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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7-4 고향산천 조상님 산소 벌초
자유인 조동화는 일주일만에 고향산천 조상의 뼈가 뭇혀 있는곳 김제 와룡을 찾았다.
죽마고우 한용이 집에 들리니 옥수수 한가마니를 주어 고맙게 받았는데, 호박도 하나 넣어 놓았구먼.
100여미터 떨어진 산소에 들리여, 일주일전에 벌초를 했지만 이번 장마에 풀이 자라 보기가 않좋아 할아버지 할머니 합장봉분과 납골당주변을 깨끗허게 단장했제.
나의 조상님들은 장손이 자주 산소에 들리여 봉분을 다듬어 감사한 마음을 좋아하시리라.
할아버지 할머니 합장봉분을 다듬으며 할머니 생각을 많이했제.
할머니는 1964.5.16. 58세에 파상풍으로 갑자기 일주일 앓다가 내가 이리중학1학년때 돌아가시었는데 하늘도 슬펐는지 장사지내는 날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조동화는 상여 앞에서 영정을 들고 철길을 거쳐 산너머 바떰으로 해서 선산까지 도착하였제.
할머니 장례를 치루고 나서 대청마루 한쪽에 광목으로 칸을 막아 지청을 설치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상을 차려 올리었고, 저녁이 되면 귀신이 나올까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지청은 설치하고 1년만에 철거한 것 같다.
할머니 돌아가신지 어언 58년이 흘러 갔구나.
세세년년 세월도 무상하여라.
할머니 이손자는 편리한 스마트세상에서 즐거운 세상 맛보고 사나이다.
봉분은 여름에 풀이 많이 자라 관리하기가 힘이들지.
봉분에 개망초 같은 잡초가 자라 가만히 놓아두면 묘소가 풀속에 파묻히는거여.
추석이 두어달 남었는디 그때가서 벌초 할라다간 띠풀과 개망초 잡초로 100cm도 넘게 자라, 조상님의 산소인지 풀밭인지 구별할수 없제.
깨끗하게 봉분과 납골당을 다듬어 놓은게, 기분이 가뿐하고 조상님들게 한테 면목이 서는구먼.
봉분은 자주 다듬어주어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하에서도 자손들을 좋은곳으로 인도하는거여.
더운날씨에 일도 못허는 조동화 묘소 다듬니라고 고생 많이 했수다.
두어시간 땀흘린게 집이와서 체중을 달아보니 1.5kg이 땀으로 배설되여 체중이 줄었기에, 맥주 한캔하고 물을 마시여 수분 보충을 했제.
인간은 3분의2가 수분이여.
정상인 사람은 매일 약 1.5kg을 땀이나 소변으로 배설하는디 두어시간에 1.5kg을 배설했다니 굉장한 양이여.
인간은 물이 생명수여.
조동화가 이세상에 왜 온줄 알아
김제조씨 가문을 위하여 필요한 사람인게 이세상에 온거여.
좋은 마음 착한마음으로 조상을 받들어야제.
개인주의 핵가족 시대에 누가 와서 벌초 허겋어.
사는일이 바쁘고 취미생활허기 바쁜디 산소에다가 신경쓰는이 없어.
헐수 없이 벌초는 장손인 내몫이여.
봄 가을에 벌초 했다가는 산소 풀밭되야.
요새 젊은 사람들 별초다 뭐다 제사 같은 것 없어.
조동화는 장손이라 조상님 받든다고 봉분을 깨끗하게 벌초하고 다듬는 자세가 되얐다.
땀흘리고 벌초하는일, 몸안의 독소를 배출하여 좋은점도 있구먼.
할아버지 할머니 봉분에 자란 머리 깎아 주었다고 생각헌게 마음이 편하구먼.
조상님들이여 이세상에서 못다 이룬 꿈 저세상에서는 후손들을 위하여 성원하고 행복하소서.
납골당에 계시는
고조할아버지 옥현 20세손 1840.1.21.-1896.5.24.(57세 사망)
고조할머니 전주이씨 1844.3.3.-1894.1.25.(51세 사망)
증조부(상할아버지) 철만 21세손 1868.4.1.-1946.4.1.(79세 사망)
증조모(상할머니) 보성오씨 오성녀 1882.10.5.-1964.6.16.(음력 1964.5.7. 83세 사망)
숙모 작은어머니 박금례 1938.10.3.-1965.9.4.(28세 사망)
봉분 합장
조부(할아버지) 조갑동 22세손 1906.11.24.-1983.8.3.(음력 1983.6.25. 78세 사망)
조모(할머니) 전주유씨 유보림 1907.1.19.-1964.5.16.(음력 1964.4.5. 58세 사망)
별도봉분
부친 조병옥 23세손 1926.4.11.-1999.1.22.(음력 1999.12. 5. 74세 사망)
모친 정순봉 1928.8.15.-1996.5.5.( 음력 1996.3.18. 69세 사망)
김제와룡 김제조씨 조선식문중 묘역에서
2022년7월은 무더운 혹서기로 묘역에는 개망초와 잡초로 무성하다.
조선식은 나의 조부이시며 1983년8월3일 하늘의 부름을 받아 저세상으로 가시었다.
