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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다리는 중요 요지
증 언 자 : 허춘섭(남)
생년월일 : 1957. 10. 23(당시 나이 23세)
직 업 : 무(현재 식당 지배인)
조사일시 : 1989. 5
개 요
5월 19일 처음으로 시내상황을 듣고 시위에 참가. 21일에는 노동청 앞에서 시위상황을 목격하고 오후에는 트럭을 타고 화순으로 간다. 22일 밤부터는 학운동 자위대로 활약하였다. 5월 27일 피신했다가 9월에 연행되어 1981년 8월 석방된다.
시내는 지금 난리가 났는데 느그는 앉아서 뭣허냐
9일 저녁까지만 해도 내가 살던 학운동은 조용했다. 그런데 7시쯤 동네에 사는 한용덕 선배가 술이 잔뜩 취해서 돌아와 "시내에서는 지금 공수들이 사람들을 무참히 때려죽이고 난리가 났는데 느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뭣허냐"고 하였다.
그 형님은 시내에 있는 양화점에 다니고 있었다. 서른이 넘은 노총각에다 장남인 그는 선을 본 여자와 시내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시내상황을 목격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데모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평상시와 흡사한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심한 줄은 몰랐었다. 술이 너무 많이 취해 있는 그 형님을 일단 집으로 데려다주었는데 금방 또 나왔다. 나는 다시 그 형님을 데리고 가서 밖에서 문을 잠궈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을 박차고 식칼 두 자루를 들고 나왔다.
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심한지 확인이나 해보자고 하고는 동네 어른을 모았다. 그 형님을 부축하고 시내를 향해 우리는 대열을 지어 내려왔다.
배고픈다리 아래 학운전파사가 있는 골목에서 빨간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여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여자는 "우리 남동생이 학생인데 죽었다"고 하면서 우리 대열과 함께 했다. 동네로 죽 따라 내려오는데 마침 1.5톤 봉고트럭이 왔다.
그 여자가 차를 세우더니 학운 전파사에서 마이크를 설치하고 소리가 잘 나는지 시험을 해봤다. 그녀(전춘심)와 내가 앞에 탔다. 우린 일행 중 몇 명도 뒤에 타고 서서히 내려왔다. 숭의실고 앞에 당도했을 때 지원동 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40여 명의 대열을 이룬 동네애들 뒤로 붙었다. 자연히 대열은 꽤 길어졌다.
용덕이 형의 죽음
8시 30분쯤 가로수를 보호하기 위해 받쳐놓은 각목을 전부 뽑아들었다. 누군가 기름도 가져가자고 했다. 그래서 차에 탄 사람들 중 나와 몇몇은 그곳에서 내리고 청바지의 여자는 계속 시내로 들어갔다. 나중에야 그녀가 일명 전옥주라 불리는 전춘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남광주주유소 쪽으로 대열을 돌렸다. 여전히 나는 선두에 선 채 용덕이 형을 부축하였다. 주유소에는 사장은 없고 부인과 종업원 1명이 있었다.
"기름 좀 주시오."
"없어요."
"비상탱크 것을 좀 주시오."
"비상탱크도 없어요."
그 여자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일행 중 한 사람이 각목으로 유리창을 박살내 버렸다. 그때서야 놀란 그 여자는 비상탱크에 있는 기름을 주었다. 우리는 2리터 깡통과 주위에 있는 병 등에 나누어 담았다. 우리는 기름과 각목을 들고 전남대 의대 병원 로터리까지 왔다.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애가 한참 연설을 하고 있었다. 우리 대열도 멈추어 그것을 들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절규하는 듯했다.
그것을 본 다음 우리는 다시 구경나온 사람들이 우리 대열이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주어 계속 나아갔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 노동청 앞길에 탱크 한 대가 서 있고 그 뒤로 공수들이 키보다 더 큰 방패를 들고 주욱 서 있었다.
