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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알랭 드 보통 / 김한영옮김 / 은행나무
The Course of Love
제목이 그 책을 대변하는가?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작가든 독자든 제목에 어느 정도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서 무리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원 제목은 "The Course of Love"이고 번역본의 제목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다. 어느 것이 더 책의 내용에 부합하는지는 독자의 몫이다.
나의 첫 직장은 인사동 근처에 있었다. 입사 초기에 사내 식당이 없었으므로 또래의 부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즐비하게 있었던 화랑들을 순례하는 일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었다. 처음에는 의미없이 그림 앞을 지나갔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작품의 이름을 붙이는 게임을 하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용이 제목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제목이 내용을 제목의 틀 안에 가두기도 한다. 번역본의 제목과 원본 제목 모두가 내용과 어울린다. (작가가 프랑스인으로 보이는데 원제는 영어가 아닌 불어일지도 모른다.)
줄거리? 특별하지 않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한다. 두 아이의 부모가 된다. 남자는 의미없는 하룻밤의 외도를 한다. 아이가 커가면서 둘 사이에 애정이 식는 듯하다. 남자는 주변을 정리하고 아내에게 충실하고자 한다. 그러나 연애 시절의 애틋함이 없다. 부부상담소에서 상담을 받는다. 참으로 건강한 남녀가 아닌가? 남자는 여자의 생일에 맞춰 사치스런 하룻 밤을 계획한다. 결혼 16년차의 남자는 이제서야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 보통이 쓴 보통의 남녀가 연인에서 부부가 되고 가정을 꾸리고 겪는 이야기이다. 영어 제목처럼 사랑의 코스를 그린 이야기이다. 그리고 제목처럼 낭만적 연애를 하던 남나가 겪은 연애 이후의 삶을 그렸다.
아랑 드 보통의 소설은 한 편 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이다. 역시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한 눈에 반해서 사랑을 나누고 한 순간 돌아서는 잠깐 요란하게 끓는 냄비같은 남녀의 사랑을 다루면서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온통 철학 용어로 도배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책이다. 간단한 이야기에 철학을 덧칠해서 남녀의 행동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사랑과 욕망을 구별하기 힘들게 만든 작품(?)이라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번 소설도 구성 방식에 있어 비슷하다. 이번에는 철학이 아닌 "심리학"으로 바라보는 각도를 바꾸었다고 해야 할까? 심리학적 요소를 많이 다룬 우리 작가 김형경씨가 떠오른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작품에서, 이야기 내에 심리학적 요소를 직접 언급을 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래서 소설과 심리 에세이가 한 권의 책에 함께 공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주장하는 바를 대부분 수용한다, 특히 결혼이라는 부분에 대해 그렇다. 결혼은 진정한 연인의 삶의 시작이다. 그리고 사랑을 지켜내기 위한 남녀의 끊임없는 노력들, 특히 오래 참음으로 남녀의 사랑을 완성시키며 둘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의 작업장인 것이다,
낭만 浪漫
1.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적 상태
2. 또는 그런 심리 상태로 인한 감미로운 분위기
낭만적 浪漫的
1. 현실적이지 않고 신비적이며 공상적인 것
2. 현실적이지 않고 신비적이며 공상적인
3. 또는 감동적이며 달콤한 분위기가 있는 것
낭만주의 浪漫主義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며 정서, 감정, 개성 등을 중요시하는 예술 사조
낭만, 낭만적인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벗어난, 책임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낭만 앞에서는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성이 없다. 사랑이라는 것도 결혼이라는 것도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 소설 첫 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 책의 주제, 또는 작가의 주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 문장을 보자!
16. 한때 그가 낭만이라고 보았던 것 - 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혼의 짝에 대한 믿음-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 The Art of Loving은 사랑의 기슬이라고 번역된다. Art은 흔히 예술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 또한 기술이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도 기술이다. 그런 의미로서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 역시 감성의 영역이 아닌 기술의 영역으로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까지 부부로 동행하는 남녀의 삶은 모든 것이 부단한 노력의 결과요, 러브스토리인 것이다.
18. 뚜렷한 파국이나 큰 행복 없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되는 관계가 사랑의 진척에 관한 이야기로서 마땅히 대접받지 못하고 여전히 러브스토리 밖에 머무는 것은 흥미롭고도 걱정스러운 일이다.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라비와 커스틴이라는 각각의 개체에서 부부, 하나로 불리운다. 지금까지는 결혼에 대한 신비한 감정 또는 비현실적인 공상의 그것으로 결혼을 꿈꿔왔던 즉, 낭만적인 삶을 살았다면 결혼 후로는 현실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둘만의 좁은 공강에서 넓은 공간으로, 둘만의 관계에서 더 많은 타인과의 관계로 범위가 넓어진다. 서로의 관계를 위해 감추었던 것은 드러나고 서로에게 해가 되었던 것들은 사라진다. 그런 현실은 어떤 것일까....
71. 새 아파트로 이사하고 몇 주가 지난 후, 라비와 커스틴은 유리잔 몇 개를 구입하기 위해 교외에 있는 대형 이케아 매장으로 간다.
87. 토라짐은 사랑의 기묘한 선물 중 하나다.
