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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무안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박일훈
生의 原動力인 定言明法으로서의 自己省察
―정호승論
朴日訓
1. 들어가며
19세기 W. 워즈워드에 의해 정형화된 情緖는 天性 내지는 自然性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이며, ‘정서의 流露的 표출’이야말로 곧 詩에 다름 아니다. 이 시대의 천재성 시인들이 추구하고자 한 것은 바로 정서의 유로적 표출로서의 解放이었으며, 내면적 주관의 발현의 정도가 爆裂的일수록 정서의 시학에 더욱 부합된 것으로 추단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정서의 시학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T.S. 엘리엇은 ‘시는 정서의 해방이 아니라 정서의 逃避’라고 선언하게 된다. 시의 생명인 정서를 버리고 도피하라는 말이 ‘정서를 拒否하라’는 命題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천성 내지는 자연성만큼은 기술적으로 客觀化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서는 시간적인 개념이므로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큰 感動일지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변적이고 마침내는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서적 감동의 可變性과 消滅性은 浪漫主義 시에서 치유할 수 없는 不安動搖의 주요인자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정서로부터의 도피’는 단순한 정서의 유로적 표출을 거부하고 시는 정서의 감각화 내지는 정서의 사물화라는 새로운 等式을 제기한다. 시간속의 천성은 裁斷師에 의하여 기획되어져 공간속으로 이동한다. 이것이 20세기의 시가 가지는 정서의 繪畫性이다. 그리고 時間藝術인 정서의 산물을 입체적이고 조형적인 형상으로 再構成하여 空間藝術로 이동시키려는 일련의 노력들은 모더니스트들의 철저한 기술적 작업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정호승(鄭浩承, 1950∼ )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抒情詩人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76년 출간된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비롯해 ‘서울의 예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등 그의 대표작품들을 통해 대중적 호소력이 강한 서정시를 활발히 발표해오고 있다.
여기서 정서의 회화성을 노래하는 모더니스트는 아니지만 정호승의 시가 무슨 연유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고 있는지에 대해 잠시 의문을 제기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정서의 解放’에서 ‘정서의 逃避’로, 그리고 다시 ‘정서의 回歸’로 시문학적 조류가 변증법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정호승의 시가 대중에게 주는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호승의 시가 가지는 울림, 즉 감동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먼저 탐구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은 일단 그것을 ‘정호승式 自己省察’이라는 관점에 포커스를 맞추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때 정호승의 성찰은 ‘나의 상처가 치유되기 위한’ 것이거나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상처의 치유와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성찰과는 각별하다는 인식하에서 출발한다.
인간이란 저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의식 속에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기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신의 思考의 길이만큼이나 성찰의 길이도 각각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호승의 성찰에는 ‘모두가 共感할 수 있는’ 성찰이란 점에서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마치 I. 칸트가 말하는 定言明法(categorical imperative)의 경지에서 볼 수 있는 성찰이기도 하다.
칸트에 의하면 논리적인 보편성, 자의성의 배제, 인간의 목적성, 그리고 행위자의 자율성 등 네 가지의 암묵적 조건을 전제로 하여 사람의 ‘特定한 行爲’가 ‘道德的 規範’이 된다고 한다. 예컨대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명제는 ‘네가 유명해지고 싶으면 도둑질을 하지 말라.’와 같은 개인적 욕망과 결합된 假言命法과는 다른 정언명법이라는 것이다. 즉 정언명법은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는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법을 행위성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中庸(제13장)의 ‘나에게 베풀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죽는 날까지 나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헌신하였던 마더 테레사는 자신의 천국행을 위하여 매일같이 회개하고 성찰한 것이 아니라, 환자들의 끝이 보이지 고통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을 한탄하며 일평생 성찰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다음 시는 정호승의 성찰의 깊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전문
만물의 영장이라고 해서 인간에게만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심코 밟고 지나갔거나 혹은 한 송이 꺾어 들고 향기라도 맡았던 야생화며 야생초에도 상처와 아픔이 있다. 설사 그 상처와 아픔이 인위적인 것이든 아니든 무릇 살아있는 생명체에는 저마다의 아픔과 상처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성찰이 중요한 덕목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경우의 성찰은 나만을 위한 성찰이나 회개가 아닌, 인류보편적인 관점에서의 자기성찰일 것이 요구된다. 이것을 이른바 ‘정언명법으로서의 자기성찰’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시인 정호승은 인류애의 보편성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풀과 꽃잎 같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하여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상처와 아픔이 충분히 치유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처가 있는 아픔 그 자체가 마침내 향기로 승화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정서의 유로적 표출이라는 정서의 시학에서 벗어나, 나아가 정서의 회화성에 안주하지 않고 ‘정서의 普遍的 성찰’을 통하여 진리적 가치를 노래하는 정호승식의 성찰에 쉽게 공감하고 同化되는 것이다. 그러한 공감 내지 동화야말로 정호승의 시가 가지는 각별한 울림 내지는 감동으로 발전한다. 그러고 보면 정호승의 시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하에서는 정서의 보편적 성찰을 노래한 정호승의 시 중에서 현대인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특히 인생에 힘이 되어주는 메시지가 담긴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시세계를 검색하고자 한다.