묘역에는 납골당을 조성하여 고조부 증조부 작은어머니의 유골함이 안치되여 있고, 봉분으로는 조부님과 할머니합장봉분이 있으며 나의 부친과 모친봉분이 있으시다.
납골당은 2005.12.3. 건립하여 17년 세월이 흘러갔구나.
金堤趙氏竹西公波臥龍家族之墓
西紀2005년12월3일 建立
상석에 세긴 글씨도 세세년년 비바람에 희미해졌구나.
작은어머니는 남원에서 시집온 박금례님이시다.
숙부에게 박금례님은 시집와서 딸과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 기승을 낳고 2년만에 저세상으로 가시었으니, 커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지하에서 얼마나 통한의 시간을 보내시었겠는가.
숙부 조병무님과 숙모 박금례님은 신혼의 보금자리를 시골집에서 대가족이 함께 같이 살았기에 금실이 좋은 모습을 보아왔다.
세월은 덧없고 무정하여 그 아들도 장성하여 아들 둘을 둔 아버지로 변하였다.
숙모 작은어머님이 살아계시었다며 풀지못한 이야기를 풀수 있을텐데 사람의 운명은 어찌할 수가 없구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50대 후반의 사촌아우의 건승을 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가신 숙모님을 추모하며
작은 어머니 박자 금자 례자 님께서는 28세의 나이로 가시는 길은 1965년이었으며,
인명은 재천이라 하였으나 인생의 허무함이 이럴 수 가 있나요?
내가 중학2학년때 가시었는데 숙부님은 운구차를 따라오며 울밑에서 봉선화를 불러대며 구슬프게 보내시었지요.
앞으로도 살아갈날이 창창하며 현숙이와 기승이 키우고 중년이 되어가는 모습 보며, 즐거운 세상 이야기 나누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28세에 고인이 된 작은어머님은 남원시댁에 다녀 오시어 풍선을 한박스 선물로 가지고 오셨었지요.
사람의 삶은 운명이라 할 수 있는데도 작은어머님 죽음이 공교롭지 않게 여기지는것은 딸과 아들 두아이의 커나가는 과정을 보지 못하고 소리없이 떠나버린 비통함에 있다고 하네요.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이조카는 중2때 영정을 들고 장지에 갔지만, 이제 이 조카도 노년이 되여 늦게나마 추도사로 작은어머님을 추도합니다.
-2022. 7. 4 조카-
金堤趙氏는 本貫을 金堤로 시조 趙連璧 할아버지의 자손이 번창, 약 800년의 역사를 통해 약5만여명의 씨족으로 번성하였으나, 현대사회는 서구사회를 본떠 조상들이 지켜온 충효와 승조사상은 희박해지고, 현대학문에는 능할지언정 자신에 대한 祖上에 대하여는 거의 백지이며 자기조부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인 현세태라고 한다.
고려말기의 시조에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란 구절이 있는데,
어렸을적 산천과 인걸은 우리들 마음속에 숨쉬고 있는 것 같다.
고향은 언제나 변함없이 푸르른 들녁과 푸른 하늘 그대로, 하링이는 영원한 어머니 품이다.
지금부터라도 조상의 얼을 기리고 복받는 後孫이 되고자 다짐해 본다.
야은 길재의 시를 옮기면,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느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간다.
잡을 수도 잡히지도 않는 화살같이 흘러가는 세월을 탓한들 무엇하리.
<고향산천 김제 와룡은 시골냄세가 물신 풍기는구나.
“故鄕”이란 가슴에 와 닫고 포근한 어머님의 품속같이 느껴지며 鄕愁를 일게 하는 말이다.
물고기나 새나 들짐승들도 귀소본능(歸巢本能)을 지니고 있다.
그리운 고향산천 와룡도 외지인들이 몇가구 들어와 사는디, 인걸은 간데 없어 허무하게 느껴지는구먼.
사창산이 보이는구먼.>
☛金堤趙氏의 來歷☚
-始祖 : 趙連璧
-本貫 : 金堤
김제조씨의 시조는 고려고종때 상장군(대장급)을 지낸 조연벽(趙連璧)이다.
시조 조연벽은 김제 용두동(지금의 옥산동)에서 태어났으며 무예가 뛰어나 장수의 재목으로 꼽혔다고 하며,
시조 조연벽(趙連璧)은 1231년(고려 고종18년) 몽고군이 내침했을 때 대장군에 임명되어 몽고군을 소탕한 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어 후손들은 조연벽을 시조로 모시고 본관을 김제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조연벽은 삼남을 두었는데 장자 조기는 선친의 뒤를 이어 무장이 되었고 대장군에 올랐으며, 차자 조서는 대사헌 좌승지에 올랐으나 후사가 없다.
삼자 조간은 초시 중시 친시를 공의 나이 16세때(1279년 고려 출렬왕5)인 모두 장원급제하여 우정승을 역임하였고 “주자사서집주”를 간행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조간은 父喪에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1264년(고려원종4)에 김제용두동에서 태어나 1325년(충숙왕15년)세상을 떠났으며(향년62세) 시호는 문량공이다.
