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감 – 문경자 수필가
0 POSTED BY HCNEWS - 2024-08-15 - 기고, 뉴스홈
감나무는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준다. 때로는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고향집 감나무가 있던 자리에 앉아 놀던 생각이 난다. 은행나무, 모과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등이 있지만 그 중 친숙하고 달콤한 홍시 맛을 주는 유일한 감나무가 제일이다. 다른 나무 꽃들은 먹을 수 없지만 감꽃은 간식으로 먹기도 하고, 꽃목걸이, 꽃반지, 팔찌도 만들어 여자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꽃이 다 떨어지면 둥근 모양의 열매가 자란다. 하지만 감이 열리기 시작하고, 자라는 과정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감은 동글동글하게 볼 살이 오른다. 손으로 만지면 탱자처럼 탱탱하다. 새파란 땡감이 나뭇잎 사이사이에 숨어 바람이 불면 매끈한 얼굴을 내민다. 예쁜 얼굴을 탐내는 무리들이 슬슬 기어나와 얼굴에 상처를 입힌다. 날씨에 따라 햇빛을 잘 받거나 적당한 감나무 잎사이에서 안전하게 자라면 다행이었다. 전염성이 퍼지면 탄저병이나 진딧물로 인해서 나무에서 뚝 떨어져 천대를 받는 땡감도 많다. 떨어진 것들은 하얗게 곰팡이가 피고 아주 볼품없는 얼굴로 개미들의 놀이터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세상에 나와서 그렇게 빨리 문드러지고 상한 몰골을 보면 불쌍하고 아픔이 마음속에 파고든다. 사람의 생명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멘트바닥에 떨어진 땡감을 보며 고향의 한 시절을 보는 것 같다.
도시에서 살다 보면 계절이 어떻게 가는지 그저 바쁘게 살아 가는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반면에 느긋하게 즐기면서 사는 사람도 있으며 세상만물이 서로 살아 가는 것이 다르듯이 말이다. 감을 보면 나훈아 노래처럼 울 엄마, 울 아빠가 생각난다. 치아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홍시를 먹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만해도 튼실한 땡감 한 개도 맘대로 따 먹을 수가 없었다. 몰래 한 개를 따다가 들키면 머리에 꿀밤을 맞기도 했다. 우리집 감나무는 부실해서 감이 열리지 않아 남의 집 감나무만 쳐다봤다. 감나무 주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하였다. 감이 익으면 먹는 것도 좋지만 팔면은 수입이 짭짤하였다. 감나무가 많은 집은 가을이 오면 감 따는 일이 농사를 거두는 일과 같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길을 가다 보면 땡감이 열린 나뭇가지가 무거워 아래로 늘어져 그곳을 지날 때는 머리가 띵하고 부딪히기도 하였다. 보기에는 탐스럽게 자라 그냥 땡감 인줄 알지만 속은 땡땡하고 여물다. 홍시가 되었을 때는 나긋나긋하고 말랑말랑 하지만 한때는 청춘인 때도 있었지. 땡감을 만져 보면 차갑고 단단하고 매끈매끈하여 강한 인내심이 느껴졌다. 손안에 넣으면 매끈하고 단단하며 친구 중식이 대머리같이 반질반질하다.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땡감도 자라면 살이 올라 동글동글하다.
산골 마을은 아낙들이 모여 감나무 그늘아래서 길쌈을 하였다. 답답하고 좁은 집안에서 보다 밖으로 나와 수다를 떨며 하는 일이 더 즐거웠다. 아낙들과 처녀들은 삼베치마를 걷어 올리고 무릎을 세워, 삼을 한 가닥 무릎위에 놓고 손으로 도르르 말아, 이어 부치는 기술은 대단하였다. 무릎도 젊을 때는 땡땡하여 반질반질했다. 땡감처럼 단단하여 일을 하는데도 큰 힘이 되었다. 할머니의 무릎은 삼줄기를 많이 말아서 얼룩져 있었다. 튀어나온 무릎뼈도 살아온 세월을 말해 주었다. 할머니는 동네서도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났다. 이제는 땡땡한 삶보다는 말랑한 성품이 되었다. 길쌈을 하고 있는 주줏골은 산이 가깝고 산골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졸졸 흘러 더우면 세수도하고 손과 발을 씻고 나면, 시원해서 한결 일하는 손이 빨라지고 콧노래도 절로 나왔다.