2. 삶의 원동력이 되는 메시지
2-1 꿈
일반적으로 정호승의 시에 주로 등장하는 단골 이미지는 별, 눈, 뿌리, 칼 등이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는 소외된 주변인들의 고단하고 사연 많은 삶을 따스한 기운으로 감싸 안아 시의 세계로 옮겨놓고 있다. 고단하고 사연 많은 애절한 삶은 이 세상의 결핍을 드러내는 삶이며, 기다림과 그리움의 삶이다. 정호승은 기다림과 그리움에 지치고 서러운 주변인들의 인생 위에 자신의 기다림과 그리움을 비벼 보임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삶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하는지를 일러준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꿈’이다.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다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 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을 바라본다
―「고래를 위하여」전문
오늘을 사는 2030은 불안하기만 하다. 통계청의 실업자 수에도 포함되지 않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따로 취업 준비를 해야만 하는 이십대의 청년백수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의 꿈도 꾸지 못한다. 어렵게 취업한 삼십대는 겨우 결혼은 했지만 가계 빚에 삶이 쪼들리다보니 부모공양은커녕 마음 편히 자녀를 가질 수도 없다. 그리하여 연애 포기, 결혼 포기, 출산 포기 등 ‘3抛’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의 현실사회에 대한 불안은 간혹 기존 정당정치의 무능함을 향해 분노로 응집되어 표출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니듯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청년에게는 언제나 큰 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고래가 가끔은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올라 긴 숨을 들이키며 별을 바라보듯이, 청년이 꿈을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별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人情 내지는 配慮가 그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인정과 배려가 비록 별처럼 멀어서 아득하거나 작아서 아주 미미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한편 그러한 꿈이 청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어서 초로에 접어든 시인의 연배에서도 당연히 ‘가끔 내 마음 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칼날 위를 걸어서 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는 나지 않는다
눈이 내린다
보라
칼날과 칼날 사이로
겨울이 지나가고
개미가 지나간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 수 있다
―「칼날」 전문
언뜻 이 시를 읽는 사람은 인간은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이도 그저 악착같이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적 역설(paradox)이다. 시린 겨울도, 일만 하는 개미도 칼날 위를 넘나들며 하루하루를 존재한다. 하물며 사람이 넘지 못할 태산과 역경은 없는 일이다.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저마다 ‘스스로 칼날이 되는’ 용기를 가지고 역경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존엄한 것이며,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져야 하는 당위성을 획득한다.
