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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상징하는 4.3의 상징 동백꽃 뱃지를 가슴에 달았습니다. 엊그제 5.18 38주년 광주 민주화 항쟁의 날을 맞이하며
제주의 4.3도 보듬고 안고가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전라남도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희망의 땅끝 해남을 고향으로 삼고, 제주에서 40여년을 살아온 저로서는 이제 제주가
제2의 고향이며, 제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4.3사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4·3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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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 다랑쉬굴 학살 현장 재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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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송요찬 유재흥 김익렬 조병옥 박진경 | 김달삼 † 이덕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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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 |||||||
미군 국방경비대 제주경찰 서북청년단 | 남조선로동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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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3000여명 | 남조선로동당원 500여명 제주도민 지원자 1,000여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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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군인 180여명 경찰 140여명 | 전멸 | ||||||
(민간인) 최대 68,000 여명 |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1][2] 현창용은 1948년 제주시 노형동 자택에서 어머니와 잠을 자다 경찰에 끌려가 인천형무소에서 군사재판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고 박동수는 1949년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서 군인들이 쏘는 총을 피해 달아나다 폭도로 내몰려 인천형무소에 끌려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폭도로 내몰려 경찰에 끌려간 뒤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않은채 일방적으로 유죄를 선고 받고 인천형무소 수감 생존자인 현창용(86), 박동수(85)씨 등 모두 17명이 2017년 3월 28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와 함께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증명할 계획이라고 하면서 행정재판인 '판결의 부존재' 소송도 동시에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4.3 당시 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인은 2530명, 일반 재판 수형인은 1306명이다.[3]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일제강점기남조선로동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반공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후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인민위원회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미군정[4]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여,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여명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하였다. 경찰은 3월 15일부터 파업 관련자 검거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3월 17일4월 10일까지 500명 가량을 검거하였는데 검거자 중 66명의 경찰이 파면되었고 그 자리는 서북청년단 소속으로 충원됨으로써 [5]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7]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공포가 합해져 양 측의 대립은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 제주 4·3 사건은 한국 전쟁[8][9]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이덕구는 6월에 경찰관 발포로 사살되고, 김달삼은 그해 6월말 9월의 해주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제주도를 빠져나가지만 학살은 1953년7월 27일 한국 전쟁이 휴전되고 그후 1954년 9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宋堯讚)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그리고 대대적인 강경 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된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말 그대로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 버린,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이 강경 진압작전은 결국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여 명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劉載興)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 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의 총책인 이덕구(李德九)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비극은 또다시 일어난다. 한국전쟁 내내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학살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었다.[8][10]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예정되면서 당의 존립이 위협받게 되자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남로당제주도지부의 김달삼 등은 남로당[4]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7]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관과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4]
한편 현장에서 경찰관 가족, 민족청년단, 서북청년단 단원 가족, 독립촉성회 당원 가족들이 처형되고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우익세력은 제주도 파르티잔 세력을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에서 열었고, 곧 미군정[11]
처음에는 상호 간에 수십 명이 살해당했지만[4], 이후 4월 28일 9연대 사단장 중령 김익렬이 더이상의 피해를 막고자 남로당 무장대 대장 김달삼[4] 그리고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전투를 72시간 이내에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7][13]
그러나 미군정과 조병옥[4] 5월 1일, 서북청년단[14]
5월 5일제주중학교김익렬 중령은 경찰의 기강문란을 탓하며 제주경찰을 자기의 지휘 하에 달라는 요구를 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은 설명과 증거물이 전부 조작이라며 부인하더니 김익렬김익렬이 조병옥[15][16]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당하고 선관위원들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투표소가 피습을 당하여 기록을 빼앗기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6월 18일 경비대 연대장 박진경이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친 후 문상길 중위(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형집행 1호)등 모 부사관
6월 중순경 김달삼 등은 1948년 9월 해주에서 열리는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벗어났고, 대한민국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남로당과 무관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 명 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4]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오라리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살됨[17] 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당시 제주 계엄군을 맡고 있던 대한민국 해병대 등에게 학살을 당하였고[18],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19]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다.[20]<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만 14,000여명(진압군에 의한 희생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764명 및 기타)에 달한다. (진압작전 중 사망한 군인은 180여명, 사망 경찰관은 140여명이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21] 그 실례로 제주 4·3학살피해자의 증언 중에는 우익청년들에게 어린이에 불과한 아들을 잃었다는 증언이 한겨레신문[22]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민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대한민국 해병대[23][24]
그밖에 재일 한국인들 출신구성을 보면 제주도오사카[25]
한편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국가유공자로 남한 정부의 보훈 대상자가 되었고, 남로당 제주도당 수뇌부였던 김달삼김달삼은 사후 ‘남조선혁명가’의 비문을 받고 평양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는데, 이러한 사실은 2000년 3월 평양을 방문했던 우근민
4.3 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26]
1998년 11월 당시 ‘한라일보’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다.
4.3사건으로 인한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제주4·3평화공원이 세워졌다. 제주4·3평화공원은 2000년 1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제주 평화 공원 조성 사업이 이루어 졌다. 2001년 6월 기본 계획안이 확정되고 2002년 부지 매입 및 실시 설계를 완료한 뒤 2003년 4월 3일 기공식을 가졌다.
201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정부주관행사로 치뤄진다. 기념일의 명칭은 '4.3희생자 추념일' 이다.
제주 4·3학살 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금기시하였다. 이 사건을 다룬 소설인 《순이삼촌》의 경우 책은 금서가 되고 작가 현기영은 중앙정보부
그러나 민주화 이후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은 CNN[27][28]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1월 12일2003년 10월 15일[29]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월간조선과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일부 우익 단체들은 4·3사건을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이 주도하여 인민군이 주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하며 1999년 4·3 특별법에 서명하고, 제주도 방문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한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사과해야 할 당사자는 한반도에 공산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과 이들을 흡수 합병한 북한을 통치하는 조선노동당
전라남도 도화(道花)가 동백(Camellia Japonnica) 예로부터 전남 선비의 벗이요 국내 전남지역(강진,완도, 여수 오동도)에 많은
수림대를 형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동양적인 나무이고 혹한을 이기며 겨울에 꽃을 치우는 동백~
전남의 도목(道木)은 은행나무입니다. 은행나무는 우뚝서는 기상과 유용한 쓰임으로 전통의 상징성을 사랑하기 위함이라네요.
그럼 도조(道鳥)는 무엇일까요? 산비둘기입니다. 비둘기의 특성을 본받고 자연사랑의 상징적인 새로 서로 아끼고 보호하는데
의미를 둔다고 합니다.
끝으로 도어(道漁)는 참 돔입니다. 긴 수명과 힘찬 기상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담고 있지요.
재 제주 호남향우회원 모두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재 제주시 호남향우회 카페 운영자 김상곤 드림
http://cafe.daum.net/oceanjeju 제주시 호남 향우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