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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읊는 시:
길의 끝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고
끝까지 가야 끝을 넘을 수 있다.
막다른 골목에서 문이 열리고
끝을 봐야 끝 너머가 보인다.
‘여기까지!’라고 할 때 ‘여기’를 넘어선 땅이 펼쳐온다.
1. 아티샤 존자에 대해:
아티샤 Atisha, 디팡카라 쉬리즈냐나 Dipankarashrijnana(982~1054, 73세, 燃燈吉祥智)는 불교를 전승하신 큰 스승이시다. 11세기 대승불교와 금강승불교를 대표하는 주요 인물이며, 비끄라마쉴라 불교대학의 학장이셨다. 인도는 물론 티베트와 수마트라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불교의 영향을 넓혔다. 아티샤의 상수 제자인 돔된빠(Dromtönpa, 1004~1064)는 까담빠를 창시했는데 나중에 까담빠의 가르침은 14세기에 개창된 겔룩파로 흡수되었다. 2004년 BBC에서 인기 투표한 결과 벵글라데시가 낳은 최고의 인물로 뽑혔다.
아티샤 존자의 출생지는 남동 벵갈 지방의 고대 왕국인 빨라 Pala왕조의 수도였던 비끄람뿌르Bikrampur이다. 그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 벵글라데쉬 문쉬간지 Munshiganj 지역이다. 여기는 지금도 불교의 문화적, 학문적,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아티샤는 왕족 출신이며, 아버지는 칼리야나찬드라 Kalyanachandra이며 어머니는 쉬리 쁘라바와띠 Shri Prabhavati이다. 찬드라 왕조의 라자 쉬리찬드라 Raja Srichandra는 그의 할아버지다. 그는 세 형제가 있었으며, 어릴 때 이름은 찬드라가르바 Candragarbha였다. 나중에 구게 Guge왕국의 장춥외(Jangchub Ȫ, 984~1078)왕이 아티샤Atisha라는 법호를 하사했다.
티베트 자료에 의하면 아티샤 존자는 28세에 쉴라락쉬따 Śīlarakṣita장로에 의해 마하상키까Mahasanghika(대중부)계통으로 수계를 했으며, 불교와 더불어 당시 유행하던 비쉬누파 Vaishnavism와 쉬바파 Shaivism 등 힌두 밀교 수행을 비롯한 외전 공부를 했다. 음운, 음률, 논리학을 비롯한 64종의 기예를 통달했다. 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공부하고 수행을 성취하여 전법을 받았다. 무착과 세친의 심오한 실천(유가유식파)과 용수와 월칭의 심오한 견해(반야중관파), 틸로빠와 나로빠의 심오한 체험을 전승했다. 존자는 150분의 스승을 모셨다고 하며 그중 다르마끼르띠쉬리 Dharmakīrtiśrī(Serlingpa, 셀링빠)존자를 최고로 쳤다. 다른 고명한 스승으로는 비끄라마쉴라 대학의 라뜨나까라샨띠 Ratnākaraśānti존자이다.
티베트 자료에 의하면 아티샤 존자는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Srivijaya 왕국에서 12년을 보내고 1025년(43세) 인도로 돌아왔다. 같은 해 인도의 촐라 왕조의 라젠드라 촐라 1세 Rajendra Chola I 왕이 수마트라를 침략했다. 인도로 돌아온 존자는 지혜가 출중함으로 알려져 승려들이 교학과 논쟁을 배우려 모여들었다. 존자는 외도와의 벌어진 세 번의 논쟁에서 이겼다. 존자는 잘못된 불교 이해나 부패의 조짐이 보이면 즉시 개혁하려 했다. 오래지 않아 다르마빨라 왕국이 후원하는 비끄라마쉴라 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존자는 오단따뿌리 Odantapuri대학(오늘날 비하르 샤리프 Bihar Sharif에 있었던 불교대학으로 날란다 대학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을 육성했다.