대열 뒤쪽에서 계엄군을 향해 와아- 하면서 돌을 던졌다. 그러나 그 돌은 선두에 있는 우리들에게 맞았다. 용덕이 형을 부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탱크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선두대열은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다행히 인도 위로 쓰러졌으나 용덕이 형은 도로 가운데로 넘어졌다. 공수들은 도로에 있는 사람들을 개머리판과 워커발로 사정없이 짓이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뒤로 물러서버렸다. 길바닥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용덕이 형은 의식불명이었다. 용덕이 형과 다른 부상자들을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 용덕이형 가족들에게 알려주고 나는 그냥 잠을 잤다. 그 후 용덕이 형은 뇌수술을 네 번이나 하고 2개월 만에 죽었다. 고등학생 한 명도 머리를 다쳐 뇌수술을 했는데 그 애는 정신이 돌아버렸다고 들었다.
콩볶는 듯한 총소리
21일 오전 동네 아이들은 모두 놀라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시내상황이 궁금한 나는 혼자 미니버스를 얻어타고 시내로 나왔다. 차에 탄 12명이 각목으로 차체를 두들기면서 노동청 앞까지 갔다. 그곳에는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를 온통 새카맣게 메우고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노동청 건너편에 서 있었다. 분수대 앞에서 공수 한 명이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 안에서 누군가 지역방위병을 공수복을 입혀 세워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때 군용 트럭 한 대가 도청을 향해 달려갔다. 앞좌석에 3명, 적재함에 8명의 시민군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차가 막 커브를 틀어 도청 쪽으로 향했을 때 총소리가 났다. 적재함에 탄 한 사람이 도로로 떨어졌다. 도로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달려가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끌고 나오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였다. 보초는 분명히 총을 쏘지 않았는데 도청 옥상에서 정조준사격을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트럭이 물러난 다음 장갑차 한 대가 또 도청을 향해 출발했다. 총을 쏘자 장갑차는 뒤로 물러나 2, 3분쯤 서 있다가 다시 돌진했다. 그러자 보초가 도청 안으로 철수하는 것이 보였다. 장갑차를 타고 있던 시민이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피투성이가 되어 떨어 졌다.
이번에는 지프차 한 대가 출발했다. 남도예술회관 조금 못 미쳐 기사는 뛰어내리고 지프차는 남도예술회관 옆 건물을 들이받고 타버렸다. 그때 군용 헬기가 떠나며 방송을 했다.
"나는 도지사인데 시민 여러분은 자제하고 들어가주십시오."
처음에는 남자 목소리였으나 조금 후엔 여자 목소리로 바뀌어 계속 방송을 해댔다.
잠시 후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도 기총사격이라고 생각하면서 전남대병원 앞으로 도망을 갔다. 시민들이 머리에 총상을 맞은 여자 1명을 부축하여 전남대병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계속 걸어 학운동을 향해 오는데 삼거리에 시위대가 시체 8, 9구 정도를 트럭에 싣고 와서 "시체를 찾아가라"고 하고 있었다. 시체들은 시커멓게 멍이 들고 몸이 부어 옷이 터져 있었다.
화순으로
그런 것들을 보고 동네에 들어와 있는데, 승용차 한 대가 어디선가 들어왔다. 동네 선배 다현이 형과 후배 조성구와 함께 승용차에 올라타고 숭의실고 앞까지 왔을 때였다. 시내 쪽에서 트럭 7대가 오고 있었다. 나는 트럭을 세우고 조성구와 함께 트럭에 옮겨탔다. 기사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앞자리에 앉아 우리는 화순으로 향했다. 너릿재를 지나 검문소가 보였다. 나는 화순 가까운데 살고 있어서 화순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고 있었다.
"야 성구야, 너 내려가서 저 초소 전화기 선이랑 무전기 전부 치워버리고 와라이."
"알았소, 형."
차를 세우고 내가 성구에게 말하자, 성구가 뒤에 탄 사람들과 함께 검문소로 향했다. 그들이 몽둥이로 검문소 유리창을 깨자, 2명의 순경들은 산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검문소 안의 모든 선을 잘라버리고 성구가 돌아오자 우리는 계속 화순으로 들어갔다.
화순에서는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대강 소문으로 듣고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화순읍민들은 박수를 치면서 환영을 해주고 음료수와 빵 등을 올려주었다. 나는 앞에 타서 잘 모르지만 슈퍼나 가게의 주인들이 올려준 것 같았다. 내가 탄 차는 그냥 광주의 상황만 알려주고 바로 돌아왔지만 다른 차들은 계속 무기를 털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화순탄광으로 들어간 것으로 안다.
