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못하면 내가 한다" 사이버 감옥의 위험한 낙인 [이래도 되나요]
송고시간2020-09-15 07:00
이은정 기자
(서울=연합뉴스) 지난 5월 말 사이버 공간에 세워진 창살 없는 감옥, 디지털교도소.
성범죄, 아동학대 등 강력사건 범죄자나 혐의자 신상 정보를 임의로 공개하는 사이트인데요. 얼굴과 이름, 직업, 학력, 휴대전화 번호 등을 낱낱이 알려 사회적 심판을 받게 한다는 취지로 개설됐습니다.
익명의 운영자가 사법부의 관대한 처벌에 한계를 느낀다며 '정의 구현'을 내세워 응징하자, 이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컸는데요.
그러나 취지엔 공감할지라도 개인이 무분별한 신상 공개를 한다는 점에서 명예훼손과 인권침해 비판이 따라왔습니다.
우려한 대로 성착취물 제작을 의뢰했다며 이 사이트에 오른 한 대학생이 결백을 주장하다 지난 3일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심지어 한 의과대학 교수는 지난 6월 말 이 사이트에 노출돼 무고한 피해자가 됐는데요.
경찰 수사로 성착취범 누명을 쓴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미 사회적 낙인이 찍힌 교수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 사이트는 또 지난 7월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범인으로 동명이인의 신상을 잘못 공개해 게시물을 삭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디지털교도소가 공익적 활동인지, 사회적 심판으로 포장된 범법 행위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거셌는데요.
수사기관도 피의자 신상을 공개할 때 신상공개위원회를 열어 신중하게 판단하고, 판결 확정 전까지 피의자에 대한 무죄 추정 원칙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누리꾼 사이에선 '법이 제 기능을 못 하니 필요하다', '피해자는 보호하지 못하면서 범죄자 인권 챙기냐' 등 옹호 의견과 '형벌이 결정되면 해야지 선을 넘었다', '네가 판사냐?' 같은 싸늘한 시선이 교차했는데요.
성격은 다르지만 민간의 온라인상 사적 처벌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혼 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부모의 신상 정보를 공개한 사이트 배드파더스.
운영자가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으나 비방이 아닌, 공익성을 인정받아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요.
그러나 지난 2016년 온라인상에 유흥업계 종사자들 신상을 폭로한 '강남패치' 운영자는 항소심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진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정보 공개로 비방 목적이 인정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문제는 법적 처분과 상관없이 신상을 공개하며 사적 처벌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입니다.
공정식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개인이 개인을 처벌하는 것은 우리 현행법상 인정되지 않는, 형법상 위반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며 "가해자가 아닌 사람이 피해자가 되는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은 중대한 범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요.
그로 인해 법조계에선 디지털교도소 운영자가 형법상 명예훼손죄나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일단 경찰은 운영자를 검거하면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한다는 방침인데요.
형법에선 '명예훼손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엔 처벌하지 않는다'는 위법성 조각 사유가 있지만, 정보통신망법에선 '비방 목적'으로 사실을 드러내면 내용의 진위와 관계없이 명예훼손죄가 인정됩니다.
전형환 법무법인YK 변호사는 "(최근 대법원 판례를 보면) 만약 비방 목적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 진실한 사실이라면 형법상 위법성 조각 사유로 처벌받지 않을 수도 있다"며 "운영자는 입건되면 비방 목적이 없었다고 변론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찰의 사법처리 방침에도 디지털교도소는 수배된 1대 운영자에 이어 2대 운영자가 계속 꾸려갈 뜻을 밝혔는데요.
사법 체제를 벗어난 사적인 단죄. 평생 고통을 안고 갈 피해자를 위로하겠다면서 또 다른 억울한 피해자를 낳는다면 무차별적인 신상털이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디지털교도소 #사적제재 #정보통신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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