다르마끼르띠쉬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후 수마트라에서 돌아온 아티샤는 때마침 벵갈 지방에 불교수행과 불교문화가 발전하던 시기였기에 여러 면에서 크게 공헌할 수 있었다. 티베트 왕 랑다르마는 불교를 탄압하고 70년간 박해하였다. 구게왕국의 에세외(Yeshe Ȫ, 959~1036) 왕은 학자와 승려를 인도로 보내 산스끄리뜨 경전을 배우고 번역하게 했다. 그 가운데 낙쏘 Naktso라는 분이 비끄라마쉴라 대학에서 산스끄리뜨를 배우면서 존자께 티베트로 오셔서 법을 펴줄 것을 간청했다. 드디어 존자는 네팔을 경유하여 구게왕국의 수도인 퇼룽 Tölung에 도착했다. 도중에 마르빠(Marpa Lotsawa, 1012~1097)역경사를 만났다. 구게왕국에서 3년간 머물면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불교 교과서인 보디빠따쁘라디빠(Bodhipathapradīpa, 菩提道燈論, 보리도등론)을 저술했다. 전체가 67행인 이 짧은 교과서는 소승, 대승, 금강승을 망라한 불교 전체의 내용을 단계별로 배치하여 깨달음으로 가는 단계를 이야기하는 장르의 모범이 되었다. 이는 특히 후대에 쫑까빠(Tsongkhapa,1357~1419)대사의 람림 Lamrim의 기초가 되었다. 아티샤는 상수 제자인 돔된빠를 얻었는데, 그는 아티샤의 밀교 법맥을 지속하고 전파하는데 모범이 되었다.
2. 보리도등론(Bodhipathapradīpa, 菩提道燈論, 장춥람기된마): 상, 중, 하사도의 단계별 가르침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3. 쫑카빠 대사
쫑카빠(쫑카 지방의 남자, 양파 골짜기의 남자라는 뜻, 1357~1419, 63세)는 티베트 불교에서 영향력이 큰 승려이자, 철학자, 밀교 수행자이다. 그는 겔룩파라는 최대 종파를 창시했다. 법명은 로상 닥빠(Sumatikīrti, 수마띠끼르띠)이며, 제 린포체(고귀한 님이란 뜻)라 불린다. 한어로는 宗喀巴라 한다.
대사는 원나라에 관리로 근무하는 암도 지방의 한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가해서 당시 유행하는 불교의 여러 종파 사캬, 조낭, 까귀, 까담의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대사는 불교학, 논리학, 해석학과 수행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많은 책을 저술한 작가였다. 중론에 대한 주석서(Ocean of Reasoning, 추론의 바다), 대승 수행(람림첸모, Lamrim Chenmo), 그리고 금강승에 대한 주석서(비밀진언 광론, Great Exposition of Secret Mantra)를 섰다. 또한 디그나가(진나)와 다르마키르티(법칭)의 인식론과 용수와 월칭의 중관에 대한 주석서도 저술했다.
대사는 현교와 밀교를 통섭하여 분석적 추론과 요가 명상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저술했다. 현상은 자성이 없다고 보는 공성의 근본적 관점을 견지한 채 논리적으로 정합적한가, 도덕적(관습적 차원)으로 정당한가 하는 접근법으로 저술했다. 공성이란 허무주의나 존재의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ly이며, 관계적relationally이고, 비본질적non-essentially이며, 관습적conventionally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의미이다.
