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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李仁星:1912~1950)
글쓴이 홍순목
지금도 길거리로 가다가 손수레에서 팔고 있는 넓적한 「센베이」과자를 보면 어릴 때 맛있게 먹었던 그 고소한 맛과 함께 이인성(이인성)이 떠오른다.(※ 센베이: 전병과자의 일본말)
솔직히, 그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대표할 정도의 천재화가라는 것을 이번에 대구에서 「이인성 미술상」을 제정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나와 이인성의 만남은 초등학교 시절 시작되었다. 그가 나의 고모부인 김재명(金在明 : 남산병원장)의 맏사위로 장가오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큰 자형」이라 부르며 아틀리에에 자주 드나들었다. 집에서 30여m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 탓도 있었지만 병원 3층「양실(洋室)」이라 부르던 그의 아틀리에 에는 과자와 과일 등 먹을거리가 항상 많이 있었고, 특히 「센베이」의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은 하교와 함께 내 발길을 화실로 향하게 하였다.
과자를 먹는 즐거움에 그가 부탁하는 심부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세의 모델도 기쁜 마음으로 여러번 서주었다.
남산병원 건물은 원래는 2층이었는데 이인성이 결혼한 후, 3층으로 증축하여 화실을 만들었다. 3층 화실은 그가 설계에서 공사 감독까지 직접 하여 완성할 만큼 심혈을 기울었다. 그 당시 대구에서는 이런 현대식 아틀리에는 처음이었다. 어린 나의 눈으로 보기엔 묘하게 생긴 넓은 방이었는데 넓이는 60평쯤 됐으며 서남쪽은 막혀있고 북동쪽에만 창문이 있었다. 북쪽 창문은 긴 입체삼각형의 3개 백색 문틀에 유리창이었고, 동쪽은 벽 전면이 2m정도 높이의 평유리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천정은 백색 사각형 모자이크로 장식된 중앙에 산데리아가 갈려있었고, 동쪽창문 외부에는 10평 정도의 배란다가 있었다. 북쪽문 상부 벽에 수많은 포도송이 밑에 육감적인 여인이 누워있는 나체조각이 있었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그 누드 벽장식을 부끄러워 쳐다보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인성은 작은 체구의 단신이었는데 흰 얼굴에 콧날은 오뚝하고 눈은 가느다랬으며 상대를 바라볼 때는 싸늘하게 뚫어지게 보았으며 무거운 음색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에게는 매우 다정했으며 먹을 것도 잘 주었고 가끔은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특히 자신이 직접 만든 의자에 앉아 가느다란 카본으로 데생을 하던 진지한 모습이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림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자세가 어제일 같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이인성의 생애는 한편의 소설과도 같았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첫 결혼 후의 화려하고 행복했던 시간들, 그러나 어이없는 갑작스런 아내와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이 드라마틱한 인생 살이었다. 내가 그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던 1936년부터 1942년까지의 첫 결혼시절을 회상하며 기억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이인성은 월성이씨(月城李氏)로서 아버지 이해영(李海榮)과 어머니 이금옥(李今玉)의 차남으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태평로 3가에서 식당을 하였고, 아버지는 혁필색체화가(革筆色彩畵家, 필자의 아버지 증언)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인성은 아버지로부터 혁필색채 그림배우기를 강요당해 그 때마다 몰래 집을 빠져나와 거리를 헤매다 밤늦게 집에 들어가곤 했다. 미술에 소질이 띠어났던 이인성은 수창보통학교 3학년 때, 담임인 이영희(李永熙)선생의 보살핌으로 동경세계아동미술대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하면서 주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수창학교 졸업 후(13회,1922)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서동진이 운영하던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일을 하는 한편 서동진으로부터 수채화를 지도 받을 수 있었다. 이 때 고미술품 애호가인 경북고녀 시라가미 슈기찌(白神壽吉)의 추천으로 일본 King(王樣)크레온회사에 취직이 되어 도일하게 되었다.(1931)
낮에는 회사에 나가고 밤에는 동경 태평양 미술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일본 수채화계의 거장인 이시이 하구데이(石井相亭)의 지도를 받고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경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기위해 유학 온 김옥순(金玉順, 김재명의 맏딸)을 만나 교제가 시작되었고, 1935년 귀국하여 그해 5월 7일 결혼식을 올리며 새로운 인생의 화려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인성이 일생을 통해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결혼 후 안정된 생활 속에서 그렸던 「경주의 산골에서」와 「가을의 어느 날」이 이인성의 최고 걸작이라고 미술계에서는 평하고 있다. 이인성의 화가적인 형성은 선전적인 소질과 후천적인 교육은 주로 동경화단 주변에서 공부한 영향이었다.
그는 청정(靑汀), 아소(我笑)의 호를 사용하였는데 그의 사인(sign)은 일정한 형식이 없었고 이름도 국․한․영(國漢英)을 섞어서 마음 가는 데로 사용했다. 「청정」의 號는 별로 사용한 것 같지 않고「아소」의 호는 동양화의 수묵담채화(수묵채색)에만 낙관으로 사용 (1938~1943)한 것 같다.