2-2 사랑
인생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주는 정호승의 두 번째 화두는 ‘사랑’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랑은 남녀 간의 에로스적인 사랑이요,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사랑이나 법화경속의 부처님의 자비심과 같은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그런데 막상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同情心’이 없으면 안 된다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믿는다. 우리 민족이 조상대대로 불러온 노래, 경기민요 중 ‘한 오백년’의 가사 일부를 보면 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많은 이 세상 냉정한 세상 동정심 없어서 나는 못살겠네.’가 그것이다. 정호승은 기다림과 그리움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을 노래한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움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전문
그늘을 사랑하는 시인, 눈물을 사랑하는 시인, 그가 바로 정호승이다. 우리는 쉽게 맑은 하늘과 눈부신 햇살에 현혹된다. 하지만 나무그늘이 없다면 여름 한낮의 햇살은 뜨겁기만 하여 고통스러울 뿐이다. 인생에 그늘이 없는 사람은 유복하게 태어나 별다른 실패와 아픔도 없이 출세가도를 잘 달려온 사람일 수 있다. 눈물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이라면 정호승은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오히려 시인 정호승은 그늘 속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고난과 역경이라는 상황을 기꺼이 사랑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늘이 있는 사람이거나 그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눈물이 있는 사람이거나 눈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정호승은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다운 사람인가를 일러준다. 그 사람은 사람의 ‘그늘’을 헤아리고 그의 아픈 상처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러한 사람은 세상의 수많은 그늘 속에서 눈물을 제일 많이 흘려온 사람일 수 있다. 그러기에 그늘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이야말로 시인이 진실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광경인 것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슬픔이 기쁨에게」 일부
정호승의 사랑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슬픈 눈물을 통해서만 진정 얻을 수 있는 것이요, 그 눈물은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 속에서 영글어진 것이다. 미처 참된 사랑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거나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의 오랜 기다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허망한 기쁨보다 참된 슬픔이 주는 의미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슬픔의 진정성을 알게 될 때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에 지친 할머니에게서 귤 값을 깎으며 기뻐했던 ‘너’는 비로소 자신의 沒人情과 沒廉恥를 뼈저리게 반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호승이 말하는 사랑은 결코 絶對者나 富와 權力을 가진 者의 施惠的인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동정심이요, 弱者의 약자에 대한 배려로서의 사랑이요, 어려운 삶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서로에 대한 憐憫이다. 따라서 그것은 同病相憐의 精에 다름 아니다.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서울의 예수」일부
‘가난한 자의 별’을 바라보면서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는 마음, 그것은 연민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다하지 못하고 속죄양이 되신 예수님의 자책은 다름 아닌 살아있는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다. 척박하고 암담한 현실일수록 이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정녕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Sollen규범에 마땅히 따르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근원적인 攝理라는 점을 시인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3 不屈
‘試鍊은 있으나 失敗는 없다’는 말은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 남긴 말로 유명하다. 열아홉 살에 네 번 가출을 하여 인천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빈대에게서 배운 지혜라고 한다. 빈대가 하도 많아 상다리마다 물 담은 양재기를 놓고 상 위에 올라가 자는데도 빈대가 물어서 일어나 보니 빈대가 벽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가서는 사람들 위로 낙하하여 피를 빨더라는 얘기다. 다만 우리는 비범하였던 정 회장과는 달리 보통의 사람으로서 최소한 한 번 정도는, 혹은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시련과 실패를 겪는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면 기쁨이란 단어는 死藏되고 말 일이다. 시련이나 실패에도 사람이 좌절하지 않는 것은 불굴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불굴이라는 덕목이 없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포자기에 빠져 결국 自殺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정호승은 인생의 바닥을 말한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에 대하여」 전문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라’(因地而倒者,因地而起)는 말은 고려 때 불교를 중흥시킨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하신 말씀이다.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생명체는 그것이 날짐승이든 들짐승이든 물고기든 간에 죽음에 이르는 종국에는 땅에 쓰러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름지기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넘어진 땅을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때로는 땅에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허망해 하지만, 그것이 자연의 순리라면 그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피하려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땅에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은 없으며, 삶의 시련이란 해가 떠서 지는 것만큼이나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호승은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單刀直入的으로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시련과 고통에 직면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바닥이 발이 닿지 않는 바닥이어도, 바닥없는 바닥이어도, 예견하지 못한 바닥이어도 제발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땅에 넘어져 본 사람이, 하여 땅을 딛고 다시 일어난 사람은 지금 땅에 막 넘어지려는 사람 또는 이미 넘어진 사람을 부추겨 일으키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산산조각」 전문
불굴은 再起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수많은 시련과 실패에 직면하다보면 그 삶은 정녕 凄然해지기 쉽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별하거나 명예나 재산을 다 잃거나 건강을 잃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인생이 ‘산산조각이 나면’ 일반의 보통 사람이라면 絶望하기 쉽다. 그 때에도 정호승은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라며 스스로를 다정하게 다독거린다. 이때의 불굴은 依然이다.