생애
아버지는 몽고 사람이며, 어머니는 티베트 유목민이었다. 1357년 암도지방의 쫑카 마을(청해성 시닝)에 태어났다. 6살에 사미가 되어 까담파 스님 최제 된둡 린첸을 첫 번째 스승으로 모시고 교육받았다. 16살 때 중부 티베트(Ü-Tsang, 위짱)으로 가서 디궁 까귀의 상뿌 사원에서 경학공부에 매진하였으며 디궁 까규의 조사이신 쳉가 최키 걀포 대사로부터 마하무드라와 나로6법을 전수받았다. 또한 샤캬 판디타(Sakya paṇḍita, 1182~1251)에게 사캬파 전통을 배웠다. 대사는 티베트 의학과 아비달마, 율장과 인식론(量學, pramāṇa) 그리고 밀교를 배웠다. 까담파의 많은 스승을 모셨으며, 람림의 법맥을 전승받고 닝마의 고승 로작 남카 겔쩬(Lhodrag Namka-Gyeltsen)에게 구전을 받았다. 그리고 라마 우마 Lama Umapa의 구전을 전해 받고 법맥을 이었다.
초기에 대사는 산타락쉬타의 유식-자립논증-중관-의 관점과 될뽀빠(Dȫlpopa, 1292~1361)를 반박하는 관점으로 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 Abhisamayālaṃkāra)의 주석서 황금 화환(렉세세르텡)을 썼다.
안거와 문수보살 친견
대사는 1390~1398년(43~51세) 사이에 몇몇 제자와 함께 여러 수행처(가장 유명한 곳은 욀카 계곡Wölkha Valley)에서 장기간 안거에 들어갔다. 거기서 문수보살과 인연이 있는 신비한 은둔 라마 우마빠를 만났는데, 그는 대사를 위해 검은 문수의 영매 역할을 해주었으며, 드디어 대사 자신도 문수를 친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문수보살께 공성에 대해 질문하여 답을 들었다.
“반은 공성이고 반은 현상이라는 것은 맞지 않다. 특히 너는 현상적인 면을 더 진지하게 받아드려라.”
대사는 그의 스승 렌다와와 함께 문수보살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논의했다. 이 시기에 문수보살에게서 일련의 구전을 받았는데, 이를 ‘문수보살 가르침의 모음’이라 한다. 1397년(50세) 윌카계곡에서 가행정진을 하던 중에 대사는 공성에 중요한 통찰(ngeshé chenpo)을 얻었다. 처음에는 위대한 중관논사 용수, 붓다빨리따, 아리야데바, 월칭을 꿈에서 보았는데, 붓다빨리따는 경전 묶음을 대사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깨고 나서 대사는 용수의 중론에 대한 붓다빨리따의 주석을 공부하였다. 18장을 읽다가 중관에 대한 이해가 수정처럼 밝아지며 모든 의심이 풀렸다. 공성과 연기가 둘이 아니라는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간덴 사원에서 저술활동
대사의 후반생에 교학과 수행론에 대해 일련의 저술을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보리도차제광론((Lam rim chen mo, 람림첸모, 1402년경, 45세)인데 여기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대승의 길과 공성과 중관을 밝게 보여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 밀교차제광론(Sngags rim chen mo, 악림첸모)도 저술했다. 달변의 핵심(렉세닝뽀)와 추론의 바다(릭뻬갸쏘, 중론의 주석서), 그리고 중간 길이의 람림과 의도를 밝임(공빠랍셀)은 그의 마지막 저술이 되었다.
세 개의 명문 불교대학: 간덴, 데뿡, 세라
1409년(52세) 조캉사원을 중건하여 보름 동안 석가모니 불상을 기리는 기도회를 열었다. 라싸에서 2시간 떨어진 곳에 간덴 사원을 창건하였으며 그의 제자 타시 뺄덴(1379~1449)은 데뿡사원(1416년)을, 사꺄 에세(1354~1435)는 세라사원(1419년)을 세웠다. 이 세 사원은 겔룩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원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이 불교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겔룩파 혹은 간덴파는 티베트 불교에서 새로이 성장하는 종파가 되었다.