배고픈다리는 중요요지
그날(21일) 밤 공수들이 학운동 뒷산에 있는 공동묘지를 지나면서 총을 난사했다. 우리 집은 바로 태봉산 밑이어서 총소리를 듣고 가족들 모두 부엌에 모여 밤을 지새웠다. 다행히 우리 집까지는 총알이 날라오지 않았지만 미랑동에 있는 절간 벽에는 몇 군데 총알이 박히기도 했다. 그 절은 미리 사람들이 피신하여 인명 피해는 없었다. 공수들은 도청에서 철수하여 조대 뒷산에서 학운동 뒷산을 타고 태봉산으로 갔다. 그들이 태봉산에서 불을 피워 아침밥을 해먹는 것이 보였다. 만약 태봉산에서 공수들이 내려와 시내로 들어가려면 배고픈다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배고픈다리는 중요요지였다. 그래서인지 도청을 점령한 사람들이 학운동으로 총기를 가지고 왔다. 예비군 소대장이었던 문장우 씨가 무기를 인수받았다.
카빈 60정과 수류탄 1박스, 최루탄 2개와 실탄 등이었다. 문장우 씨는 그들에게 "배고픈다리는 중요요지이고 위험지구니까 지원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도청에서 30여 명을 데리고 왔는데, 내가 보아도 애들이 어려서 총기를 사용할 줄 몰랐다. 예비군 소대장이었던 문장우 씨가 사격술과 야간사격에 대한 교육을 시키고 조편성을 하였다.
산에 있는 공수부대가 언제 내려올지 몰랐으므로 공수의 진입을 막기 위해 우리는 배고픈다리를 폭파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동네 어르신들이 우리 마을의 재산이니까 폭파시키면 안 된다고 차라리 바리케이드를 치라고 말렸다. 그래서 동네에 세워져 있던 앰뷸런스와 각목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리고 공수부대가 산에 주둔하고 있어 언제 내려올지 몰라 위험한 무랑, 숙실마을을 비롯한 산밑의 냇가 주변의 마을 주민들을 피신시켰다. 아무래도 우리가 지키고 있는 배고픈다리 아래에서 잠을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다음 문장우 씨는 한 조에 7-10명씩 조별로 배치를 시켰다.
경계근무를 서다
나는 전쟁에서 말한다면 최전방인 현 수정맨션과 다리 사이에 서 있었다. 방패도 없이 그야말로 공수부대가 산에서 내려와 총을 쏘면 그냥 맞아 떨어질 자리였다.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 시간에 보초를 서는데 도청에서 '담배-연기'라는 암호가 내려왔다. 또 공수들이 시민으로 가장해서 많이 들어온다고 12시 넘어는 '멸공-통일(횃불)'이라는 암호가 전달되기도 했다.
새벽 3시경 수정맨션 옆에 있는 방앗간 2층집에 한 명의 공수가 나타났다. 공수를 발견하고서도 나는 잔뜩 긴장해 총을 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조의 배치상 자기 조가 있는 구역에서 앞만 보고 총을 쏴야지 조금만 총부리를 돌리면 우리 편이 맞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옆에 있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공수가 부엌으로 들어가 무엇을 가져가는지 딸각딸각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그 구역에 있는 사람들은 잠을 자고 있는지 기척이 없었다. 이윽고 공수가 그 집에서 나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총을 쏘지 못했다.
새벽 4시가 조금 못 되어 망차 한 대가 들어왔다. 우리는 총을 쏘기 시작했다. 망차는 차를 세우더니 암호를 댔다. 도청에서 순찰을 나온 것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 일 없이 아침을 맞았다. 아줌마들이 주먹밥, 김밥은 말할 것도 없고 동네별로 돈까지 모아 30만 원을 가지고 왔다. 우리는 돈을 나이 많은 형에게 맡겨두고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문장우 씨가 인원점검을 한 다음 전부 트럭을 타고 순찰을 돌았다. 배고픈다리에서 출발하여 증심사 입구까지 가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다시 나오기로 결정했다.
공수를 잡다
내가 막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산밑에 사는 친구 김성구가 서둘러 달려왔다.