6세 趙義는 중시조로서 정산현감, 권농단훈련관, 충청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고, 사후에는 천안 개천동에 예장되었다.
의는 이조 태종13년 서기1413년에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여, 세종22년 서기1440년 28세로 순직하시메 세종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와 예장을 명하여 묘소가 심산유곡 천안시 광덕면에 있다.
조의의 정부인 강능김씨 할머니는 공이 28세에 순직하여 행복된 젊은시절은 잠시동안이 되고 말았으니 絶望感에 빠져 下從하기를 결심하고 食飮을 全廢하여 사경을 헤메는 여러날만에 어린자녀들이 붓들고 痛哭하니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어린 5남매를 거느리고 양주로부터 竹山리에 이사, 故鄕에 定着하여 3남2녀를 훌륭히 養育하여 長男 理智 2남 崇智 3남 承智는 각각 登科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두딸은 출가하여 子孫이 繁昌하였으며 할머니께서는 李朝成宗9년 西紀1478년에 作故, 井邑옹동 금산동에 墓가 있다
9세손 처사 조윤침(趙潤琛)은 한성서윤에 여러차례 임명되었으나 잇당사화 정쟁풍토에 환멸을 품어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후학지도에 일생을 바쳐 그이름을 원근에 떨쳤다.
집 하나를 구성하여 학업을 연구하는 장소로 백천이라고 하였으니 수삼명현과 더불어 문주지유(文酒之游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하였다.
조윤침의 호는 백천당이며 서기1476년(성종7년) 공조참판 원우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일흔살이 되는 1545년 인종원년에 별세하셨다.
12세손 응헌은 호가 죽서공이요, 일찍이 연방에 올라 명나라가 패망한후 벼슬에는 뜻이 없어 한세대의 명현들과 더불어 글과 술과 서로 놀면서 의리를 밝히었으며 공은 일곱아들이 있으니 시인들이 말하기를 조씨의 칠룡이라고 말하였다.
공은 효종대왕4년(서기1653년) 졸하니 칠십이세가된다.
응헌(應巘)의 셋째 아들 필태(13대손)는 천성의 효성이 지극하여 묘려에서 삼년을 마치니 원근사람들이 찬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께서 특별히 인견하시어 태학반에서 누락된 것을 아깝게 여기시고 특별히 호계라는 호를 주시었다.
13세손 趙必達장군은 父가 思誨(12세손)로 호조참판, 조부 유정(11세손)은 승정원좌승지, 고조부 윤정(10세손)은 병절교위(정6품)이었다.
공은 1600년(宣祖 33년) 7월 7일 김제에서 태어났다.
조필달장군은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필두로 벼슬길에 나가 순안현령(順安縣令)과 보성군수, 양주목사(揚州牧使) 등 외직을거쳐 포도대장(捕盜大將)과 3도통제사(三道統制使) 등 무려 일흔 두 군데의 관직을 거쳤다.
공은 어느 자리에 있거나 국사(國事)를 공정히 처리하고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지 않아 부임하는 곳마다 청렴결백한 관리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공의 행장(行狀)을 듣고 임금이 시험해 보기 위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제수한 후 얼마 뒤에 파면시키고 암행어사를 보내어 그가 돌아오는 배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윽고 배 안에는 짚신 3켤레와 쌀 3되,군복 한 벌 장검(長劍)과 추(錐)가 각각 한개씩 뿐이라는 어사의 보고를 받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만고청백우성장조필달 (萬古淸白于城將趙必達)' 이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다.
1664년(顯宗 5년) 공이 평안병사 겸 안주목사로 재임 중 별세(향년64세)하니 임금이 예조(禮曹)에 명하여 부조를 후히 하도록 했으며, 예조정랑 박청(朴淸)을 보내어 제사를 치르도록 하였고, 고향으로 운구할 때에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그의 군복, 호남육군사령기(湖南陸軍司命旗), 고신(告身), 화살통, 논시(論示), 교지(敎旨) 12매 등 6종 17점의 유물은 전라북도유형문화재 104호로 지정되었으며 김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대에 이르러 김제조씨문중의 명예를 선양한 인물로는 제헌 및 4선국회의원을 역임한 趙漢栢 종친이 커다란 족적을 남겼고, 2선국회의원을 지낸 趙尙來 종친이 뒤를 이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종친이 배출되어 가문의 명예를 선양하고 국가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김제조씨는 현재 북한과 해외동포를 포함하여 약5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집성촌(集姓村)
-전북 김제군 월촌면 일원
-전남 무안군 현경면 양학리
-전북 정읍군 이평면 창동리
-전북 김제군 김제읍 일원
-전북 김제군 용지면 일원
조(趙)씨 姓의 유래
본래 趙氏 姓은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중국 宋나라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후예라는 설이 많이 전해집니다.
