일보> 1926년 2월 3일자
유치원방문기 (4) 경성유치원
귀족의 자녀가 제일 많다고
<동아일보> 1926년 2월 3일자
경성유치원은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명치 45년(즉 1912년)에 현재 중앙유치원장이요 겸하여 담임보모인 경구 사다(京口 サタ)라는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 안순환(安淳煥)씨의 발기로 유길준씨와 여러 실업가의 후원을 얻어 설립된 것이라 한다.
처음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부속보통학교의 일부를 빌어서 해내려 오던 것인데 대정 3년(즉 1914년)에 집을 짓고 현재 처소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집과 모든 설비는 이왕가와 여러 귀족의 기부로 되었으며 경비는 경기도청으로부터 일년에 일천 이백 원의 보조를 받으며 각 아동에게 월사로 매삭 이원 오십전씩 받아서 나아간다고 한다.
현재 아동수효가 백명인데 남자가 71인이오, 여자가 29명이라 한다. 어디나 유치원에는 여자보다 남자가 많은 것은 일치한 모양이다. 이 유치원에는 귀족의 집 자녀가 많은 것이 특색이라 하며 이강공 전하의 아드님과 따님이 다 이 유치원에 다닌다고 한다. 경구 사다씨가 원장 겸 보모요, 경영자로 있고 김용(金瑢)씨, 라효숙(羅孝淑)씨, 윤천숙(尹天淑)씨가 조수로 계셔서 경구씨의 일을 도와준다고 한다.
이 유치원 보모가 일본인인 관계와 또는 이 유치원에 다니는 아동들은 대개 일본인과 교제가 많은 집 자녀이므로 아동들이 일본말을 잘 하는 것이 특색이라고 한다.
아동수효가 해마다 점점 늘어가 첫해에는 30명이던 것이 일년에 십여명씩 늘어 금년에 백명에 달하였다 하며 동 유치원을 졸업하고 나아간 아동의 수효가 264인인데 그 가운데 남자가 205명이오, 여자가 59인이라고 한다.
(*) 이 경성유치원은 '(1944년 9월 1일판) 경성 전화번호부'를 통해 확인해 보았더니, 주소가 "인사정(仁寺町) 34번지"로 표시되어 있다. 이와 아울러 <매일신보> 1917년 5월 29일자, "이준공가(李埈公家)에 영석영전(榮錫永傳), 공비 전하는 비상히 기꺼하심" 제하의 기사에 "...... 이우(李우) 공자의 요사이 동정을 듣자온즉 공자께는 매일 이강공저에서 기거하시며 탑골공원 뒤의 경성유치원에 다니시는데 ...... " 라고 적고 있는데, 이로써 탑골공원 뒤편에 이 경성유치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