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재발견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 써라>이진희
1.
“I am pee pee, I am poo poo, I am 방구~ ♬♪.” 다섯 살, 첫째 녀석이 두 살, 둘째에게 가르치는 노래다. “나는 오줌, 나는 똥, 나는 방구”라는 ‘저급한' 노래에 아이를 멈추며 "아들, 동생에게 좋은 것 가르쳐야지" 하고 다그친다. 그러자 의아하다는 듯 아들 녀석이 말한다. "아빠, 내 몸에서 있는 거잖아!" 멍... 잠시 할 말을 잃는다. "그래, 그렇구나. 아빠가 잘못 생각했다. 계속해라” 아들 녀석이 더 신나게 똥, 오줌, 방구를 외친다, 둘째도.
2.
‘똥을 사랑하라’(32). 시인 안도현의 말이다. ‘시적인 것’을 ‘동심’이라 믿는 61년생 ‘연탄 시인’은 따뜻한 시와 동화로 세파에 물든 우리 가슴을 녹여왔다. 동시에 “애인에게 시를 써준 적 있냐”는 질문에 “단 한 번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만큼 시의 ‘엄중성’(24) 을 지켜온 그는 시인을 ‘영혼의 생산자’라고 말한다. 의미 없고, 일상적이며, 소외당하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밝혀 그것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시와 시인은 ‘영혼의 생산자’ 이며, ‘혁명가’이다. 믿음대로 살아온 그의 대표작은 연탄을 소재로 한 ‘너에게 묻는다’, 간장게장 을 소재로 한 ‘스며드는 것’,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 등이 있다.
3.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 써라>는 ‘시적인 것’을 다룬 책이다. 머리글이 참 마음에 든다. “시에 미혹되어 살아온 지 30년이다. 여전히 시는 알 수 없는 물음표이고 도저히 알지 못할 허공의 깊이다. (4)” 정직한 이 고백에서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소크라테스가 비친다. 깊이 있는 고백과 함께 스물여섯 장에 걸쳐 녹여낸 시 창작법과 글쓰기 30년 내공은 목차 만으로도 독자를 한 단계 성장시킨다.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재능을 믿지 말고 자신의 열정을 믿어라’, ‘시마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 결별하라’, ‘감정을 쏟아붓지 말고 감정을 묘사하라’, ‘형용사를 멀리하고 동사를 가까이 하라’, ‘경이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등등. 특히, 각 목차와 어울어지게 선택된 우리말 시들은 더 깊은 이해와 함께 감동과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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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시를 오해하고 살아간다. 이 책은 그 시를 위한 책이다. 누군가는 이 책으로 시를 알게 되고, 누군가는 시를 읽고 쓰게 될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은 시에 대한 오해를 풀어준다. 저자가 제시하는 시론을 따라가 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만한 시에 대한 반감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묘한 호기심이 싹튼다. 나도 그랬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시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먼저, 시는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밤에 쓴 글처럼 감정은 넘쳐나고, 내용은 가볍고, 운율은 상투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오원규 시인을 통해 “시란 개인적인 욕망에서 이루어지는 욕망의 발산 형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나’의 욕망을 억제하고, ‘나’의 욕망 가운데 가치 있는 어떤 경험을 선택하고 객관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남과 다른 세계를 유형화해 보여주는 의도적 행위”라고 반대한다. 그는 “사랑에 대해서 쓰려면 ‘사랑’ 이라는 말을 시에다 쓰지 말아야 한다고, 제목으로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사랑'이라는 말을 아예 잊어버려야 한다고" 훈수한다.(81) 시는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라 정화조이고 감정을 여과하여 비유와 묘사를 통해 사물이 하는 이야기에 자신의 감정은 실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저자는 “내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까발려 드러내면 시가 추해진다." (97) 고 가르친다.
두 번째, 시는 어렵다. 운율, 함축, 상징, 한자어와 보이지 않는 법칙들, 그들만의 언어가 시와 대중을 멀리 떨어지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의 문제라기보다 학교 교육 문제이다. 초등 교육에서는 동시를 통해 감정 과잉을 선사하고 고등 교육에서는 시의 복잡한 이론에 집중하며 이해도 못 하는 한시, 혹은 한자로 가득한 시들을 학생들에게 숙제로 넘겼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시의 본질은 그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시는 가장 친근하고 가까운 것을 대상으로 한다. 이상향을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똥에서 헌신을, 오줌에서 가족의 사랑을 찾아낸다. 흔한 것을 깊이 보고 그 속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 시는 가까이 있어야 한다. 동시에 김수영은 시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데서 새로운 시가 탄생한다고 믿었다. “시인이란 끊임없이 이탈하는 자임을 스스로 보여줌으로써 그 어느 문법에도 갇히지 않는 변화와 갱신의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는 것이다." (192) 그러니 학교에서 배우는 그 많은 시의 법칙은 시대착오다.