金나라의 침략으로 휘종(徽宗) 흠종(欽宗)이 그들에게 납치된후 고종이 남경에서 즉위하여 남송을 건국했으나 북방에 처져있는 황족들은 금나라의 박해를 부지할수 없어 황해를 거쳐 고려에 亡命하게되어 고려땅 여러지방에 정착한 趙姓은 지명을 따라 貫鄕을 삼고 점차 그수가 불어나자 여러갈래로 분파되어 관향과 시조가 발상한 뒤 수백년후에 족보가 편찬되어 이로 인해서 그원조를 알수 없게 되었으리라 짐작되나 우리나라의 趙姓은 원래는 모두 같은 혈통이라 생각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조씨성(趙氏姓)은 원래 중국사람으로 중국에서 동래하여 우리나라에 정착 세거하게 되었다고, 각종 문헌 및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조씨성의 본관이 정 하여진 때는 고려시대 태조 왕건~ 광종에 이르기까지 고려를 통일하고, 관료제 개편 및 지방 행정구역을 조정 하였을 무렵, 통치수단으로, 각 지방 유력호족 들의 세거지 및 고려통일 공신들에게 대부분 각지역별 행정구역을 기준하여, 본관을 분정(나눔)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씨성의 원류는 하나이나, 살고있는 세거지를 기준으로 나누다 보니 本貫을 달리 하였던 것이며, 각 지역의 조씨성을 가진 가문들은 지정한 본관을 기준으로, 흥망성쇠를 달리한 것 뿐입니다.
趙氏 姓의 본관 !
강서(江西) 강진(康津) 경주(慶州) 김제(金堤) 남해(南海) 밀양(密陽) 백천(白川) 순창(淳昌) 양주(陽州) 옥천(玉川) 임천(林川) 주천(酒泉) 직산(稷山) 진보(眞寶) 태원(太原) 평산(平山) 평양(平壤) 풍양(豊壤) 하동(河東) 한양(漢陽) 함안(咸安) 횡성(橫城) 흥양(興陽)
조(趙)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055,56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7위이다. 본관은 문헌에 200여 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은 56본이며, 이 중에서 시조와 계대를 알 수 있는 본관은 풍양(豊壤)·한양(漢陽)·양주(楊州)·임천(林川)·백천(白川)·함안(咸安)·순창(淳昌)·횡성(橫城)·평양(平壤)·김제(金堤)·직산(稷山)·옥천(玉川) 등 20본이다. 조(趙)씨는 본관별로 시조와 유래가 다르고, 분적된 본관이 없기 때문에 동원동근(同源同根)을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현종 때까지 동성이본도 통혼을 금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같은 성씨끼리 결혼하지 않는 관례가 있다.[1] 한편,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서로 본관이 혼동되어 기록된 경우가 더러 있었다.[2] 인구는 한양 조씨(31.2%)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다음으로 함안 조씨(26.3%), 풍양 조씨(12.6%), 백천 조씨(6.7%), 옥천 조씨(5.1%), 평양 조씨(4.2%) 순이다.
직산 조씨(稷山 趙氏) 시조 조성(趙成)은 백제 개국공신으로 전한다. 2000년 인구는 3,387명이다.
풍양 조씨(豊壤 趙氏) 시조 조맹(趙孟)은 고려 개국공신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로 풍양현(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천마산 동굴에 은둔하여 농사를 짓던 사람이라고 한다. 시조 이후 세계를 고증할 수 없어 조지린(趙之藺), 조신혁(趙臣赫), 조보(趙寶)를 각각 1세조로 하는 3계파가 있다.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이다. 2000년 인구는 113,798명이다.
횡성 조씨(橫城 趙氏) 시조 조익(趙翌)은 평장사(平章事) 조첨(趙瞻)의 아들로 965년(광종 9) 고려에서 처음 실시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고, 광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후손인 조영인(趙永仁)이 1201년 문하시중에 올랐다.[3]2000년 인구는 5,337명이다.
배천 조씨(白川 趙氏) 시조 조지린(趙之遴)이 고려 목종(穆宗) 때 이부시랑 지은대사(吏部侍郞 知銀臺事)로 임명되었고, 1011년(현종 2년)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렀다.[4] 2015년 인구는 75,978명이다.
순창 조씨(淳昌 趙氏) 시조 조자장(趙子長)은 고려 때 순창호장(淳昌戶長)을 지냈다. 그의 5세손인 조인평(趙仁平)이 1177년(명종 7)에 망이·망소이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금오위낭장(金吾衛郎將),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2000년 인구는 17,923명이다.
함안 조씨(咸安 趙氏) 시조 조정(趙鼎)은 고려 대장군 원윤(元尹)이다. 2015년 인구는 282,890명이다.
임천 조씨(林川 趙氏)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본명은 조수강(趙守康)이고 송 태조 조광윤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 한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 조광의(趙匡義)가 황위를 찬탈한 이후 고려로 도망쳐 와서 임천(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2000년 인구는 11,040명이다.
평양 조씨(平壤 趙氏)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예종 때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남송에 가서 금나라를 토평하였다. 2000년 인구는 41,047명이다.
옥천 조씨(玉川 趙氏) 시조 조장(趙璋)은 고려시대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옥천(玉川)은 전라북도 순창군(順昌)의 마한시대 지명이다. 2000년 인구는 49,847명이다.
양주 조씨(楊州 趙氏)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후기에 호장(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되었다. 2000년 인구는 23,942명이다.
