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인의 비유
"십지가를 의지하고 살면 부자가 되거나 출세를 한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살면 가난할 뿐만 아니라 옥살이도 하고 급기야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한다."
80년대 대학시절에 알고 지내던 선배가 있었는데 그가 검정색으로 물들인 바지에 낡고 새바랜 카키색 잠바를 입고 꾸부정한 얼굴에는 범생이 같은 굵은 검은색 안경테를 쓰고 세상 고민을 다 지고 가는 모습으로 어느 날 교회에 나타났다. 한 2년 만에 만난 그는 더 말라 보였고, 수염은 깍지 않아 초췌한
모습이었다.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알듯말듯한 미소가 있었고 고개를 푹 숙여 기도하는 모습은 너무도 애절해 보였다. 나는 예배가 끝나고 집에 같이 걸어가는 도중에 그에게 물어 보았다.
"아까 예배 시간에 무슨 기도를 했습니까?"
그는 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바짝 마른 바지를 치켜 올려 입고 혁대를 다시 조이면서 말했다.
"배고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지!"
"아니, 형 배고파요?"
난 의아해서 반문하였다.
"그럼, 늘 배고프지."
우린 말없이 걷다가 그가 정적을 깨고 말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형은 밥도 제대로 못먹으면서 한국신학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지난 여름 평소 알고 지내던 한쪽 다리가 짧은 장애인을 가끔 찾아 뵙고 간소하게 도와주며 지내던 어느 날 집에 전화도 안받고 연락이 되지 않아 불길한 마음에 일요일날 교회를 빼먹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산동네 꼭데기에
엄청나게 큰 교회가 있는 담장 밑에 다 쓰러져 가는 초라한 집에 살고 있었다. 교회에서는 아름다운 찬송가 소리가 들렸고, 집에 들어가자 그는 홀로 쓰레기가 가득한 방 한 구석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고열에 시달고 있었다. 아는 사람에게 있는 돈 없는 돈 추려서 세브란스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의사는 가슴 수술을 다시 봉합했다며 얼마 못 살것 같으니 환자를 편하게 하라는 당부를 듣고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쓸쓸하게 혼자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저녁까지 그를 정성껏 간호하였다.
어둠이 지고 달이 뜰 때쯤 그는 가족이 보고 싶다고 불러달라고 말하면서 그 형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도 교회에서는 저녁예배 시간인지라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하며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말은 안했지만 그 교회를 바라보며 몇 번이나 열 팔 조 팔 하면서 팔뚝질을 했으리라 생각되었다.
나 같아도 그렇게 했을거니까!
병도 병이지만 병세가 더욱 악화된 것은 굶주림, 그의 집에는 쌀도 없고 냉장고는 전기마저 끊겨 그마저 있던 음식물이 곰팡이 피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겨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살았다고 무덤덤하게 말하였다.
헤어질 때쯤 숨을 크게 들이 마시더니 나보고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자기네 집에 오라고 하였다.
"왜요. 형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글쎄. 와 보면 알아 임마."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길래 내가 집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더니 그도 미안한지 "그냥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그래!"
"우리 아버지 생신이거든"
오래전 그 형의 집에 몇 번 가본적은 있으나 형의 부모님을 본적은 없었다.
교동 산 중턱에 올라 몇 구비 돌고 돌아 다세대 주택 안쪽 후미진 방에 형의 좁고 허름한 책상에 여러 책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이불은 아랫목에 늘 깔려 있었다.
기대되는 금요일 저녁!
내 통밥으로 아버님 환갑이라 추측하였고 잔치 음식을 먹을 요량으로 부푼 마음 가득 안고 한걸음에 형네 집으로 달려갔다.
불고기, 갈비찜, 수육, 잡채, 온갖 떡과 나물을 상상하며 형의 방에 들어서자 형의 누님이 상을 받들고 들어오셨다. 주변을 둘러봐도 손님이라곤 달랑 나 혼자 뿐, 열린 방 문 너머로 아버님은 누워 계셨고 어머님은 눈 감은 채로 나의 인사를 받으시며
오는데 고생했다며 밥 먹으라고 권하셨다.
