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이재명, 매국노 이완용
8월 29일은 한일강제병합늑약의 경술국치일이다. 1910년 그때부터 124년이 흐른 2024년의 대한민국이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와 독도 문제에 당당하지 못하고 일본의 논리에 부응하며 꼬리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처리수라고 홍보하며 세금까지 낭비하고 있다. 그뿐인가? 사도광산까지 일본의 행태에 들러리 서서 감싸고 변명까지 해주는 친일 매국 정치 모리배들이 득세하고 있다.
이 사도광산의 ‘강제성 문제’에 대해서 일본 관방장관 하야시 요시마사가 강제노동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방안을 한국이 수용했다고 하자, 정부는 ‘외교상 오고 간 얘기에 자세한 답변은 삼가겠다’고 했다. 일본이 무서워서인지, 좋아서인지 참으로 회색 답변이 가관이다. 더욱 독립기념관장에 친일파 김형석을 임명하니 친일기념관이 되었다. 참으로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다. 상황이 이러하니 현 정부는 우리 정부가 아니라, 조선총독부라는 비아냥이 낯설지 않다.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 시 찬성하고 서명한 다섯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산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대신 권중현이다. 이 을사늑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의 정미7적은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내부대신 임선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다. 이들은 조선통감부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 명의로 체결된 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하고 순종의 재가를 얻는 데 앞장섰다.
또 경술년인 1910년 8월 29일의 한일 강제병합늑약체결에 찬성하여 말 그대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은 여덟 명이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궁내부대신 민병석,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이병무, 시종원경 윤덕영, 승녕부총관 조민희가 바로 그날의 경술국적이다.
다시 회고하건대 1910년 경술늑약에 순종의 서명도 위조하고 국새가 아닌 행정결재에 쓰는 어새를 훔쳐서 찍은 이완용과 박제순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중 이완용은 당시 을사늑약, 정미7적, 경술국적 등 매국 행위에 모두 참여한 매국노의 대표 인물이다. 이렇게 박제순은 매국노 2관왕, 이완용은 3관왕이고, 이들은 막대한 은사금까지 받았다. 이완용 15만 엔(30억 원), 이지용 10만 엔, 송병준과 고영희 10만 엔 등이다. 친일파는 떵떵거리고, 독립군 후손은 거지처럼 산다는 말이 괜스레 생긴 말이 아닌 것이다.
또 하나 이완용의 창씨개명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이다. 한자음으로 읽으면 ‘이가 완용’이다. 사실 이완용뿐만 아니라 당시 창씨개명은 자신의 한국명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이름을 지었다. 그렇게 일신의 영달을 위해 회색 변신을 했으니 바로 오늘의 토착왜구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전 재산을 초개처럼 바친 선열께 참으로 부끄럽기만 하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참모중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국내에서도 이완용·이용구·송병준을 처단키로 하고 이완용은 이재명, 이용구는 김정익, 송병준은 이동수가 맡았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변장했다.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명동성당)의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는 이완용을 기다렸다. 11시 30분 이재명은 인력거를 탄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칼로 3번 찔렀다. 하지만 이완용은 당시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로 살았다.
이재명은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조선총독부 발족 바로 전날인 1910년 9월 30일 순국했다.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다시 맞는 국치일에 애국지사 이재명의 명복을 빌며 부디 하늘의 심판이 있고, 땅에는 정의가 샘물처럼 흐르는 나라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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