마을 길은 도로변처럼 만들어 지지 않아 어떤 때는 여자와 남자가 길을 피하려면 서로 부딪히기도 하는 만큼 길이 되기도 한다. 길쌈을 하고 있는 곳은 초입길이라 남정네들이 땔감을 지고 그곳을 지나가야만 했다. 처녀들과 아낙들의 길쌈을 하다 치마로 무릎을 덮고 비켜주면, 남정네들은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갔다. 집안에서 큰 소리 땡땡 치던 동이 아범도 부끄러운지 눈을 아래로 감고 가는지 비틀거려서 웃음이 나왔다. 그 뒤를 따르던 영순 오빠도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갔다. 아낙들은 그 모습이 우스워 낄낄 웃었다. 그때 매미가 맴맴 배꼽을 내밀며 배가 아파서 웃었다. 골짜기가 웃음꽃이 다 차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도 어른들의 웃음에‘아이구 배야’하고 막 웃었다. 그때 또 까치가 깍깍 하고 웃으며 하늘 높이 날았다. 웃는 얼굴은 행복하고 배가 고파도 좋았다. 일을 하다 웃다 보면 배가 출출하고 뱃속이 꼬르륵 소리가 난다. 감나무 가지가 축 늘어져 손만 뻗으면 땡감을 딸 수가 있었다. 간식거리로 감을 따서 배고픔을 달래기도 하였다. 단단한 건성을 가진 땡감은 따기도 힘들었다. 주인들에게 들키면 매일 따는 줄 알고 의심을 받을 수가 있어 감 이파리 뒤에 달려있는 풋것을 땄다. 흐르는 냇물에 깨끗하게 씻어 굵은 소금에 찍어 먹었다. 대봉감은 떫고 입 안이 떨떠름해 무슨 맛인지 잘 몰랐다. 아이들도 따라 먹다가 떫다고 하며 뱉아 내기도 하였다. 입 안에 뭐가 꽉 채워져 있는 듯했다. 아낙들이 시키는 데로 꼭꼭 씹어 먹다가 보면 단맛이 나왔다. 빙긋빙긋 웃으며 먹는 모습도 우습다.
땡감을 주인 몰래 주워 장독에 재를 넣고 삭혀 5일장에 내다 팔아 생필품을 사고 아이들 간식도 샀다. 감 줍는 일도 재미가 있었다. 어느 날 주인 몰래 감나무 아래 살금살금 기어가다 참새가 날아가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땡감을 삭힌다고 재를 넣고 양지 바른 곳에 며칠을 두었다. 빨리 먹고 싶어 뚜껑을 열고 하나를 꺼내 베어 먹다가 맛이 없어 그대로 넣어 두기도 하였다. 집집마다 땡감을 삭히는 일도 유행이었다. 엄마가 없는 날 친구들이 몰려와 감이 잘 삭았는지 뚜껑을 열어 보자고 하였다. 나는 자신 있게 뚜껑을 열고 덮어 놓은 지푸라기를 들어 냈다. 아이구! 삭힌 감 모양은 바위에 핀 버짐 같고, 식초냄새가 코를 찔렀다. 감식초가 되었다. 먹지는 못해도 찔러보자 하고 냄새를 맡아 본 친구들이 코를 막고 모두 달아났다. 삭은 감도 읍에 내다 팔면 간식을 사서먹을 수가 있었고, 언니들은 1접을 내다 팔면 용돈도 벌었다. 나는 혼자 멀거니 단지속을 쳐다보았다. 땡감은 주근깨가 박힌 것들도 많았다. 어느 총각은 처녀와 맞선을 보고, 부모에게는 사진을 보여주며 허락을 받았다. 시집온 며느리 얼굴을 보고 실망하였다. 사진에 없던 며느리의 주근깨를 보았던 것이다.
땡감은 주근깨가 있어도 선 볼일은 없으니 괜찮다. 떫고 풋내가 나지만 그때 먹었던 땡감은 배고픈 내 입안을 한 입 꽉 채워 주었다. 지금은 고향도 그때의 그런 풍경은 아니다. 거의 베어지고 감도 튼실하게 열리지 않았다. 도심의 길을 가다 감나무에 달려 있는 땡감이 익기 전 떫은 맛의 글을 한편 쓰고 싶은 마음이 더해졌다. 달콤한 홍시로 변신한 것을 먹을 때는 고향의 그리움이 달달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