반골정신과 자존심이 강한 그의 성격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으며 매우 직선적이었지만 행동은 선천적인 현실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림 외에도 다양한 소질이 있어 기타도 잘 쳤으며 고급전축을 틀어 놓고 음악에 심취했었다.
특히 이인성과 나와는 계절에 따라 특이한 기억과 사연이 있다.
겨울에도 당시 겨울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눈만 오면 이인성은 병원 안마당에 눈으로 대형동물(기형)을 만들어 놓고 그 등위에 나를 올라타게 하고는 사진도 찍고 스케치를 하면서 즐거워했지만 그동안 내 엉덩이는 벌겋게 얼어 버려 애를 먹은 기억이 새롭다. 현재 앞산의 미군사택과 골프장자리는 1930년경에는 사격장, 스키장, 간단한 골프장이 있었는데 눈만 오면 이인성은 그 곳으로 스키를 타러 다니는 등 당시 대구 최고 멋쟁이였다.
봄이면 지금의 수성교 주변(현 코오롱아파트 지역)은 만발한 분홍색 복숭아꽃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복숭아꽃이 필 때면 이인성은 나를 데리고 지금의 수성교 부근으로 데려가 맑게 흐르는 대구수성천 중간에 홀랑 벗겨 세워놓고는 그 분홍색 지대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따가운 봄 햇볕 아래 물속에 서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과자 먹는 재미로 참아냈고 이런 사실을 안 필자의 어머니는 이인성을 따라 다니지 못 하게 했다. 수성교 부근뿐만 아니라 멀리 갈 때는 형들과 함께 가창골, 수성들에까지 자주 스케치 여행을 다니곤 했다.
여름이면 이인성은 피서를 겸해 앞산을 비롯해 금호강 등 대구근교를 자주 찾았다. 돌이켜보면 이인성만큼 향토를 아끼고 사랑했던 화가도 없을 것이다.
그림의 소재 배경 등이 거의 대구의 거리와 건물이고 향토색 짙은 대구의 교외나 야산지대, 그리고 그 곳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경주, 감포, 해인사, 은해사, 등 형들과 함께 멀리 나들이 할 때도 있었지만 이인성은 앞산 앞 부근과 금호강변을 특히 좋아했다.
그 당시 남산동에서 대명동 성모당 옆으로 가다보면 새못(삼각로타리)이 있었고 그 주위는 온통 감나무 밭이었다. 그곳을 지나면 아리랑고개 형태의 안동고개가 있었는데 이곳은 유난히도 붉은 빛이 도는 황토 찰흙지대였다. 안동 고개에 올라가면 기와 만드는 곳 두 군데가 있는데 그 황토 흙을 무척 좋아하던 이인성은 기와공장 움막 옆에 앉아 황토지대를 한 없이 응시하곤 했으며, 안지랑이 계곡을 갈 때면 항상 이곳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스케치하였다.
대덕골 공원에는 꿀밤나무(도토리)숲이 울창했는데 여름방학이면 그 숲에서 보이 스카우트 흉내를 내며 캠프생활을 즐기면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우리는 식사준비, 물심부름 등 잔일을 도와주며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이인성과 함께 기차를 타고 반야월역 뒤 금호강까지 놀러가 낚시로 은어를 잡아 돌에 말려서 구워 먹던 그 맛은 세월이 흘렀어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가을에는 주로 앞산 아래를 자주 다녔다. 앞산에 갈 때는 꼭 안동고개를 넘었으며 항상 고개 마루에서는 쉬어가며 주변을 응시하며 사색에 잠기는 습관이 있었다. (※ 안동고개: 현 영남공업대하 정문 언덕길)
이인성이 3층 아틀리에 베란다에서 바라보면 남쪽과 북쪽 멀리에 성당(남산성당 당시 통칭 웃성당, 계산성당)이 보였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만든 묘하게 생긴 의자에 앉아 그림 그리기를 즐겨했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인성은 특히 고가구, 고서화, 백자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난초병풍을 동경까지 보내어 일본인이 갖고 있던 이화 꽃문양이 있는 기물(器物, 침상)등을 장인 돈으로 매입하였는데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
1937년 자신의 3층 화실에 「이인성양화연구소」를 개설한 이인성은 인물, 정물, 풍경, 석고모형, 데생, 등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오전, 오후, 야간, 일요특설반으로 나누어 지도하는 등 후진양성을 위해 열정을 쏟았다. 미술지도와 함께 봄․가을로는 회우자품경연회를 개최 우수한 작품을 시상하는 등 야심찬 계획을 갖고 대구지역미술애호가와 학생들을지도하렸다. 이때 이인성은 친구화실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받은 돈으로 회화재료를 동경에 가서 직접 구입해 제공하는 등 현대 미술 보급에 앞장섰다. 양화 연구소를 개설 운영하는 한편 남정(南町, 아카데미골목, 사일동)에 일시 대형 가옥을 매입, 도로 쪽을 개설하여 남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다방 「아루스(ARS)」를 개업했다.