사람에게 소중한 것은 저마다 각자 다르다. 모시기를 부처님 같이 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달라서 어떤 이는 돈을, 어떤 이는 권력을, 어떤 이는 명에를 위하여 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애써 허무한 조각들을 주워 모으려 하지 말고 의연하게 살아가야 한다. 금이 나 깨진 종소리는 ‘깨진 소리’에 불과하지만 차라리 조각이 난 파편의 종소리는 ‘온전한 소리’일 수 있다.
2-4 感謝
감사는 고마워하는 마음이다. 고마워하는 마음이야말로 사람이 가진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이며 위대한 덕목이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물질적 소유의 크기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크기나 믿음의 크기에서 비롯한다. 대저 사람은 부모형제에게 감사하고 이웃에게 감사하고 늘 가까이서 다정한 벗이 되어주는 친구에게 감사하며, 혹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절대자에게 감사한다.
그렇지만 고마워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감사의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무엇이 그토록 고맙고 감사한가?’라고 묻는 사람은 삶이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사람이요,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그래서 정호승은 무엇이 우리에게 감사한 일인지를 일러준다.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햇살에게」 전문
시인 정호승은 햇살에게 가장 감사한다. 자신이 먼지 같은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감사하고 이른 아침에 환한 나팔꽃이나 영롱한 아침이슬은 아니더라도 심지어 티끌 같은 먼지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먼지에 불과한 자신을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는 햇살에게 감사한다.
공기와 햇빛 같은 것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모든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한 절대 필수요소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런 代價없이 공기와 햇빛이 주는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존재에 대해서 굳이 고마워하는 마음이 없다.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 여기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해와 달, 그리고 별과 같이 자기 주위에 널려있는 당연한 존재에 대해서도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감사하지 않을 일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잎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 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수선화에게」 전문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容恕할 수 있다. 그런데 때때로 정작 자신이 타인의 이해와 배려와 용서가 절실히 필요해질 때 사람은 문득 외로워진다. ‘먼지가 된 나’는 다른 ‘먼지를 볼 수 있게’ 된 일에 진정 감사하지만 그래도 먼지인 나는 언제나 외롭다. 그것은 결코 누구나 함부로 김현승의 ‘절대고독’에 쉽게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로워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은 被造物인 인간만의 능사는 아니다. 절대자인 創造主 하느님도 ‘가끔은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사실을 정호승은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아무도 위로해 주는 이가 없어도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고 한다. 차라리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게 혼자 길을 가다보면 ‘도요새’가 친구가 되어 주고 ‘산 그림자’가 따라오고 ‘종소리’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외로우니까 사람’인 인간의 존재는 따라서 그 외로움마저도 끌어안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때 사람의 벗이 되어 준 도요새와 산 그림자, 그리고 종소리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며, 어차피 살아가며 외로움을 견뎌내야 하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새삼 뜨거운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3. 나가며
근대의 낭만주의는 인간의 지성과 규범을 절대시한 古典主義에 대한 반발로 宗敎와 도덕의 形式主義를 否定하고 인간의 內面的 眞實과 감정을 중시한 文藝思潮다. 이에 대해 20세기 모더니즘은 고도산업화에 편승한 배금주의나 물신주의에 따른 인간의 정신적 斜陽의 정도를 사물화하려고 노력한 결과 形而下學的 시법을 강조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관념과 정서 및 그 가치가 회복되면서 다시 形而上學的 시법이 대두되고 산문시, 대화시, 소설시 등의 표현기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러한 근현대사에 있어서의 시문학적 조류를 정서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서의 해방’에서 ‘정서의 도피’로, 다시 ‘정서의 회귀’로 규정지을 수 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한편 ‘정서의 회화성’을 강조한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고 있는 ‘주관적 정서를 객관화하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實在와 眞理는 주관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정서 그 자체만으로는 시간예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예술로서 정서를 조형적으로 재구성하지 않으면서도 정서가 객관적 진리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방법이 강구되어진다.