죽음과 유산
대사는 1419년(62세)에 간덴 사원에서 돌아가셨다. 대사에게 세 분의 중요한 제자가 있었는데 케둡 겔렉 뺄상, 걀쌉 다르마 린첸, 뒬신 닥빠 겔쩬이다. 다른 분으로 톡덴 쟘뻴 갸쏘, 쟘양 최제와 잠첸 최제, 그리고 데뿡과 세라사원을 개창 하신 두 분, 또한 제1대 달라이라마로 추존된 겐뒨 둡이다.
대사가 입적한 후 제자들이 많은 절을 세우거나 다른 절을 개조함으로써 겔룩파는 티베트 불교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겔룩파는 전승되어 온 까담파를 계승한다는 관점을 취하며 비구계를 수지하고 불교학 연찬을 강조한다. 15세기 무렵에는 간덴 전통이 티베트의 문화를 주름잡으며, 위짱(중부 티베트)을 비롯한 캄과 암도 지방에 겔룩파 사원이 속속 건립되었다.
제8대 까르마빠 미쵸도르제는 ‘불교의 개혁자, 중관의 위대한 수레꾼, 공성을 꽤 뚫은 최상인, 티베트는 물론 중국, 카쉬미르까지 전법을 위해 가사가 닳도록 움직이신 분’이라 찬양했다. 제9대 까르마빠 왕축도르제는 ‘바르고 완벽한 견해로 사견을 씻어버리신 분’이라 칭찬했다.
스리비자야 불교 왕국을 거쳐간 구법승에 대하여:
①스리비자야(Srivijaya, 말레이어: Sriwijaya)는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 자바 지역에서 강력한 제해권을 가졌던 도시 국가였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비문이나 당나라 의정의 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 南海寄歸內法典>에 스리위자야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신라, 그리고 인도와 활발한 교역 활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영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와 중국을 잇는 항로의 가운데 위치하고, 믈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의 중앙이라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8세기에 해상 무역 국가로 빠르게 발전했다. 때마침 인도 서쪽의 이슬람 제국에서 상선이 동쪽으로 진출하는 시기라, 당나라도 이곳의 풍요로운 시장성을 노려 해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기에 스리위자야는 자연적으로 중계무역지 구실을 했다.
7세기 후반 인도에 유학했던 당나라 승려 의정이 도중에 스리위자야에 들러 산스크리트어 연구와 불경 번역에 힘썼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의 불교가 융성했다는 걸 알 수 있다. 8세기 중엽에는 말레이반도의 일부도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며 영토도 넓어져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대국이 되었다. 10세기를 최전성기로 하여 그 뒤 쇠퇴해 14세기에 몰락했다.
스리비자야 왕이 강력하게 후원하던 날란다 대학의 뛰어난 밀교 이론가들이 스리비자야 왕국에 영향을 미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스리비자야 왕이 날란다 대학에 다양하게 지원하는 반면 날란다의 유수의 학자들도 스리비자야로 들어와 활동했다. 당연히 동 인도와 벵골만의 무역선을 이용했다. 대표적인 불교학승 아티사도 날란다와 스리비자야 두 곳에 모두 발자취를 남겼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유적지
②의정(義淨, 635~713, 79세)은 당나라의 고승으로 범어로 된 불경을 가져와 번역하였다. 하북성 제주(현재의 산동성 제남시)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15세에 649년(정관 23년)에 서역 구법행을 떠났다. 671년(함형 2년) 37세 때 바닷길로 번우현(현재의 광저우)를 떠나 수마트라·팔렘방 등을 거쳐 탐나립티국(耽羅立底, 벵갈만에 있던 왕국)에 도달하여 범어와 성론(聲論, 음운학)을 배웠다. 법현과 현장의 행적을 흠모하여 범어 불경을 얻었고, 귀로에 바닷길로 말레이, 인도네시아(수마트라에 있던 스리위자야 제국의 중심 도시 팔렘방 등)를 거쳐 695년 귀국했다. 남중국해 여러 나라와 인도에서 체험했던 견문을 살려 불교의 상황, 스님들의 생활, 민중의 생활상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의정법사는 스리위자야의 불교학 연구 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칭찬하며, 중국의 인도 구법승들에게 날란다 대학에 가기 전에 스리위자야 왕국의 팔렘방에 가서 먼저 예비과정을 밟고 가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보가(Bhoga) 지역에는 1천여 명의 비구들이 공부하고 있는데, 교학 연구와 수행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 했으며, 이곳에서 배우는 교과과목은 전부 날란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교과과목과 규율, 의식(儀式)이 동일하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의 구법승이 인도에 가서 유학하려고 하면 스리위자야 왕국에 가서 1년이나 2년 정도 예비과정을 마치고 규율(계율)도 확실하게 익히고 가라는 길라잡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의정법사는 남쪽 바다의 섬나라(자바, 수마트라, 인도네시아에 흩어져 있는 섬들)의 많은 왕과 족장은 불교를 좋아하여, 선행을 해야한다는 믿음이 강했다고 기록했다.