"어이 춘섭이, 공수가 우리 집에 한 명 들어와 부렀는디이 좀 살려줘야 쓰겄네. 근디 어떻게 했으면 좋겄는가?"
그때 공수라는 사람이 슬리퍼를 신은 채 자전거를 타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보통 군인보다 머리가 좀 길었다.
"어떻게 혼자 떨어졌소?"
"어제 저녁 우리 부대가 상무대로 철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자서 너무 피곤하고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대열 맨 뒤에 따라가다가 도랑으로 빠졌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나봐요. 깨어보니 날이 밝아 있었고 부대는 온데간데 없었어요. 그래서 이분 집으로 들어간 겁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공수의 이야기가 막 끝났을 때였다. 어디선가 지프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와서 멈추었다. 공수는 부들부들 떨면서 김성구 집으로 갔다. 부엌에 감춰둔 배낭 속에는 군복 한 벌, 워커 한 켤레, 무전기, M16 등이 들어 있었다. 공수들은 배낭 속에 따로 하복 한 벌을 챙기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증거물 때문에 공수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지프차에 실려갔다. 그 후 나는 그 공수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아마 도청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총기반납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 할 때 짧은 머리를 한 젊은이가 어디선가 나타났다. 우리는 또 공수인 줄 알고 붙잡았다. 그는 발발 떨면서 말도 하지 못했다.
"저는 현역군인이긴 하지만 공수가 아닙니다. 휴가 나왔다가 사태가 터져 귀대를 못 하고 이모집에 그냥 있었어요. 나는 죄가 없어요."
"이모집이 어디냐?"
"숙실이요."
우리는 그를 데리고 숙실부락에 가서 확인을 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함부로 밖에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하고 각자 집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없어 잠을 자지도 못하고 머리만 감고 다시 나왔다. 그리고 오후에는 총기반납을 했다. 잡혀간 사람들과 총기를 교환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총을 반납해야 한다고 도청에서 온 사람들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동네 어른들은 총기반납을 말렸다.
"절대 총을 주면 안 된다. 여순 반란사건 때에도 총을 반납해 버린 뒤에 밀어 버렸다. 너희들은 이미 총을 들었으니까 계속 싸워라."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반납해라"고 하는 등 옥신각신한 끝에 결국 총기를 반납하는 것으로 결정을 한 것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잡혀간 사람들과 교환을 한다고 하니까 총기 60정과 수류탄, 실탄 등을 반납한 것이다. 그 후 나는 집에서 쉬었다.
피신
25일 다현이 형과 내가 시내상황을 살펴본다고 나온 것이 어떻게 해서 승용차에 타게 되었다. 승용차를 타고 지원동 쪽으로 갔다. 1번 종점 조금 못 미친 곳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 골목에서 임산부가 뛰어나왔다. 산기가 있는지 매우 다급하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차를 세워 임산부를 태우고 재빨리 시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병원에 데려다주었는데 그 후로 곧 애를 낳았다고 들었다. 그 때 한번 좋은 일 한 것 같다. 도청 안에서야 이런저런 상황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시내는 조용한 편이었고 우리 마을도 공수가 주남마을로 철수해 버린 다음이어서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27일 아침. "젊은 사람들과 시민들은 밖에 나오지 말라."는 방송이 들렸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총을 들었으므로 걱정을 태산같이 했다. 결국 어머니는 나를 보성 이모집으로 피신시키려고 준비를 하셨다. 나도 조금 겁이 나서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화순을 향해 걸어가는데 거리에는 그야말로 개미 새끼 한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늙은이와 함께 가는데 설마 총을 쏠라드냐'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갔다.
지원동쯤 갔을 때였다. 교복 차림의 여중생이 골목에서 나왔다. 내가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냐?"
"화순 집이요."
"그럼 나랑 같이 가게 오빠라고 그래라이."
나는 잘되었다 싶어 어머니를 그냥 들어가시라고 했다. 어머니의 동의를 얻기도 전에 나와 그 여중생은 화순을 향해 계속 걸어가버렸다.
