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9월 11일 월요일 비
새벽부터 비가 주룩주룩 쏟아진다.
예사 비가 아니다. 세종시에는 호우주의보까지 내렸다나.
거름을 실러 가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난다. ‘그래도 가야지. 이 보다 더 한 어려움도 다 이겨 나갔는데....’ 어제 실어 놓은 물통에 뚜껑을 덮어놓은 게 다행이었다. 저 비가 물통을 채웠다면 정산까지 끌고 가기 어려웠을 거다. ‘뚜껑을 따로 뒷자리에 싣지 않은 것이 혜안이었지.’ 그 때까지는 그랬었다.
백제당 거름을 싣고 나니 더 이상 실을 곳이 없다. 마감을 해야지.
물통 위에 겹쳐서 얹은 물통 뚜껑이 고속도로의 거센 바람을 견디려나 걱정이 돼서 바를 다시 한 번 확인했더니 견고했다. ‘이 정도면 안전 하겠지. 그래도 천천히 운전을 해야 겠다. 안전이 우선이지’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고 정산으로 출발했다.
회덕분기점을 지나 호남고속도로로 진입한 후 첫 고개를 오르는 중이었다.
2차선으로 천천히 언덕을 오르는데 갑자기 1차선으로 접근한 승용차가 빵빵대며 창문을 내리고 소리친다. “.... 짐을....” 잘 들리지는 않는데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다. ‘물통 뚜껑이 문제가 있나 ?’ 얼른 차를 갓길에 대고 황급히 내렸다. 짐칸을 살펴보니 아뿔사 뚜껑이 하나만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바가 느슨하게 풀어져있고, 그 사이를 뚫고 세 개가 날아 간 것이다.
무게도 만만치 않은 것이라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르는 일이잖나.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 뒤에 하얀 트럭 한 대가 멈춘다.
젊은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자기 차 앞부분을 내려다 본다.
지례 겁이 나서 “왜요 ? 무슨 일이 있었어요 ” 저절로 쏟아진다.
“통 뚜껑이 날아와서 내 차를 때렸어요. 짐을 잘 싣고 다녀야 될 거 아녜요. 차에 이상이 없으니 그냥 갑니다” 휭하니 떠난다. 마음 좋은 사람이네.
물통 뚜껑이 날아가다 차 앞부분 유리창 아래 차체에 부딪쳤나 보다.
찌그러지거나 긁힌 자국이 없으니 찡그린 얼굴로 휭하니 떠났다. 조금만 더 위로 날았다면 유리창을 박살냈을 건데..... 그 다음에는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남은 두 개는 문제가 없었나 ?
하나 남은 뚜껑을 뒷좌석에 싣고, 바를 다시 묶으려 하는데 이 번에는 앞쪽에서 여자 한 분이 핸드폰을 들고 나타난다. “차 번호라도 알아둬야 겠어요”
‘이 건 또 무슨 말인가 ?’ 앞을 보니 SUV 차 한 대가 서있다. 앞서 가다가 후진한 거다. “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자동으로 나온다.
“뚜껑 두 개가 날아와서 내 차 밑을 치고 들어갔단 말이예요. 꽝 소리가 났는데 어디가 부서진 것 같애요.” 얼른 가서 차 밑부분을 들여다 보았지.
차 밑 엔진을 보호하려고 덮은 프라스틱 판이 약간 부서져 있었다.
충격이 컸나 보다. 강한 프라스틱이 부서졌을 정도니....
“아이구 죄송합니다. 꼭꼭 잘 묶었는데 바람이 워낙 거셌던 모양이네요. 고쳐드릴 게요” 운전석에서 한 여자 분이 내린다. “얼마나 놀랐는지.... 전화번호나 주세요” 청정농원 명함을 건넸다. “매실 농사를 지으시나 봐요 ?”
‘으으, 잘 해결되겠다. 화부터 낼 줄 알았는데....’ 얼른 말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잘 묶은 걸 확인까지 했는데.... 큰일 날 뻔 했네요. 다치신 데는 없나요 ? 어디 사세요 ?” “대구요” “많이 놀라셨죠 ? 고치신 후에 연락 주세요. 금방 송금해 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순순히 떠나신다. 복받으실 분들이시다. 이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까 ? 바를 다시 묶으면서도 걱정이 계속된다.
적재 불량으로 신고 되면 벌금이 나오지만 벌점이 15점이다. 작년에 거름을 싣고 바를 묶지 않았다고 4만원 벌금에 벌점 15점을 맞았다.
1년에 45점을 초과하면 면허정지가 된다는데..... 그 게 더 걱정이 된다.
요즈음은 블랙박스 영상으로 신고하는 사람이 많다던데, 커다란 뚜껑이 날아다니는 영상이 찍혔다면 얼마나 좋은 그림인가 ?
어쨌든 이미 벌어진 일, 바를 다시 꽁꽁 묶고 출발했다. 후회 막급하고 찜찜하기 그지없다. 대구의 두 분 마음이 변하시지 않기만 바래야지.
그 후 내내 찜찜했다. 내려놓은 통도 예뻐보이지 않는다. 변덕도 심하다.
‘에이, 서당골에 가서 밤이나 줍자.’
비에 흠뻑 씻긴 산길에 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그런데 돼지 발자욱이 보이지 않는다. ‘어라. 이 놈이 어디 갔나 ? 혹시 포수가 와서 잡아간 건 아닌가 ?. 내가 매일 나타나서 소리소리 지르니까 다른 산으로 피해갔나 ? 아니면 수학여행이라도 떠났나 ?’ 온 산에 찍혀있던 발자욱이나 파헤친 구덩이, 씹어 뱉은 밤껍질도 비에 씻겨 보이지 않는다. 비가 내린 후에는 이 산에서 사라진 것이다.
‘햐. 이런 일도 생기네. 오늘 일진이 나쁜 것만은 아니네. 그런데 두고 볼 일이다’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지 않나.
이제 밤을 주을만 했다. 돼지가 없어진 이상 모두 내 차지니까, 서둘 것도 없고.... 처음으로 흐뭇하게 주웠다.
내일 불당골까지 주워서 달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