인도에서의 불교의 전반적 상황을 다루면서 북인도 지역과 동남아시아 불교에 대해서 언급했다. 북인도와 수마트라 자바는 부파불교(대중부, 상좌부, 설일체유부, 정량부의 4대 부파)를 다루고, 중국과 말레이 반도(스리비자야 왕국)의 불교는 대승불교를 소개라고 소개했다.
측천무후로부터 삼장(三藏)의 호를 하사받았고, 불경 번역에 전념했다.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은 당시의 인도 및 동남아시아 등지의 사정이 상세하여 문화교류사의 귀중한 자료이다.
③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1~741)는 날란다 대학에서 10년 수행했으며, 사자국(스리랑카)과 스리비자야를 경유하여 당 개원(開元) 7년(719) 바다를 건너서 광저우에 도착했다. 장안으로 초빙되어 자은사(慈恩寺)와 천복사(薦福寺)에서 밀교 전법에 전념했다. 금강지의 장기간의 스리비자야 체류가 주목된다.
미륵보살 상, 9세기, 수마트라 출토
2.77미터 불상, 7~8세기, 팔렘방 출토
④금강지의 제자 불공(不空, Amogha, 705~774)은 싱할라(스리랑카, 사자국) 사람이다. 719년 스리비자야(자바)에서 금강지를 만나 함께 중국으로 들어와 경전을 번역했다. 금강지가 죽은 후 당 조정은 그에게 싱할라에 보낼 국서를 전달했다. 불공은 광저우로 가서 배를 타고 스리비자야를 거쳐, 1년여 만에 싱할라의 아누라다뿌라에 당도했다. 그는 불경 1,200여 권을 수집했으며, 오천축(五天竺)을 두루 방문했다. 그가 수집한 경전의 다수는 밀교 경전이었다. 746년에 장안으로 돌아와 번역을 다시 시작했으며 중국 밀교의 종사(宗師)가 됐다.
⑤신라 승려 혜초(慧超, 704~787)는 719년 광저우에서 금강지를 만나 제자가 되어 밀교를 배웠다. 금강지의 인도구법행을 권유받은 혜초는 인도로 들어갈 때는 해로를, 돌아올 때는 육로를 이용했다. 만 4년 동안(722~727, 인도로 들어가는데 1년, 나오는 데 1년 걸린 것을 빼면 만 4년) 인도를 여행했고, 오늘날의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대를 답사했다. 중국 밀교의 법맥은 금강지→불공→혜초이다. 혜초는 중국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했으며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저술한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폴 페리오가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한 둔황 문서 속에 들어있었다. 책의 앞뒤가 떨어져 나가 누구의 저술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페리오의 연구로 혜초의 저술임이 밝혀졌다. 당시 인도의 풍습이나 불교와 관련된 상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바투타의 [여행기]와 더불어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힌다.
혜초의 구법행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