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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완연한 시월의 주말, 강원도 정선 민둥산(해발 1119m)의 나무 한그루 없이 길게 뻗은 능선에 오르면 서울 광장시장만큼이나 탐방객들로 붐빈다(의외로 외국인들도 많다). 갈바람에 흔들리는 은빛억새가 능선을 뒤덮고 ‘리틀 백록담’이라는 별명이 붙은 돌리네(Doline) 연못이 독특한 풍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지난주말 7년만에 민둥산을 다시 찾았다. 민둥산 들머리는 여러곳이 있지만 가장 많이 출발하는 곳이 증산초등학교다. 학교 자체가 해발 600m에 위치해 있다. 정상과 고도차가 500여m차 밖에 나지 않는다. 그래서 정상까지는 3km남짓만 올라가면 된다. 산행코스도 다양해 2.4km의 급경사 코스와 3.2km의 완경사 코스 그리고 3km의 발구덕마을로 우회하는 코스를 선택해 오를 수 있다.
민둥산을 찾은 지난 주말은 하늘이 구름은 커녕 티하나 없이 쾌청했다. 증산초 부근 들머리는 억새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대형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로 시끌벅쩍했고 관광버스를 타고온 산악회 회원들로 붐볐다.
특히 MZ세대의 비율이 높았다. 민둥산이 가을의 낭만을 상징하는 ‘은빛억새’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돌리네 연못은 청년들의 ‘핫스폿’이기 때문이다. SNS엔 민둥산 ‘리틀 백록담’에서 찍은 사진이 차고 넘친다. 산을 오르는 내내 중년층에 못지않게 친구 또는 연인과 부부가 함께 온 2030 청춘들도 줄을 이었다.
민둥산 산행을 소개하는 글엔 등린이(등산하는 어린이)도 쉽게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아주 틀린말은 아니지만 민둥산은 결코 낮은 산이 아니다. 능선에 도달하기까지 울창한 숲이 이어지고, 경사도 가파르다.
비교적 부드러운 발구덕마을 코스를 선택해 간이 매점이 있는 쉼터까지는 무리없이 걸었다. 하지만 이곳부터는 관목과 잡목이 뒤섞인 급경사를 걸어야 한다. 오르막을 한참 걸어 숨이 턱에 찰 때쯤 잠시 쉬고 있는데 등에 자신의 몸무게만한 배낭을 맨 백패커 2명이 내려오고 있었다. 가까이보니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었다.
‘백패킹의 성지’로 불리는 풍광좋은 산이나 섬에서 백패커를 만나는 것은 흔하다. 하지만 60대 여성 백패커를 산에서 만난 것은 아주 드믄 일이라서 살짝 놀랐다. 정상에서 하룻밤을 잔뒤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다며 미소를 지었다.
백패커의 배낭 무게는 대략 20~30kg에 달한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수십km를 걷거나 고산을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실화를 소재로한 트레킹 영화 ‘와일드’에서 주인공 세릴 스트레이드는 처음엔 자신의 몸보다 커보이는 배낭을 어깨에 메고 일어서다 너무 무거워 엉덩방아를 쪘다.
그 배낭속에는 10개월간 멕시코 국경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4,285km에 달하는 PCT(Pacific Crest Trail)를 걸어야할 그녀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으니 인생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60대 여성들이 어떤 연유로 백팩커가 됐는지 궁금했다. 세릴은 삶의 버팀목이 됐던 가장 소중한 사람(어머니)과의 이별을 통해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한 뒤 '악마의 코스'라는 말을 들을만큼 멀고 험난한 길을 걸으며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해 백패커가 됐다. 당시 세릴의 나이는 40대였다.
하지만 이들은 얼핏봐도 자녀를 출가시키고 직장과 살림에서(심지어 남편으로부터) 해방돼 인생을 즐길 나이다. 그 나이에 백배커를 하는 것은 세릴 같은 ‘깊은 사연’을 떠나 산과 자연을 즐길 수 도있겠지만 결국은 ‘젊은날의 로망;을 실현하려는 열정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이를테면 친구와 함께 석양에 비친 금빛 억새군락을 바라보며 아메리카노를 음미할때의 작은행복 말이다. 한창 나이때는 꿈도 못꿨을 것이다. 대다수는 그런 순간을 상상하면서도 나이탓을 하며 지레 포기하지만 그들은 고단한 행로에도 과감히 길을 찾아 떠났다. 마음뿐 아니라 꾸준한 걷기를 통해 자신감도 생겼을 것이다.
7년만의 민둥산 트레킹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것 같다. 거대한 사발처럼 음푹 파인곳에 자리잡은 ‘리틀 백록담’도 새로웠지만 그곳에서 정상쪽을 바라보면 아찔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람에 살랑이는 억새 군락이 강렬한 가을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것이 바다와 호수에서나 볼 수 있는 ‘윤슬’ 같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만난 60대 여성 백패커와의 조우다. 이들은 세월의 무게에 짖눌려있던 열정을 되살려주었다. 사무엘 올만의 시 ‘청춘’의 한 구절처럼 “때로는 스무살의 청년보다 60대의 장년이 더 청춘일수 있다. 청춘은 불타는 정열, 삶의 깊은 데서 솟아나는 샘물의 신선함이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