146. 성숙함이란 낭만적 사랑이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찾기를,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를 추구하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춘 것이어서, 편협하고 다소 인색한 감정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아이가 생기고 또 다른 사랑을 학습한다. 학습에는 언제나 반대 급부가 있는 법. 서로의 관계에 위험이 깃들기 시작한다. 순수한 사랑은 둘만의 것일까? 우리는 남녀간의 사랑을 다룰때 타인이 끼어드는 것을 금기시 한다. 부부에게 있어 자식은 둘만의 시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를 갖게 되면 부부의 사랑은 언제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다루지 않았지만 나는 말할 수 있다, 둘만의 순수한 사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 사람은 결코 단 한 사람의 인격으로 이 지구상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부모 형제의 자식이고 형제이며 한 사람의 주변이 그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을 사랑함과 동시에 그와 얽혀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를 간과한 사랑은, 아이를 갖게 되면서 사랑의 정의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가 생기고, 그 시간은 양자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준다. 사랑의 여정에서는 피하지 못할 필수 코스이지 않을까?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긍정의 면도 있다.
147.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150. 아이는 어른에게 사랑의 다른 측면을 가르쳐준다. 진정한 사랑은 까다롭고 불쾌한 행동의 이면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 무언가를 최대한 관대하게 해석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는 점이다.
160. 아이는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64. 한두 명의 어른에게 끝없이, 터무니없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누려본 적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빽빽하게 얽힌 삶의 문제를 풀어나갈 만큼 강해지길 바랄 수 없다.
190. 그들이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된 나머지 이제는 자의식과 책임감이 주는 억제감 없이 사랑을 나눌 내적 자유를 이따금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징후다.
회사에서 일을 배울때 (많은 것을 회사에서 배웠다) 이런 싸이클을 배운 적이 있다. Plan-Do-See, 계획하고 실행하고 살펴보고, 그결과로 다시 계획하고 실행하고 살펴보는 순환을 하는 일에 적용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아이들이 생기고 서로를 관심있게 돌아볼 여유가 조금씩 사라질때, 사랑의 여정을 돌아볼때, 대부분의 사람은 신비하고 공상적인 사랑을 즐겼던 그때를 그려본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분석해본다. 이유는 언제나 그렇듯이 밖에서 찾을 것이고, 이유는 언제나 상대에게 있다고 착각한다. 상대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나에게는 관심이 없어, 나를 무시해라는 착각들. 그런 후에, 해결책으로 다시 낭만적 연애를 희망할 수 있다.
194.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 기대하는 것은 고통의 평등이다.
234. 분별있는 사람은 모두 집으로 향하지만,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밤은 격정, 흥미, 불장난을 약속한다.
237. 결혼: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238. 베를린에서 그를 이끈 것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새롭지만 제한적으로 진입해 결혼 생활의 문제를 회피해보겠다는 갑작스러운 바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깨닫게 되었듯이, 그런 희망은 허튼 감상에 불과했고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패배와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잔인한 것이었다.
242. 외도의 여파로 라비는 결혼 생활의 목적을 다르게 보게 된다. 젊었을 때 그는 결혼 생활을 감정(애정, 욕구, 열정, 갈망 등)에 대한 축성(축성)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못지않게 하나의 제도로서도 중요하게 인식한다.
잠시 외도를 경험한 그의 결혼관이 바뀐다.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다는 증거이고 자신을 사랑한 결과이다. 그가 생각한 결혼이라는 제도는 어떤 것일까? 결혼은 서로가 느끼는 뜨거운 감정을 어떤 틀, 즉 제도 속에서 안전하게 관리하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결혼을 하지 않고 연애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 감정을 지켜 갈 수 있는 장치가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아니 굳이 그것을 지켜 나갈 이유가 없는 것을 아닐까? 어떤 경우는 언제든 깰 수 있기 때문에 더 매력적인것은 아닐까? 언제나 가슴 설래임을 간직하고서.... 지금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성인 사회에서 주요 제도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제도 안으로의 진입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다수가 되었을때, 그 다수는 과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제도가 형성되어 그들을 그 틀에 넣지는 않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270. 이 세상에 항상 나쁘기만 한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스스로도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적절헌 대응은 냉소나 공격이 아니라, 드문 순간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사랑해주는 것뿐이다.
277. 결혼한 지는 16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좀 늦게 라비는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역설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결혼이 단지 그 이수 과정에 등록한 사람에게만 중요한 수업을 해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준비는 예식에 선행하기보다는 대게 10~20년 후에야 갖춰지는 것이 일상이다.
280.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283. '제짝'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는 사랑의 결과물이지 전제 조건은 아니다.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개념은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진정 연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결과 상대를 위해 아름다운 말을 하고, 상대를 위해 공부하고, 상대를 위해 내 몸을 내어주고, 오래 참고, 온유하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진리를 함께 기뻐하며 사랑을 나눌때, 진정한 사랑이 구현되는 것이리라. 정리하고 보니 딱! 아이를 위한 부모의 마음이 사랑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그렇지 않은 부모도 있다는 뉴스가 간혹 들린다. 슬프다. (2017년 8월 5일 평상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