밥상 위에는 콩나물, 어묵볶음, 김치, 멸치볶음, 돼지고기를 넣은 두부찌게 그리고 된장국이 놓여 있었다. 순간 멍해졌고 에이 그래도 밥 먹다보면 고기라도 나오겠지 생각하며 깔작대며 밥을 먹고 있는데 형이 한마디 하였다.
"야 임마! 형네 집에 왔으면 밥이라도 팍팍 먹어!"
"우리 아버지 생신인데....."
후에 알게 되었지만 아버님은 다리를 저는 상이용사로 대부분 병환으로 누워 계셨고 어머님은 6.25 때 큰 누님을 낳고 먹을 것이 부족해서 영양실조로 앞을 못보는 맹인이었다.
형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그늘진 모습 보다는 늘 밝고 맑은 얼굴이었기에 그동안 집안 사정을 잘 몰랐었다.
식사 후에 아버님에 관한 얘기를 들려 주었다.
장애를 가졌지만 다섯 자녀와 사촌형제 둘까지 일곱을 먹이고 가르치셨다고 한다.
아버님은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는 분이지만 신앙인은 아니라고 하였다.
형이 어릴적에 새 양복에 새 구두를 신고 처음으로 동네 뒤에 있는 운교동 성당에 가신 날 누가 아버지의 새 구두를 신고 가는 바람에 슬리퍼를 신고 집으로 돌아온 날 '예수 믿는 도둑놈들' 이라며 그 다음부터는 성당을 비롯해 어디도 가시지 않으셨다.
그 후에 형은 장애 부모님을 모시고 어렵게 살면서 겨우겨우 한신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성공회 신부가 되어 1994년 빈민가에 들어가서 [섬김의 집]을 설립하고 노숙인과 행려병자, 알콜 중독자, 늙고 병든 성매매 여성 등 어찌해 볼 수 없는 갈 곳 없는 이들과 한 집에 살면서 그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1997년 IMF 사태로 거리에 실업자가 넘칠 때는 실업자를 위한 밥집을 시작했고 [함께 걷는 길벗회] 라는 비영리 법인을 설립하고 발달 장애인 돌봄 사업을 법적으로 제도화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지금도 인천에서 노인과 노숙인을 위한 제물포 밥집을 운영하고 있다. 언젠가 밥 기도를 한적이 있는데 여기
제물포 밥집에 걸린 기도문이었다.
밥 기도
한 방울의 물에도 온 宇宙가 녹아 있고
한 톨의 낱알에도 森羅萬象이 담겨져 있나니
이 음식을 먹고 마실 때마다
하늘의 恩惠가 담겨있음을 알게 하소서.
이 음식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어머니인 大地와 아버지인 太陽,
하늘과 바람과 비와 兄弟인 農夫의 땀을
기억하게 하소서.
이 飮食으로 만들어진 내 肉身도
다른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이 음식이 내 몸이 되었다가 大地에 뿌려져
다른 生命을 키워내는 거름이 되게 하소서.
성공회 신부가 된 형은 교회에서 나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하고 사회적 약자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의 복지를 위해 30년 넘게 봉사하였다.
몇 년 전에 형을 만났을 때 신학대학에서 신부가 된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는 한참 후에 입을 떼고는 '선한 사마리안 인의 비유'를 말하면서 누가 옳은 사람이냐고 되물었다.
그 후에 형이 성공회 신부가 되겠다고 성 프란시스 수도원에 입소하기 전에 어머님을 찾아뵙고 말씀드렸더니 평생 배우지 못하고 사신 분이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얘야! 십자가를 의지하고 살면 부자가 되거나 출세를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살면 가난하다. 옥살이도 하고 급기야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한다."
"너는 기왕에 성공회 신부가 되려면 네 십자가를 지고 가난한 이웃을 섬겨라."
같은 교회를 다녔지만 그 형은 '예수 믿는 도둑놈들'의 소굴에 다시 들어가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 반평생 가까이 거리의 이웃과 가난한 자를 섬기며 살았고, 나는 십자가에 의지하며 잘 사는 놈들 꼴 보기 싫어서 교회를 나왔었다. 근데 이제와서 그 선배의 용기와 헌신하는 모습을 보며 느낀 것은 '나는 내 십자가를 질 용기가 없어서 교회에서 도망나왔다'고 솔찍하게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