김제 조씨(金堤 趙氏) 시조 조연벽(趙連壁)은 고려 고종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조연벽(趙連壁)은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蒙古)의 살리타이가 침략했을 때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부장(副將) 김윤후(金允侯)와 함께 처인성(處仁城: 현 경기도 용인)에서 몽고군을 소탕한 공(功)으로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벽성(碧城 : 김제의 옛 이름) 군(君)에 봉해지고 좌정승(左政丞)에 추증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연벽(連璧)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김제(金堤)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양 조씨(漢陽 趙氏)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德源府) 용진현(龍津縣 : 현 함경남도 문천시, 원산시 일대)에 세거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고려 조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의 독자 조휘(趙暉)의 후손들이 쌍성총관부의 총관을 계승했다. 고려 왕족이라는 설도 있다.[5][6] 후손들이 조선이 개국하자 한양(漢陽)으로 이거하여 한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2000년 인구는 307,746명이다.
영흥 조씨(永興 趙氏)는 함경남도 영흥군에 세거하던 가문으로 조인재(趙麟才)의 증손 조영무(趙英茂)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조영무의 아들 조서(趙叙)는 1399년(정종 1)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봉상시박사(奉常寺博士)가 되었다. 그 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사간원예의(司諫院禮議)·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7]
신창 조씨(新昌 趙氏) 시조 조영규(趙英珪)는 조선 개국공신이다. 이방원을 도와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위키백과 참고===
조(趙)씨는 총 68개의 本貫에 인구는 2000년 기준 984,913명입니다. 조씨의 본관별 종류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명)-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를 지냈다. 그 후 후손들이 조선 개국 때 한성(현재의 서울)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한다. 많은 인물을 배출하면서 본관을 한양으로 삼았다.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명)- 시조 조정(趙鼎)은 중국 후당(後唐) 사람으로 고려통일에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 대장군에 올랐다. 그래서 후손들이 함안에 살면서 본관을 함안으로 했다. 함안(咸安)은 경상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옛 함안군과 칠원현이 합하여 이루어진 지역이다.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명)- 시조 조맹(趙孟)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이다. 그는 풍양현(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았던 도인이었다. 왕건이 그를 찾았을 당시 나이가 70세였다. 이때부터 신라 정벌의 길에 나섰다. 그 뒤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렸다. 풍양(豊壤)은 경기도 양주(楊州)의 옛 지명이다.
▲배천조씨(白川趙氏.66,155명)- 시조 조지린(趙之린)은 송나라 태조(조광윤)의 맏아들인 조덕소(위왕)의 셋째 아들이다. 979년(고려 경종 4년)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황해도 배천(白川.땅이름은 백천이 아닌 배천으로 발음한다)군 도태리에 정착했다. 그의 아들 조양유(趙良裕)는 고려 덕종과 정종 때 벼슬을 지낸 후 백천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배천으로 했다. 배천(白川)은 황해도 남동부에 위치한 연백군(延白郡)의 옛 지명이다.
▲옥천조씨(玉川趙氏, 순창.49,847명)- 시조 조장(趙璋)은 고려 중엽에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의 증손 조원길(趙元吉)이 공양왕 때 일등공신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옥천(순창의 옛 이름)을 본관으로 했다. 집성촌은 전남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를 비롯하여 13개 리에 걸쳐있다. 이 중에서도 주암면 주암리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곡성군 삼기면 양촌리,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곡성군 곡성면 동산리 등도 집성촌이다. 옥천(玉川)은 순창의 다른 이름이다.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명)-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예종과 의종 때의 인물이다. 그는 고려 때 남송에 가서 금나라를 토평한 공으로 송나라 상장군이 되었다. 그의 5세손 조인규(趙仁規)의 딸이 충숙왕의 왕비가 된 후 평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이 때 충렬왕의 명에 따라 본관을 상원(詳原)에서 평양으로 바꾸었다.
▲양주조씨(楊州趙氏. 23,942명)-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때 호장,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35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집성촌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묵안리, 전북 김제군 청하면 관상리 등이다. 양주(楊州)는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순창조씨(淳昌趙氏, 17,923명)- 시조 조자장(趙子張)은 고려시대에 호장(戶長)을 지냈다. 본관을 순창으로 한 것은 고려 때 대장군에 오른 조인평(趙仁平)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인평(趙仁平)은 고려 명종 7년 계룡산의 토적을 토평하고 벼슬에 올라 금오위 랑장(金吾衛 郞將)에 오르고 대장군이 되었다.
▲김제조씨(金堤趙氏 50,000명 추산)- 시조 조연벽(趙連壁)은 고려 고종 때 상장군을 지냈다.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의 살리타이가 침략했을 때 몽고군을 소탕한 공으로 벽성(김제의 옛 이름)군(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김제로 삼았다. 조선시대에 23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임천조씨(林川趙氏.11,040명)-시조 조천혁(趙天赫)은 송나라 태조 조광유의 손자인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송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979년 위왕(魏王)이 화를 당하자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천혁(天赫)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천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 후 고려 현종 때 강감찬과 함께 거란군을 대파하여 가림백(가림은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임천으로 했다. 집성촌은 충남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 충남 예산군 삽교읍 수촌리,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충남 논산군 양촌면 석서리, 충남 대덕군 기성면, 충남 서산군 음암면 탑곡리, 충북 중원군 이류면 문조리, 충북 중원군 동량면 대전리, 충북 괴산군 소수면,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 전북 익산군 함라면 함열리, 전북 임실군 관촌면 등이다. 임천(林川)은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 가림군(加林郡)이었다. 1914년 부여군에 통합되었다.