1번 종점이 있는 곳에서 막 돌아가는데 군용 트럭 수십 대가 주남마을로 빠져 배치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이미 우리를 본 뒤라 숨지도 못하고 계속 걸어갔다. 주남마을 입구에 있는 가게를 지날 때였다. 공수 3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총을 들이대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사실은 젊은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서 이모집으로 피해 가는 중입니다. 제발 좀 살려주시오. 좀 보내주시오."
나는 사색이 되어 사정사정했다. 그 여중생도 내 옆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로 쪽에 서 있던 공수들에게 실탄을 장진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합동으로 수사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나오는 사람마다 전부 쏘아버립니다. 이 길로 해서 화순으로 가면 또 검문소에서 잡힐 것이오. 그러니 저 산으로 돌아 빨리 가시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때까지 7공수가 있었는데 진압군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그애와 나는 그 공수 덕분에 산을 돌아 무사히 화순에 도착했다. 화순에서 버스를 타고 보성으로 가는 도중 3번씩이나 검문을 받았다. 차 안에 젊은 사람이 나뿐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연행
보성 이모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 한 달 가량 지냈을 때였다. 마을 이장이 외부에서 온 사람은 신고를 해야 된다고 했다. 6월 중순경 어쩔 수 없이 나는 밤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작은형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돈을 얻어 월세방을 얻었다. 그리고 여자랑 같이 살면 의심을 덜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나쁜 생각으로 광주에서 사귀던 여자를 몰래 불러 같이 생활했다. 가족들까지 못살게 군다고 하여 작은형님에게까지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비밀로 하고 어머니만 가끔씩 올라오셔서 생활비를 주셨다. 처음엔 천호동에서 살았으나 그곳에서도 외부에서 온 사람을 조사한다고 하여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
9월 말쯤 어머니가 올라오셨다.
"아이 계엄이 곧 해제될랑갑더라. 광주시민도 인자 화해한다고 해쌌고, 너 예비군 훈련도 나왔응께 인자 광주로 내려가자."
"진짜 인자는 괜찮을까라?"
"괜찮을 성싶은디, 그냥 내려가자."
우리는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광주로 내려왔다. 학운동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월산동 누나집으로 먼저 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학운동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누구누구가 잡혀갔는지 궁금해서 선배집부터 갔다. 선배와 막 앉아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직감적으로 경찰들임을 알아차리고 부엌문을 통해 도망가려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형사들이 이미 지키고 있다가 나를 나꿔채 버렸다. 경찰들은 내가 온 것을 미리 파악하고 집 앞에 경찰차까지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두 손에 수갑을 차고 걷다가 형사들을 밀치고 도망치려 하다가 죽도록 두들겨맞으면서 광주경찰서로 갔다.
없는 총이 어디에서 나오랴
관련자들은 이미 수사가 끝나 있었다. 나의 조서는 총기 30정과 수류탄 한 박스를 숨겨놓은 것으로, 살인한 것으로, 또 세무서를 방화한 것으로 꾸며져 있었다. 먼저 잡혀간 사람들이 고문에 못 이겨 아직 안 잡힌 사람들에게 죄를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내가 맨 마지막에 잡혔으므로 마치 내가 모든 일을 한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정말 모르는 것들이고 한 일도 없어 답답했지만 수사관들은 주범처럼 되어 있는 나를 잡아 환호성을 지르며 나를 닥달했다. 당시 총 1정을 찾으면 1백만 원에 승진이 되었기 때문에 형사들은 날이면 날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조서의 내용을 시인하라고 족쳤다. 특히 총기를 어디에다 숨겨놓았는지를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꼬박 30일 동안을 곡괭이 자루로 맞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나는 시인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한 일도 없고 시인하면 죽을 줄 뻔히 아는데 고통에 못 이겨 시인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에게서 어떤 사실도 밝혀낼 수가 없자 태봉부락 사람들을 괴롭혔다 한다. 총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 그들은 태봉부락 젊은 사람들은 물론 아줌마들까지 데려다 때리고 집집마다 수색하여 벽장문을 다 때려부수는 등 쑥밭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없는 총이 나올 리 없었다. 먼저 끌려온 사람들이 총을 숨겨 놓았다고 하면 내보내줄 줄 알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총 한번 들어 보지 못한 마을의 젊은 사람들도 무고하게 잡혀와 고문을 당하고 상무대로 끌려가기도 했다.
