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바람에 떨어진 소나무 낙엽 사이로 살며시 내려앉은 듯 유난히 푸르름을 자아내는 야생화는 노루발풀이다. 이른 봄에 얼레지가 꽃을 피울 때 노루발풀은 연한 봄볕을 기다리고 있다. 얼레지를 보러 갔는데 덤으로 노루발풀을 보면서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말이 맞은 듯하다. 꽃은 6월에 핀다. 노루발풀은 꽃도 예쁘지만 겨울 내내 자기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기특하다. 이 야생화는 노루라는 이미지가 어느 군데도 닮지 않았는데 왜 노루라는 말을 붙었을까. 겨울 산은 황량하다. 그런데 마른 낙엽들 사이에 이 야생화만이 연한 초록색으로 살아있다. 겨울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노루 식량으로 남았기에 노루의 발밑에 풀이라고. 또 다른 유래는 하얀 눈 위에 찍은 노루의 발자국 같다고 해서 그렇단다. 노루오줌풀도 있는데 잎을 만지면 노루오줌 냄새가 나서 오줌풀이라고 한다. 하늘은 초(草)가 없는 곳에 사람을 태어나지 않게 한다. 땅은 이름이 없는 야생초를 기르지 않는다. 사람과 더불어 이 땅에 실재하는 모든 것들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서 생명의 이름을 달았다. 태어나고 죽는 데에는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사는 동안에서 풀에서 식량을 구하고 단방으로 낫는 약과 장기간 먹을 수 있는 보약도 구했다. 풀은 변화무쌍하다. 세월은 너무 빠르게 흘러 허무하다. 육체는 풀의 꽃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진다. 풀은 짧은 기간에 사람들에게 생로병사가 무엇인 보여주고 있다. 산에 나무들은 내년 봄에 새싹을 틔우기 위해 지금부터 준비한다. 봄에 꽃망울이 별안간 나와 꽃을 피우는 건 아니다. 겨울 내내 아주 작은 꽃망울을 달아놓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하루가 다르게 꽃망울이 굵어지기 시작하면 느닷없이 꽃이 핀다. 이렇게 변해가는 시간이 자연에서 보인다. 풀에서나 나무에서나 삶의 구체성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다. 노루밥풀 주위에 여러 가지의 새소리가 있다. 낙엽들 사이에서 풀빛은 같은 공간이지만 시간은 다를 것이다. 이러한 관계 형성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노루발풀이란 이름은 옛날 사람이 지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현재다. 지난날 얼레지 옆에 노루밥풀이 있었다. 그곳을 다시 찾아본다면 그때와 다를 것이다. 같은 공간일지라도 무엇인가 다르다. 만남이란 늘 새롭다. 순간순간 피어나는 꽃잎처럼 고이 간직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