한국의 장례 문화
옛날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렀고 장례가 끝나면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나 그 근처에 묻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옆에 작은 집(움막)을 지어(만들어) 그 안에서 3년 동안 사는 사람도 있었다. 3년이 지나야 장례가 완전히(모두)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례 기간 동안 입고 있던 장례복(상복)을 벗었다.
요즘은 병원의 장례식장이나 전문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른다. 장례가 완전히(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 기간도 달라졌다. 아주 많이 짧아졌다. 예전에는(옛날에는) 집집마다 장례를 치르는 방법이 거의 비슷했지만 요즘은 종교에 따라 다르다. 어떤 종교인지에 따라 장례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예전에는(옛날에는) 땅에 묻었지만 요즘에는 땅에 묻는 대신 다른 방법을 하기도 한다. 땅에 묻을 경우에도 공동묘지를 이용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땅에 묻지 않을 경우에는 시신(죽은 사람의 몸)을 불에 태우는 '화장'을 하기도 한다.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성인(어른) 남녀 천 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죽으면 화장을 하겠다는 사람이 80%가 넘었다. 그리고 실제로 10명 중 6명 정도는 화장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1998년 화장률이 27,5%였던 것에 비하면 십년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또 최근 수목장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수목장은 화장한 후 나무 밑에 묻는 것을 말한다. 자연과 하나가 되고 환경도 생각한다는 점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매년 여의도 면적만큼의 묘지가 새로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산에 있는 묘지는 2000만기를 넘어섰다고 하는데, 땅은 한정되있고 묘지는 계속해서 늘어나 더이상 묘지를 쓸 땅도 어렵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묘지는 개인묘지가 69% 집단묘지는 31% 으로 개인묘지의 70%이상이 불법묘지라고 한다.
국민 1인당 평균 주거 공간은 4.3평인데 묘지 면적은 평균 15평에 달해 주거공간보다 3~4배나 크다고 한다.
대부분의 묘지는 산에 조성되기 때문에 산림 훼손, 자연생태계 파괴, 환경파괴의 원인을 제공한다.
앞으로 수도권은 3년, 전국적으로 10년내에 묘지 공급한계가 예상이 되어 사후에도 시신을 안치할곳이 없기때문에 봉안제도가 도입되고 확산이 되는 추세이다.
시묘살이
부모상을 당했을 경우, 묘지 옆에 초막이나 여막을 짓고 3년(만2년)을 생활하며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모시는 생활을 ‘시묘살이’라고 한다. 여러 예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중국 공자의 제자들에게서 유래된 풍습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에서 성행했던 풍습이다.
옛날에는 부모상을 당할 경우 묘지에 초막을 지어 3년간 거처하며,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 점심· 저녁으로 상식을 올리고, 밤이 되면 침상을 마련하는 것이 예의 기본이었다. 이것을 시묘살이라 한다.
시묘살이는 유학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유학은 효를 중시했기에 유학자는 지극정성으로 돌아가신 부모를 3년 동안 모셨다. 그 때문에 시묘살이 중에 심각하게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시묘살이는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인 『가례家禮』 등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시묘살이가 사대부가에 유행한 것은 중국에서 공자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서 했던 일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묘살이는 의례의 실천이 아닌 유교적인 전통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묘살이는 어떤 의례서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시묘살이가 예서에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가례』에 규정되어 있는 상례의 일정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장례가 끝나면 망자의 혼백은 집으로 모셔 와서 신주를 사당에 모셔야 한다. 그런데 시묘살이를 하게 되면 혼백을 집으로 모셔오는 ‘반혼(返魂)’이 삼년 이상 미뤄지게 된다. 따라서 예학자는 시묘살이를 명쾌하게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시묘살이에 대한 기록은 퇴계 이황(李滉)이 『사례편람』의 인용문에서 “지금 여묘의 풍속은 성하고 반혼하는 예는 없어졌으니 한탄스럽다. 다만, 말세에 예법이 무너져 집으로 부모의 혼백을 모셔와 근신하지 못 하는 일이 많이 생긴다면, 여묘를 행하여 혼잡을 피하는 것보다 못하게 된다.”고 한 것과, 율곡 이이(李珥)가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장례 후에 반혼하는 일이 많은데, 이는 정말 바른 예이다. 다만, 세속 사람들이 잘못 본떠 여묘하는 풍속을 폐하되, 반혼 후에는 각기 제집으로 돌아와 처자와 한데 거처하면서 예법을 크게 무너뜨리니 심히 한심하다. 무릇 어버이상을 당한 이는 스스로 헤아려보아 일일이 예를 따라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예에 따라 반혼하고, 혹시라도 그렇지 못하면 옛 풍속에 따라 여묘살이를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한 것이 전부이다. 이 내용에 의하면, 이황과 이이는 원칙적으로 반혼을 바른 예라고 규정하면서도, 만약에 반혼의 효를 다하지 못할 바에야 시묘살이를 해도 된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시묘살이 풍속을 현실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외에 사대부의 일기에서 시묘살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경상북도 안동에 살았던 이정회(李庭檜)와 서울 서소문에 살았던 이문건(李文楗)의 일기가 그것이다. 이정회는 1578년 5월 1일에 모친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만 2년 동안 했다. 