그런데 검토한 바와 같이 정호승의 시에 나타나고 있는 정서는 마치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 가치로서 받아들여질 정도로 울림이 크다. 바로 여기에 정호승의 시가 가지는 특징이 있다. 즉 그 특징은 정호승의 정서는 ‘자기성찰로 여과된 정서’라는 데 있다. 그러한 자기성찰은 지극히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이 아닌, 정언명법에 의한 성찰인 것이기에 ‘정서의 보편적 성찰’로서의 정서의 객관화가 어느 정도 가능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다림과 그리움에 지친 수많은 외로운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수선화에게’) 스스로를 미물보다 못한 먼지로 낮추어보면(‘햇살에게’) 실제 아픈 삶을 살아가면서도 풀잎의 상처를 먼저 보게 되고(‘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걸어야 하더라도(‘칼날’) 가끔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고래를 위하여’)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내가 사랑하는 사람’)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바닥에 대하여’) 끝내는 산산조각이 나더라도(‘산산조각’)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며 간절한 연민의 마음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서울의 예수’) 자세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무한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위에 검토한 몇 편의 시에서도 나타나고 있듯이 정호승의 시에는 양극화적인 요소가 있다. 예컨대 슬픔과 기쁨, 바다와 별, 슬퍼하는 자와 기뻐하는 자, 칼날과 맨발, 먼지와 찬란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호승의 다른 시에서도 兩極化를 포함해 이른바 메타피지컬 포위트리의 특징이라고 정의되어지는 컨시트(conciet), 痛懲 등의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메타피지컬 포위트리의 시학적 관점에서 정호승의 작품들이 어떻게 시적 질서의 합일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음을 사족으로 붙이고 싶다.
첫댓글 미처 숙련되지 못한 채 졸작을 통해 '문학평론'의 길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원로 선배님들과 문우님들의 아낌없는 지도편달을 앙망합니다.
심도 있는 비평입니다. 정호승 시룰 꿰뚫었습니다. 서정시와 주지시를 넘나드는 분석력이 예리하고, 칸트를 비롯한 적절한 원용기법도 수준급입니다. 시에 대한 감상과 반응은 불가피하게 주관적이고 정서적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 주관적, 정서적 반응을 객관화시키는 것이 바로 문학연구라는 측면에서 성공적 비평입니다
부족하기만 한 글에 용기를 주시니 참으로 망극합니다. 이렇게 어줍잖은 글이라도 쓰게 된 것은 오로지 조수웅 고문님의 올 한 해 동안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고문님의 가르침 한 마디, 한 마디에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렸습니다. 주위의 강한 권면때문에 촉박하게 쓰다 보니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호승이 말하는 사랑은 결코 절대자나 부와 권력을 가진자의 시혜적 사랑이 아니고 동정심이요 약자끼리의 배려요 서로에대한 연민이요 결국 동병상린의 정이라는 것과 정호승의 정서는 자기성찰로 여과된 정서라고 간파하신 박일훈교수님의 비평에 감동하며 '문학평론' 데뷰를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로써 제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의 정곡을 짚어주시니 참으로 망극합니다. 항상 베풀어 주시는 사랑에 감사합니다.
정호승의 시 그분의 감성에 감동을 받아 자주 필독하면서 신금을 울리는 시인입니다. 어쩌면 박교수님은 제마음에 꼭 맞는 글과 말씀을 하실까 두고두고 새겨 몰독하렵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자주 음독하지요.
부족한 글에 동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글을 계기로 참된 평론을 쓰고자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정호승님의 시는 쉽게 가슴언저리에 닿았던 시라서 친근감이 있었는데 먹물 머금은 평론으로 시에 대한 지평을 넓혀 주셨습니다 감사 합니다 노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