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에게
내 추억의 빛바랜 앨범의 한 페이지에는 응어리 같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의 사진이 꽂혀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친구라고 부릅니다. 친구라는 언어는 나에게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와 같은 언어입니다. 내 친구들이 들으면 섭섭해 하겠지만 내 평생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그 친구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내가 만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실은 그 친구는 내 고등학교 1년 선배였는데 몸이 아파 1년 휴학을 하고 복학을 하여 나와 한 반이 되었고, 그는 1년 선배라는 티를 내지 않고 나를 친구로 받아 주었고 우리는 서로 속이 잘 맞아 곧 단짝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그 친구는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유복한 환경 속에 성장하였고 품성 또한 바르고 정이 많고 감성도 풍부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부모님께서는 정읍에서 사셨고 그 친구는 시집간 서울 삼양동 누님 집에서 바로 아래 남동생과 살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나는 가끔 그 친구와 어울려 그 친구가 살던 누님 집에 들렀던 기억이 납니다.
방학이 되면 그 친구와 나는 그의 부모님이 사시는 정읍집에 내려가 함께 지내곤 했습니다. 그 친구는 서울에 사는 시집간 누님과 바로 아래 남동생 외에 당시 고향집에는 그 아래 두 여동생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위 여동생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 아래는 초등학교에 다녔던 것 같습니다. 위 여동생은 나에게는 이성인지라 호기심도 있어 말을 건네보고 싶었지만 워낙 새침뜨기라 말을 건네기 조차 어려웠고 나 또한 그런 용기가 없어 당시에는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가 좀처럼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불우한 환경 속에 학교를 다녔던 나는 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학생이었고 결석도 빈번히 하였던 그야말로 학교에 불충실했던 문제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나는 금천구 시흥동 산동네 판잣집 촌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지냈는데 밥 굶기를 밥 먹듯 시피 하여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아침에 잠이 깨어 일어나려해도 의식은 있어도 일어날 수 있기는 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일 수 없을 때가 빈번하였고 눈만 깜박거리며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다 오후 한 두 시에나 간신히 일어나,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빈둥거리다 다시 잠자리에 들곤했기 때문에 결석을 밥 먹듯 했던 것입니다. 그 친구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그에게도 나의 불우한 처지와 모든 것을 털어 놓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다 나는 자취방을 인천으로 옮기고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천은 나의 고향이고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을 하였기 때문에 인천에 내려가면 친지나 친구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밥한 끼라도 더 챙겨 먹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는 내가 인천으로 자취방을 옮기자 멀리 인천에 있는 내 자취방까지 찾아와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인천에서의 삶도 그리 녹녹치 않아 이렇게 구차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몇 번이나 자살 충동에 빠져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졌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하였고 그날부터 무작정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밤에 그 친구가 인천 자취방으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지금 같으면 인천은 서울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인천은 그리 가까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그에게 나는 묵묵부답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의 마음은 얼어붙어 그 누구에게도 나의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나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며 나를 끌어안았습니다. 그의 진정한 따뜻한 우정은 나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버렸고 나는 그 다음날부터 다시 학교를 다니게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그와 나는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을 하였어도 서로의 만남은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신장염을 앓고 있어 자주 병원에 입원을 하였는데 문병을 간 나와 몰래 병원을 탈출하여 술집에 가 막걸리를 먹던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철없는 짓이었고 그로 인하여 그의 지병이 더 악화되지 않았던가 하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던 중 나는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에 입대하였고 일반하사로 편입이 되어 외출도 없이 7개월간 강도 높은 하사관후보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후보 교육을 받는 중 친지들이나 후배들로부터 간간히 위문편지를 받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가장 믿었던 그 친구로 부터는 편지 한 통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편지 한 통 없는 그 친구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한 섭섭함이 너무나 컸습니다. 마침내 후보 교육을 마치고 첫 휴가를 나와 그 친구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내가 입대한 직후에 지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 친구를 원망했던 내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졌습니다. 그 친구의 운명에 함께 해주지 못하였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고요.
일주일간의 짧은 휴가 기간이었지만 나는 정읍행 열차를 타고 그의 고향집을 찾아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부모님과 함께 그의 위패가 모셔진 전주의 한 사찰에 들러 그의 명복을 빌어주었습니다. 당시 나는 그의 어머님께 먼저 간 그 친구를 대신하여 아들 노릇을 하겠노라 다짐의 말씀을 드렸고, 위 여동생에게도 친 오빠가 못 다한 오빠로서의 역할을 다 하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후 나는 그의 가족이 되어 어머님이 계시는 정읍도 가끔 찾아 인사를 드렸고 어머님 또한 서울에 있는 나를 찾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위 여동생과는 대화도 통하고 친숙한 오누이 사이가 되어 스스럼없이 연락을 하며 지냈으나 막내 여동생은 서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고 친숙함이 조성되어 있지 않아 서로 연락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 후 내가 취직도 하고 생활결혼을 하면서 바쁘다는 이유로 차츰 연락이 뜸해지면서 그의 가족과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내 기억 속에 떠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에 정읍에서 개최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심사를 가 정읍시청 관계 공무원들에게 가족들의 주소를 수소문해달라고 부탁을 하여 위 여동생의 거처와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와 그 친구의 가족과 연락이 끊긴 후 부모님께서는 모두 타계하셨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습니다. 나의 무심함으로 그 친구의 부모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불효가 너무도 마음에 걸립니다. 위 여동생은 시집을 가 지금은 딸 둘을 낳고 잘 살고 있으며 나와 그녀의 두 딸들과도 좋은 인연으로 맺어져 만나고 있습니다.
내 친구가 세상을 떠나간 지 40년이 되어 옵니다. 그래도 그 친구는 내 마음 속에 남아 영원한 청년으로, 나의 진정한 친구로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첫댓글 원주 사는 친구(예고때 상쇄잡이 하던 최영미) 남편이(54세)2월에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셔서 충격 였지요. 지난 토욜 서울서 친구들과 만나 식사하면서 서로들 울고 웃고... 아직은 실감 안 나지만 아이들 생각함 빈 자리가........그의아들 오늘 논산 훈련소 (직업군인)입대한다고...마음이 찹찹 하더라고요...선생님~!! 우리 나이가 벌써?영미 남편도 하늘나라 에서 남은 가족들 지켜보고 있겠지요... 앙~~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