끌려간 지 31일째 되던 날 안천순(수사관)이 수갑을 채운 채 나를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차를 사주면서 전에 없이 부드럽게 꼬드겼다.
"총이 있는 곳만 말하면 그 돈은 전부 너를 준다. 나는 승진만 하면 된다."
"참말로 갑갑하요이. 나는 모른단 말이요. 그때 전부 다 반납했당께요."
결국 나는 보안대로 끌려갔다. 505 보안대 지하실에서 일주일간 고문을 받았다. 그때 받은 고문은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을 뿐더러 입에 담기도 싫다. 일주일 간의 고통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일주일 후 상무대 영창으로 갔을 때 동네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으나 그들은 곧 훈방되었다.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
군사재판을 받는 날이었다. 나는 조서에 도장도 지장도 찍지 않았는데 계엄이 해제될 기미가 보이자 재판을 서둘렀다. 담당 변호사도 군인이어서 변호해도 소용없었다. 재판장이 형을 구형할 때 책상, 의자 등을 던져버렸다. 방위병이었던 최철이라는 사람은 학운동에서 자기 부모를 죽였다고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같이 생활해 보면 사형수들은 인간 본연의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절대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계모라는 이유로 학대받아 원한에 차서 일가족을 살해했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이 죽인 것을 아들인 그가 억울하게 뒤집어쓴 것이었다.
그러나 군법재판은 일심밖에 없어 그는 그대로 남원에 가서 사형 당했다. 무고한 사람을 그런 식으로 몰아 죽인 것이다. 나도 무기형을 받고 교도소로 넘어왔다. 삼청훈련을 시킨다고 봉체조를 하라고 했으나 우리 미결수들은 죄수들이 아니라고 거부했다.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들어간 사람들만 교육을 받았다. 나는 박석무 씨와 전남대생들과 함께 방을 사용했다. 우리는 무죄를 주장하는 단식투쟁을 1주일 정도 했다. 계속 단식을 하려 하자 교도관들이 우리들을 분리시켜 간첩처럼 독방으로 배치해 버렸다. 그 후 4-5월경 재판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민사로 하는 첫 재판이라 취재기자들과 학생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우니까 재판을 중단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통보도 없이 느닷없이 불러 비밀재판을 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하는 투쟁을 하여 재판을 번복하고 연기시켰다.
그때는 거의 석방되고 박남선 등 중요인물들만 몇 명 남아 있었다. 그 중에는 문화방송 방화범으로 몰린 애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 동네에서 싸움하다 잡혀들어 왔는데 가정 없이 떠도는 애들이라 그렇게 몰린 것이다. 조서를 꾸며놓고 얼마나 고문을 했는지 그들은 정강이뼈가 썩고 있었다. 그애 들은 17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들인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방송국 방화범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석방
8월쯤 석방시켜 준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우리는 무죄로 해주지 않는 이상 못 나가겠다고 버티었다. 그러나 특별사면이라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무죄 아니면 안 나가겠다고 거부하니까 어머니를 나 몰래 오시라고 해서 지장을 찍는 걸로 해버렸다.
새벽 4시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새벽 1시가 되니까 교도소 소장 차로 우리를 실어다 각 지역 파출소 앞에다 내려주었다. 나는 남동성당 김성용 신부님과 함께 학운동 파출소에 내려주었다. 안기부 직원 2명이 미리 와서 파출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교도소내에서 단식투쟁하면서 선동하여 요시찰인물로 찍혀 그때부터 한 달간을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면서 감시를 당했다. 석방이라고 나와보니 같이 살던 여자는 애를 낳아 미국으로 입양시켜 버린 다음이었다. 가족 아니면 면회가 안 되는 상황이라 나는 알지도 못했는데 내가 "사형감이라 가망없다"고 우리 부모님들이 "입양시켜 버리자"고 한 것이다. 뜻밖에 내가 빨리 나와버리자 부모님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그 후 나는 남양통신에 들어갔는데 안기부 사람들이 자주 조사를 나왔다. 지방의 현장까지 찾아다니는 바람에 남양통신에서는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사직을 권고했다. 그래서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그만두고 30만 원을 빌려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지금도 아내는 포장마차를 하고 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이곳 삼애산장에서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다. 이런 곳이나 되니까 있지, 그때 몸이 많이 상해 힘든 일은 물론 운전을 하는 데도 힘이 든다.