그는 장사 후에 여막에 거주하면서 초하루와 보름에는 꼭 삭망제(朔望祭)를 지냈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틈틈이 농사일도 돌봤다. 추수가 끝난 겨울에는 열심히 묘역에 상석(床石)이나 표석(標石)을 조성하는 일을 했다. 이문건은 1535년 1월 5일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그의 집은 서울 서소문이었지만 양주 인근에 모친을 모셨다. 이문건도 상중에는 열심히 묘역을 돌보면서, 사회활동과 경제활동도 함께 했다. 그는 평상시 하던 전답 관리와 소속된 노비 관할 등을 계속했다. 일상생활의 하나인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도 빼놓지 않았다. 시묘살이 중 이문건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상중 내내 감기 기침에 시달렸다. 그래서 간혹 아침과 저녁에 하는 조석곡(朝夕哭)을 생략했다. 그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인삼이나 약을 복용하였고, 간혹 술을 마셨다. 상중에 금기시되는 술을 마신 것은 약해진 체력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예기禮記』의 「상대기喪大記」에도 거상 중에 병이 있으면 술을 마시거나 고기도 먹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상중에는 철저하게 소식(素食)하였다. 상중에는 관직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먼 길을 떠나는 것 역시 못했을 정도로 제약이 많았다. 반면 이러한 제약으로 학문에 몰두하여 상 중에 저술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묘살이는 살아계실 때와 동일하게 묘 옆에 움막을 지어 생활하며 부모가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못다한 효도를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시묘살이는 『국조오례의』나 『가례』등의 예서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사대부의 생활 속에 자리 잡혀있던 전통적인 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선양(宣陽)리에는 시묘곡이라는 고개가 있다. 시묘곡은 풀이하면 ‘시묘살이했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현재 이곳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인공호가 들어서 ‘시묘살이골’이란 이름만이 전해지고 있다.
시묘살이를 한 이유
예전에는 삼 년간 시묘살이했다. 그것은 아이가 태어나면 삼 년간 부모가 돌봐주기 때문이다.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삼 년간 시묘살이했던 것이다. 부모의 은공을 갚기 위해, 효심으로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다.
경기도 파주 지역에서 상장례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2005년 이기형이 엮어 민속원에서 펴낸 『한국구전설화집 2』에 수록되어 있으며, 2004년 1월 14일 이기형이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 1리 441-18에서 김기철(남, 79세)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예전에는 시묘살이라는 것을 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건품만 했다. 건품은 가묘를 해 묻어두었다가 삼 년이 지난 후에 원 자리에 갖다 모시는 것을 말한다. 이제 삼 년 간에는 여막을 짓고 거기서 머리도 안 빗고 지냈다. 그전에는 다 머리를 빗고 상투를 틀 때였다. 빨래도 안 해 입었다.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하고 여막에서 삼 년을 지내야 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효를 행하며 부모를 모셨다.
이렇게 삼 년을 졸곡하고, 장사를 지내고 그런 다음에 산지(묘지)를 잡으러 갔다. 지금은 부모가 죽으면 바료 묘지를 잡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성을 드린 다음에 묘지를 잡았던 것이다.
선산이 있으면 선산에 묘를 쓰는데, 먼저 선산 산에 올라가서 산신제를 잘 지내야 했다. 묘를 쓰기 전에 산신제를 지내는 것은 산의 임자가 바로 산신이기 때문이다. 산신께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면 묫자리를 내주게 되어 있다. 아무리 명당이라도 또 명당을 잘 잡는 지관도 산신이 묫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못 보는 법이다. 산신께 정성껏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눈을 가려서 명당자리가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시묘살이를 삼 년 동안 했다. 옛날에는 탁아소 같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젖을 삼 년 동안 먹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었다. 아이는 세 살이 되어야 이가 나와서 이밥을 먹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 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이유는 내가 태어나서 세 살까지 날 먹어주고 입혀주며 돌봐줬기 때문이다. 부모의 은공을 갚기 위해, 효심으로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다.
「시묘살이를 하는 이유」는 전통 장례에서 삼 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이유를 설명한 이야기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삼 년 동안 부모가 돌봐줘야 살 수 있다. 이런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시묘살이는 생전에 못다 한 효도를 지속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시묘살이는 『가례家禮』를 비롯한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정몽주는 부모님 돌아가시자, 각각 삼년간의 시묘살이를 한다. 이후 시묘살이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널리 유행하게 된다. 시묘살이는 의례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사대부가의 삶 속에 자리 잡은 전통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지청(상청)설치와 삼년상
전통사회 온가족이 모여살던 시절 조동화는 중학1학년때 1964년 할머니가 58세에 돌아가시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청마루 한쪽에 광목으로 칸을 막아 지청을 설치하여 영정사진을 비치하고, 아침 저녁으로 상을 차려 올리었다.
