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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3년 동안 사역했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를 밀레노에 불러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에베소에서 마게도냐와 헬라 순방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에 들러서 갈 수도 있는데, 바울은 밀레노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초청해서 작별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마게도냐와 그리스 지역의 교회에서 예루살렘의 기근으로 인한 구제헌금을 모금해서 가는 중이었습니다. 빨리 기근을 당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밀레노에까지 바울을 만나러 온 에베소 장로들에게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18)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에베소에서 사역을 했는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여러분이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지 여러분이 다 보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바울의 고별 인사를 보면서 참 두렵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지난 30년 동안 나는 어떻게 주님과 교회를 섬겼는가를 돌아볼 때에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넘어서 새로운 도전입니다. 바울의 사역 자세를 보면서 내 자신의 못난 모습을 비추어 보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시니 이것이 은혜요 감사로 받아드립니다.
19절에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여기에 세 가지의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들은 바울이 어떻게 주를 섬겼는지, 그 자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역자로써의 바울의 섬김 자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나 선교사 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모델과 같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주님을 섬겼습니까?
겸손입니다.
그냥 ‘겸손’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겸손’이란? 이러한 부분에 대한 겸손이나 저런 부분에 대한 겸손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 있어서 겸손입니다. 그러니 ‘온전한 겸손’ ‘완전한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서 겸손의 자세를 일관성 있게 추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겸손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는 가끔씩 겸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슬그머니 우리 속에 자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래도 겸손한 사람이라는 교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겸손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우리 인간은 교만에 빠져든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게 되는 시발점이 무엇입니까? 사탄이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교만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합니까? 교만의 시작이요 극치입니다. 바로 이런 조상의 후예인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온전한 겸손의 모범으로 섬길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1) 바로 종의 자세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영어로 ‘serve’입니다. 이것은 종 ‘servant’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종이 되지 않고서는 섬길 수가 없습니다. 종의 자리에 설 때에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로마 역사에 보면, 로마제국의 통치에 순응하는 나라의 백성에게는 시민권을 주어서 로마제국의 시민으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제국의 통치에 반기를 들면 군대를 동원해서 점령을 하고 반기를 든 군인이나 귀족들을 사로잡아서는 노예로 팔거나 부려 먹였습니다. 그러니 종은 가장 비참한 대우를 받으면서 가장 잔인하게 학대를 받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행복한 노예, 자진해서 스스로 종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된 나 바울은”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서 종이 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만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는 철저하게 종의 자리를 서기를 원했습니다.
종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은 철저히 주인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주인의 생각을 헤아려서 그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바울의 태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어떻게 했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1-8)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라고 권면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실제적인 예로써 말씀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바로 성부 하나님의 뜻, 세상을 구원코자 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종의 형체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상황 가운데서 그가 모든 겸손으로 섬길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종의 형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모시고, 그를 따르고, 그분을 믿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2)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모든 것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겸손이 아니라 쉽게 교만해지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철저하게 모시지 않으면 우리는 슬그머니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에게 편지하기를 “형제들아 …..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6-7)라고 묻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교만해 집니까? 겸손해지지 못하고 교만해지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욱 자랑할 만한 것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바울은 묻습니다. 성도들아,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가 소유한 재물조차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건강과 시간과 여건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잠깐이라도 놓치면 우리는 마치 내가 잘해서 가진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만해 집니다.
교회 다니는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십일조를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귀합니다. 이민생활에 반듯한살림살이에 힘듭니다. 그 중에서 수입의 10분의 1일을 십일조 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참으로 귀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고백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은근히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일조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물질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요.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여건과 믿음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그저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교만하지 않기를 말하면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로마서 11장 35-36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라고 영광을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런 영광의 고백이 있기에 그는 말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3) 물질로 인하여 탈선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게 했습니다.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자기 생명조차도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께로 받은 생명이기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주의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종의 정신, 주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끝까지 겸손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3) 온전한 겸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간직할 때에 가능합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죽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을 세우는 작업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자신의 비참한 참상을 알아갑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얼마나 죄악 되는 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참상을 파악할 때에 자신이 비참해지고, 정말 절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참상을 발견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겸손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제단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강한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죄악 됨을 봅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정하게 하시고 선지자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겸손한 사역자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우리 교회 부흥의 나라 청년들은 매일묵상을 합니다. 청년이 무엇을 자기를 성결케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 가까이 나아가는 말씀 묵상으로 합니다. 이때에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길 때에 그의 사역은 달랐습니다. 20절에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했습니다.
겸손한 바울이 성도들을 가르칠 때에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단어가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유익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가르치고 전하였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교만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겸손한 목사라 하면 말소리도 조용하고, 항상 웃고, 절대 꾸짖지도 않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겸손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제일 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바로 거리낌 없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사람 의식하지 않고, 환경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가감 없이, 어떤 때는 엄하게, 어떤 때는 솔직하게, 꺼리지 않고 말한다는 것은 목사로서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했습니다. 사람이나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오해가 되고, 상처가 되어도 꺼리지 않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가르치는 사역을 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겸손과는 다르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시종일관 겸손한 태도로 섬겼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젊은 사람들에게 권면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니라”(벧전 5:5)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은 띠입니다. 띠는 그 사람의 인품을 마지막으로 매듭지어 주는 장신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믿음이 좋고, 성경 지식이 탁월하고, 남을 잘 가르치고, 모든 면에서 능력이 있고, 은사가 있다 할지라도 겸손이 없으면 마치 좋은 옷을 입고도 허리띠를 매지 아니한 사람과 똑같습니다. 나중에 망신을 당하고 곤란한 상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어떤 제자가 찾아와서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성도가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겸손이다” “두 번째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이다” “선생님, 그러면 세 번째는요?” “세 번째도 성도가 지녀야 할 덕목은 겸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로 와서 배우라.” 그렇습니다.주님께로 나아가면 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가까이 하다 보면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러면 겸손를 배우고 겸손한 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겸손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