학운동 청년회 조직
5·18 당시 학운동은 어떤 조직 없이 우리 마을을 지키겠다고 모두 참여했지만 학운동에도 조직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동네 선배들과 어르신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학운동 청년회'를 결성했다.
동구청장, 동장, 동네 유지 등을 모시고 1988년 4월 발대식을 갖고 5월 30일에 정기총회를 가졌다. 회원은 60여 명인데, 그 구성은 40세가 넘은 사람은 지도위원으로 10여 명, 동네 유지와 어르신으로 구성된 고문단, 그리고 청년 등으로 되어 있다.
주로 하는 일은 무등산이 가까우므로 회원 60여 명이 무등산 자연보호 캠페인을 하고 노인당에 쌀, 선풍기, 연탄 등을 지급해 준다. 청년에서부터 어른들까지 조직에 참가하여 대대적인 조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뭉쳐야
고생도 함께 하고 고통도 함께 당해 한이 맺혀 있으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뭉쳐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오월 유관단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다. 내가 나가고 있는 오월민중항쟁동지회만 해도 평민당을 끼고부터는 순수한 5·18의 의미를 잃고 정치적으로 되고 있다.
5·18은 순수하게 민중항쟁으로 남아야지 당적인 차원으로 가면 안 되는데 집단이 당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윤강옥 회장을 만나면 동지회가 그렇게 나가면 되겠느냐고 사정없이 뭐라고 해주는데도 잘 안 되고 있다. 돈 몇 푼이 문제가 아닌데 보상을 받고 나면 오월 유관단체들이 해체되어 버리지 않을까 싶다. 안 그래야 되는데 5·18 정신이 이상하게 당적으로 기울어 심지어는 민정당에서 돈을 받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박남선이도 당시 상황실장이었음을 남용하여 여기저기에서 돈을 뜯어낸다고 소문이 남발하고 있다.
동지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많이 나가버렸다. 나도 요즘은 내 살길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잘 나가지 않는다. 지금 민주화투쟁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학생세력인데 실질적으로 그때 싸웠던 우리가 모두 모이면 1천 명이 넘으니까 5월이 되면 우리가 행사를 주도해야 될 것이다. 그런데도 돈에 매수되어 보상만 받고 끝내버리려고 한다.
5·18 당시 실질적으로 직접 총을 들고 투쟁을 하지 않고 무차별 사격으로 맞은 사람이 대부분이고 싸우다 죽은 사람들은 2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유족회다 뭐다 하는데 앞으로 계속 혜택을 받기 위해서 회를 지속시킬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보상만 받으면 끝내버릴 사람들이다. 부상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도 두 파로 나뉘어 투쟁파, 관제파 하지만 둘 다 보상만 바랄 뿐 사실 '오항동'만이 투쟁 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볼 때 전체적인 단합이 잘 안 될 것은 사실이지만 유족회는 몰라도 부상자회까지는 통합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유족회는 5·18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고 보상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저번 대선 때에는 김대중 씨가 몸까지 바쳐가면서 민주화운동을 한 것을 알기에 선거운동을 해주었다. 그리고 정상용이도 공천받을 때 "국회 가서 진상을 밝히겠다. 국회의원 배지 달아봤자 3개월도 못 가서 나는 감옷으로 갈 것이다"고 했다. 나는 그 용기가 좋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밀어주었는데 배지를 달고는 정치적으로 물이 들어버렸다.
물론 야당을 의지하고 진상규명 투쟁도 해야 되겠지만 당적인 차원으로 이용해 버리면 뿌리가 상실되기 쉬울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정동년 씨가 나서서 오월 단체들을 통합시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람도 국회의원 하려고 할 것이다. 지금 급선무는 국회의원이 문제가 아니라 오월 동지들이 서로 뭉치는 것인데도 말이다. 정동년 씨도 학생 때부터 데모를 했으니까 야망이야 있겠지만 한 개인의 꿈은 희생되더라도 함께 뭉쳐 싸우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장옥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