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를 세 번씩이나 울린 우리 아들
솔향 남상선/수필가
내가 결혼해서 3년이 돼도 아내는 태기가 없었다. 처가와 우리 집 양가 어른들께서는 처음 2년까지는 내색을 안 하시더니 3년째부터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아기 갖는 데 좋다는 약을 비롯해서 온갖 정성을 다 쏟는 거였다. 그 때는 장모님께서 생존 해 계셨을 때이다. 장모님은 얼마나 지극 정성이었는지 외손주 빨리 보게 해 달라고 절의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4년째 되는 해에도 희소식은 없었다. 그러더니 5년째 가서야 7년 대한 가문 날에 단비처럼 희소식이 우리의 것이 됐다.
아내의 출산예정일이 잡혔다. 아내의 잦아드는 진통 끝에
아기가 <응애!> 하고 태어났다. 단말마 같은 고통을 토해 내던 아내가 기진맥진한 소리로
“우리 아기 아들이요? 딸이요?”
“아들입니다. 축하합니다.”
하는 순간 아내와 나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엄마 아빠가 됐다는 기쁨에 좋아서 눈물을 글썽이는 거였다. 이것이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 아비를 첫 번째 울린 것이다.
“당신 수고했어요.”
하며 손을 꼭 잡아주는 남편의 체온에 아내는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회생의 빛이 감돌았다.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 아기가 5년 만에 태어난 것이다. 못 낳을 줄 알았던 아기가 우리부부에게 기다림과 기쁨의 선물로 안기게 된 것이다. 친구들의 카톡 방에 ‛남상선 농장지경(弄璋之慶)’이란 말로‘아들 낳은 경사’라 해서 축하 해 주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벌써 47년 전의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비를 두 번째 울린 아들 얘기다.
입시 상담을 한다고 아들 학교에서 학부모 내교통지서가 왔다. 나도 고3 담임 하면서 학생들 입시지도용 대학별 배치점수표를 작성했다. 만든 배치표로 아들이 갈 학교를 가늠해 보았다. 아들이 1차 희망하는 대학은 서울대 경영, 경제과를 생각하고 있었는 데, 아들 점수로 넉넉하지는 않았다. 지원해볼 수는 있는데, 안전권에 들지는 못했다. 그럴 바에야 서울대를 포기하고 안전권 연세대 상경 계열로 마음을 굳히고 담임선생님 을 찾아뵈었다.
그날 교정 교실 벽에는 모의고사 성적순으로 합격자 방을 써 붙이듯 붙여놓은 것이 보였다. 학부형들이 수군거리는데 <저분들이 바로 전교 1등인 남영민 부모님이시래.> 해서 바라보니 아들 이름이 문과 1위로 방에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주변에선 우리 부 부를 부러움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거였다. 아들 덕분에 갑자기 유명 배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기분이었다. 생각의 차가 커서 담임선생님과의 의견 조율이 어려웠다. 명색이 전교 1등짜리를 서울대 지원을 포기하고 타 대학으로 보낸다면 3학년 담임 못한다고 하소연하 는 거였다. 그 바람에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서울사대 국어교육과를 지원하게 되었다.
원서내고 마음을 졸이는 날이 며칠 지났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날이 박두했다. 아내와 나는 식탁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아내가 조바심이 됐던지 ARS로 서울대 합격자 조회를 했다. 잠시 후에 <우리 영민이 합격했어요.> 했다. 우리 부부는 너무나 기뻐서 밥 먹다가 만감이 교차하는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서울대 합격 통지서를 받아왔다. 아들 데리 고 담임 선생님 댁으로 갔다. 담임선생님 앞에다 서울대 합격증을 펴놓고 큰절을 시켰다. 담임선생님께서 너무 좋아하셨다.
아들이 음수사원(陰水思源)하는 마음으로 근원을 잊지 않고 살게 하기 위해 선산에 데리고 갔다. 조상님들 산소 앞의 상석위에다 서울대 합격증을 놓고 큰절을 시켰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조 상님들 음덕으로 제 아들 남영민이 서울대를 입학하게 됐습니다.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 했다.
아비를 울린 아들의 3번째 이야기다.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못했을 때는 시간이 지난 뒤에 바로 전화를 해주는 딸인데 반응이 없었다. 불길한 생각에 사위한테 전화를 했다. 사위가 전화를 받았다. 딸이 부인병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느라 사위가 연가를 내고 병원에 왔다 갔다 한다는 얘기였다. 딸이 마침 사 위 곁에 있다기에 전화를 바꿔 달라 했다.<왜 그런 큰 일이 있으면 아비 한테 얘기 한 마디 없느냐?> 했더니 아비 걱정할 것 같아 퇴원하고 말씀드리려 했다는 거였다. 역시 시댁 어른들께서도 걱정 하실까봐 시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 네 오빠는 알고 있느냐?> 했더니 알고 있다고 했다. <오빠가 한약까지 한 제 지어줬어요. 오빠가 잘 아는 서울 한방 병원 한의사인데 약을 잘 짓는다 해서 오빠 비상금으로 지은 거래요.> 제 오빠가 동생을 걱정하여 한약을 지어 줬다는 얘기에 순간 울컥하여 울었다.
내 교직생활 할 때 보면 공부 잘하고 머리 좋은 애들은 인성이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또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명문대 들어간 애들이 머리가 좋고 공부는 잘 하지만 바람직한 인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 우리 아들도 그렇게 될까봐 내심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 딸의 얘기를 들어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우리 아들이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여 서울대를 나왔지만 인성도 서울대 감이라는 생각에 너무도 흐뭇하여 제 동생 한약 한 제 지어줬다는 그 말 한 마디에 기쁨의 눈물 을 세 번째 흘렸다.
내 지난 번 아산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도 저희 남매 둘이 상의하여 한 번은 딸이 아비 어렵게 하지 않으려고 연가내고 아비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더니 그 다음 번은 아들이 연가를 내고 아빌 외롭지 않게 버팀목이 돼 주었다. 진료 마치고 고속버스로 내려오려 했더니 아들이 직접 서울서 대전까지 제 아비 한 사람 태우고 승용차를 운전하여 내려왔다. 우리 한국효문화진흥원 5전시관의 ‘ 지게효자 이군익’ 은 지게에다 아버지를 지고 금강산 구경을 시켜 드리더니 우리 아들은 승용차로 이군익 의 지게를 대신하는구나. 내 이제 보니 남매가 서로 위해 주고 우애하며 사람냄새 풍기며 살 수 있을 것 같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비를 세 번씩이나 울린 우리 아들’
장하다 내 아들아!
네가 몸만 서울대를 나온 것이 아니고,
네 따뜻한 가슴도 서울대감이어서 이 아비 또 한 번 울었다..
네 동생을 위하는 백만 불짜리 그 가슴
동포애 인류애가 되도록 불을 지펴주길 바란다.
태어남, 서울대 합격, 네 따뜻한 가슴이 이 아비 세 번씩이나 울렸다.
첫댓글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으니 얼마나 흐뭇하셔요?
선생님의 인품을 꼭 빼어닮은 아드님의 앞길에 축복과 응원을 보냅니다.
선생님의 인성을 닮았으면
아드님께서 상당히 겸손 하실것 같습니다.
머리좋고
전교일등에 서울대합겪.
정말 아드님이 많이 울리셨네요.
그 뜨거운 눈물;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