세 번째, 시는 쓸모없다. 아니다. 먼저 시는 창의성에 도움을 준다. 아동의 창의성 교육과 ‘시적인 사고’, ‘시적인 상상력’은 별개가 아니며 한 몸이다 (255). 현대창의성연구소 소장 임선하 박사는 창의적 사고를 을 다섯가지로 표현한다. ‘주변의 환경에 대해 예민한 관심’, ‘특정한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 ‘고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시각 자체를 변환 시켜 다양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 ‘기존의 것에서 탈피하여 참신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 그리고 ‘다듬어지지 않은 기존의 아이디어를 보다 치밀한 것을 발전시키는 능력'이다. 이것은 시적인 사고와 유사하다. 그렇다면, 4차산업혁명의 문턱에서 가장 필요한 교육은 ‘시’여야 한다.
또한 시는 혁명적이다. 저자는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써라.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쓰지 말고, 낮은 곳에서 돌아앉아 우는 것에 대해 써라”고 주장한다 (56). “장미와 백합의 우아한 향기에 취하지 말고, 저 들판의 민들레와 제비꽃의 무취에 취하라. 금메달은 목에 건 승리자의 영광보다는 꼴찌로 들어오는 선수의 실패를 경배하라. 성형수술 한 처녀의 얼굴을 경멸하고 주근깨로 뒤덮인 소녀의 얼굴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라.”(57)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소재를 택해 쓰느냐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소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느냐는 것이다.” (59) 따라서 시는 질문의 시작이며 관점의 전환이다. 그래서 시는 일상적인 동시에 혁명적이다. 한국의 군사정권이 이것을 증명했다.
무엇보다 시는 새 힘을 준다. 시의 힘을 실험하고 싶어 아내에게 두 편을 시를 읽게 했다. 시를 읽기 전 아내는 새로운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지쳐있었고, 기가 죽어 있는 상태였다. 두 편의 시는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한 나덕희의 <누에> 와 소녀의 아버지 사랑을 기가 막히게 묘사한 김종삼의 <장편2> 였다. 아내는 두 편의 짦은 시를 읽는 그 2분도 안 되는 시간에 눈시울이 붉어졌고, 위로를 받았고, 새 힘을 얻었다. 어두웠던 얼굴이 밝아졌고 조금전 있었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닌 냥 툴툴 털어버렸다. 시는 힘이 있다. 시는 쓸.모.있.다!
5.
미덕이 가득한 책이지만 그래도 불편한 점을 끄집어 내본다. 내용의 반복과 형식의 무질서이다. 저자가 머리말에 밝힌 것과 같이 '시'를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다. 깔끔하게 정의되면 '시'는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그래서일까 그것에 대한 저자의 설명도 잘 정돈되어 있지 않다. 내용이 중복되거나,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신문에 기고하던 여러 편의 칼럼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은 후 여러 내용들이 어우러져 머리속에 덩어리로 남아있는 느낌이다.
6.
이 책은 시에 대한 책이지만 동시에 읽는 것과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읽고 쓰는 것에 대한 그의 철학은 ‘사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사물과 의미, 사실과 진실, 표출과 절제, 형식과 내용,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그 사이에서 깊은 관심과 관찰을 통해 대상의 이면, 숨겨진 진실을 경험하고, 드러내는 그것이 읽기이고 쓰기이며 그에게는 '시'이다. 어디 시만 그렇겠는가. 이것은 어떤 이에게는 소설로, 또는 영상으로, 말로, 음악으로, 삶으로, 다양한 형태를 띠며 나타난다. 결국 읽기와 쓰기는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대화와 소통의 방법이다.
그의 읽기와 쓰기는 나에게 큰 영감을 준다. 특히 ‘글이란 무엇인가’라는 최근 나의 화두에 힌트를 준다. 끄적이는 연필과 대상 사이에 내가 선다. 때로 대상은 자연이기도, 사람이기도, 감정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서 모두가 보는 것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경험되는 것, 나를 통과된 진실이 종이 위에 그려진다. 글은 내가 하는 행위지만 타자를 바탕으로 하고, 타자 대상으로 하지만 나를 통해 나가기에 나의 것이다. 소통이 일어난다. 나 아닌 다른 것을 경험하고 이해한다. 자연과 소통으로 깨달음을 얻고, 사람과 소통으로 공감과 사랑을 얻는다. 글을 통해 나는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은 나를 이해한다.
<책, 노트, 펜을 사고,>
글을 사려니
말을 건다.
머할라고?
머할라고?
되묻기도 전
물음표가 가득찬다
몇자… 그냥
끄적이려다
그 사이서
우주가 흔들린다.
‘시'란, ‘글’이란 이렇게 사고, 팔고, 먹고, 자고, 싸는 일상에서 시작하여 고찰의 과정을 통해 우주를 흔드는 진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금 글이 나를 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