다방 아루스는 보통 다방과는 달라 예술인들이 모여 함께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는 곳으로 2층은 소전시실로 개방하였다. 당시 차 한 잔 값이 5전이었는데 1일 총 매상이 1원 50전에서 2원 정도였다고 아루스를 출입하던 노 예술인들은 회상한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는 미술을 포함한 예술 활동의 표현을 억압하였고 이때 이인성은 와부와는 거의 단절하다시피 한 채 집주위에서만 맴돌았다고 한다. 작품 활동은 지극히 사적인 생활을 담은 그림이나 향토적인 소재를 사실적 기법으로 많이 그렸다.
1943년 부인 김옥순과 사별 후 인생무상을 느낀 이인성은 청탁을 가리지 않고 두주불사의 생활을 수년 이어갔으며 이때 많은 기행(奇行)으로 지금까지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무렵에 수묵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때 사용한 號가「我笑」였다. 갑자기 변한 생활 탓인지 그의 화제(畵題)는 주로 일장춘몽, 미인박명 등이었으며 그림 속 한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은 유별나게 키가 크게 그렸다. 아마도 자신보다 4~5cm나 키가 컸던 김옥순에 대한 그리움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일 거라는 짐작이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역량 있는 작가를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이인성을 논할 수는 없지만 20여년 화가생활을 하면서 선전(鮮展)에 출품한 작품만도 35점이나 되었고, 조선미전 10회 때부터 15회가지 계속 특선하였을 뿐 아니라 以堂 김은호와 함께 추천작가로 추대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뛰어난 화가였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된다. 오늘날 이인성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간에 그가 화단에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고 강조하는 미술평론가 오광수씨의 글을 요약해 본다.
대체로 이인성의 예술이 그 정점에 와 있던 1930년 중반은 서양화 세대의 제2기가 진행될 무렵에 해당된다. 1910년대와 1920년대를 통한 도입가와 점차 정착기로 이행되던 유화의 기술적과정이 어느 괘도에 진입되고 있을 시기이기도하다.
이 시대 이인성이 등장한 것은 그의 예술의 의미를 서양화의 정착과 그에 따른 기술적 경지의 도달과 결부시키게 하는 점이기도하다.
한 시대의 미술은 몇 사람의 천재에 의해 이루되어간다는 H.리드의 일견에 따르지 않더라도 1930년대라는 우리의 근대 미술과정에서 의한 순간은 이인성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확실히 이인성은 혜성처럼 등단해서양화 정착에 얼마나 많은 영양을 남겼는가하는 것은 1950년대까지 지속된 많은 그의 모방자와 아류를 통해 충분히 살펴 볼 수 있다.
연보
1912 대구시 북성로에서 출생
1928 개벽사 주최 세계아동미술전람회 수채화 특성
1929 제8회 鮮展 수채화 입선
1930 향토회 창립전 출품
1931 渡日 東京太平洋 미술학교 입학
1932 제11회 鮮展특성
1935 제14회 鮮展 창덕궁상 수상
1937 제16회 鮮展 추천작가
1938 제17회 鮮展 심사위원
1940 鮮展추천작가 3인전 출품
1945 이화여자대학 강사
1948 서울 동화화랑에서 개인적 개최
1949 회화연구소 개설
1949 1회 國展 서양화부 심사위원
1950 11월 4일 作故
1929 “그늘" (수채) 제8회 조선 미술전람회 출품
1930 “풍경” (수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30 “가을의 어느 날”(수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31 “어느 날의 오후”(수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31 “풍경”(수채)개인소장
1932 “파란지붕이 보이는 풍경”, “어느날의 숲”(수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32 “여름 어느 날”(수채) 제13회 제국미술전람회 출품
1933 “초겨울의 정원”(수채) 제14회 제국미술전람회 출품
1933 “제로섬의 여름”(수채) 제12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34 “뒷뜰의 일우”(수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35 “고목이 있는 교외”(수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36 “秋日小景”(수채) 제1화 토용회출품
1938 “춤”(유채)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39 “뒷마당”(유채)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40 “녹량”(유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40 “풍경”(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1940초 “어촌”(유채) 개인 소장
“풍경”(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1940후 “빨간 옷을 입은 소녀”(유채) 호암미술관
1940 “어린이”(유채) 게인
1942 “사과나무”(유채) 국립현대미술관
1943 “호미를 가지고”(유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1946 “정물”(수채) 개인
1947 “장미”(수채) 개인
1947 “장미”(수채)개인
1947 “들국화”(유채) 개인
1950 “모자 쓴 자화상”(유채) 개인
참고문헌
근대화단의 귀재 이인성(삼성미술관)
이인성의 회화연구(신수경,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글쓴이 홍순목( 이인성의 부인의 외사촌 동생). 중악지10호 “대구인물사 특집”에 게재된 것-옮김 최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