지청을 다른말로 상청(喪廳)이라고도 하는데 어른들이 지청이라고 하였다.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음식을 장만하여 큰상을 차리여 올리었다.
저녁이 되면 귀신이 나올까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지청은 설치하고 1년만에 철거한 것 같다.
전통사회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어 조상숭배 사상이 강했다.
유교식 전통 상례의 핵심은 삼년상이라 할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조상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렀다.
삼년상은 인간이 태어나서 3년이 되어야만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즉 삼년상에는 적어도 3년이 될 때까지는, 살아있는 부모를 모시듯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야 한다는 효사상이 담겨 있다.
부모는 자기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비록 상복을 벗더라도 상중인 것처럼 행동을 삼가고 마음속으로나마 상기를 치르는 것처럼 행동하였던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삼년상의 본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삼년상에 들어 있는 의미를 안다면 결코 부모에게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삼년상은 거의 시행되지 않는다. 사십구재나 100일 탈상을 하고, 일년상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는 부모의 시신을 매장한 다음날 3일 탈상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 아예 탈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도 허다하다.
심신의 건강과 엔돌핀의 작용
사람의 뇌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남에게 진실로 친절하게 언행하거나,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도와주거나 하면 뇌속에
엔돌핀이 라는 물질이 흘러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여주고,
몸 전체를 치료해준다,
엔돌핀은 우리가 아플때 먹는 약보다도 몇 배나 강한
작용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않는 병을 이겨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게되면 ,아드레날린 이라는 물질이 분산되어 ,나쁜일을 하고있는
뇌를 공격한다.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수 없다.
남을 괴롭힘과 아드레날린
사람은 화를 내거나,남을 못살게 굴거나,괴롭히면
뇌에서 아드레날린 이라는 물질이 분비된다.
이물질은 호르몬의 일종인데,어떤 이유에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독한 독을 가지고 있다한다.
자연계에 있는 독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하는 뱀의 독의
다음 가는 독이라고 한다.
물론 뇌에서 분비되는 이 독의 양은 소량이지만,
늘 화내거나,악 쓰거나, 남을 못살게 괴롭히거나 하면,
그때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이독으로 인하여 병에 걸리거나
노화가 빨라지거나 조사(빨리죽음)해 버리거나 한다..
심할 때는 위에 구멍이 뚫어지기도 한다.
이글을 읽고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건강하게 살자는 마음에서 옮겨 실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감사하며 내일을 멋지게 살아가보게요.
친우님들 사랑합니다.
사랑과 엔돌핀(Endorphin)
사람의 뇌 속에는 여러가지 뇌파가 나오는데 깨어있는 낮 동안에는 우리몸에 해로운 베타파가 나옵니다.
이것은 100%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뇌파입니다.
그래서 오감으로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듣고, 본다고 할지라도 남는 것은 점점 스트레스와 피로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밤에 잠을 자는 동안에는 알파파가 나옵니다.
그러면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것은 모든 병을 다 고치는 기적의 호르몬입니다.
이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은 피로도 회복하고 병균도 물리치고 암 세포도 이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잠을 푹 자고나면 저절로 병이 낫기도 하고기분도 좋아지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것은 오감이 차단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듣지도 않고 생각도 안하는데도리어 편안하고 더 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어 있을 때에도 알파파가 나올 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할 때라고 합니다.
사랑할 때 마음이 흐뭇하고 기분이 좋은 것은 뇌속에서 알파파가 나오면서 동시에 엔돌핀이 분비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면 병도 빨리 낫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움직이면 피로한 것도 모르고 손해나는 것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깨어서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하는 일인 것입니다
엔돌핀의 효과
1. 면역체계를 활성화시킨다.
2. 노화된 혈관 벽의 변화를 제거한다.
3. 산성화 과정을 없앰으로써 노화를 방지한다.
4. 통증 완화의 기능을 지닌다.
5. 기억력을 향상시킨다.
코로나19로 일상의 변화와 디지털세상
코로나19 예측이 불가능한시대로 접어들었다.
2019.11 중국에서 처음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몇 년간 지속될지 알수가 없다.
코로나19로 2년여 비대면사회가 지속되면서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구나.
장례식장의 문상이나 결혼식장의 풍속도 많이 달라져 직접 가지 않고 은행구좌로 성의를 표하는 세태로 변하고 있구나.
물건구입하는 것도 비대면으로 인터냇을 이용하여 구입하는 시대로 변하고 있는중이다.
사회전반에 디지털사회로 변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새롭게 가져온 일상의 변화는 무엇일까.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재택근무, 원격강의, 온라인예배, 온라인채용 온라인쇼핑등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혁명시대가 착착 가속화 되고 있는중이다.
다중 밀집산업 사양화
배달음식 확산
유통산업 : 오프라인 ⇒ 온라인으로 변화
세상의 변화는 아나로그시대로 돌아갈수 없고
스마트폰 인터냇 디지털세상에 어울려 즐겁고 행복한 세상 살아가자.
솔직히 말해서 조동화는 스마트폰세상의 일원이 되어 편리함을 만끽하고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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