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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판 스크랩 감동이 있는 명품 주례사
해암 추천 0 조회 345 17.10.16 05: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두 사람은 오늘 이 순간부터 덕 보겠다는 생각 버려라" 

 

감동이 있는 명품 주례사 

 

 

“부부는 남이다.

남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다….

비밀의 방을 가져라. 그 안에 자기 나름의 삶이 있다.

결혼 했다고 버리지 말고 함께 가꿔 나가라 ….”

박노해 시인이 2002년 가수 윤도현씨의 결혼식에서 얘기했던 주례사 중 일부다. 결혼 후 윤씨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의 결혼식 주례사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박씨의 주례사는 부부가 하나임을 강조하는 상투적인 주례사와는 다르다.

무턱대고 좋은 얘기만 늘어놓은 비평을 꼬집을 때 '주례사 비평'이란 말을 쓴다. 주례사에 상투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빗댄 것이다. 흔히 주례사 하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평생 지켜주겠는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겠는가?’를 떠올린다.

그런 주례사는 감동도 없고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결혼 정보회사 선우가 최근 5년 사이 결혼한 부부 202명에게 물어본 결과 주례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49%)이 기억하는 사람(42%)에 비해 더 많았다. 경황이 없기도 하고,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주례사는 한 번 읽혀지고 사라진다. 결혼식 이후에 다시 언급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신랑ㆍ신부, 하객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오래도록 기억하는 주례사가 있다. 조영호(56ㆍ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부인 이재남(56)씨와 함께 주례를 선다. 부부는 2005년 이후 지금까지 34번의 주례를 섰다.

혼인서약은 남편이, 성혼 선언문은 부인이 읽는다. 주례사는 한 단락씩 나누어 한다. 조 교수는"결혼식은 남녀가 함께 꾸미는 것인데 남자 혼자 주례를 보는 것보단 남녀가 함께 보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전업주부인 부인이 쑥스러워하고 긴장도 많이 해 힘들었지만 이제는 능숙하게 진행한다.

두 사람의 주례사는 독특한 데가 있다. 예비 부부에게 결혼생활을 하면서 지킬 약속을 구체적으로 써오게 한 뒤 식장에서 낭독한다.

서로 싸우더라도 한 이불은 덮고 자겠습니다. 남의 집 남편, 부인과 비교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식이다. 약속을 낭독하고 하객들 앞에서 실천을 다짐받은 후 조 교수 부부의 본격적인 주례가 시작된다.

“여보, 당신은 이 '사랑의 약속'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라며 조 교수가 시작하면 부인은 약속을 하나씩 언급하며 조언을 해 준다. 두 사람이 만담하듯 한 번씩 주고받으며 선배 부부로서의 경험을 얘기한다.

특별한 인연으로 주례를 서는 경우도 있다.

소설가 이윤기(63)씨는 2001년 겨울 8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편지를 받았다. 생면부지의 청년이 주례를 부탁하며 보낸 편지였다. 대학 시절부터 이씨의 작품을 좋아했던 조희봉(41ㆍ강원 상서우체국장)씨는 “독자로서 굉장히 존경하던 분이라서 어릴 때부터 나중에 결혼하면 꼭 주례를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다”며 “하지만 워낙 유명한 분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조씨는 ‘하늘의 문’이란 이씨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하우스만 신부의 결혼식 주례사’를 보고 자신의 주례사도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편지를 보내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나 이윤기인데, 결혼식 날 화천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씨의 전화를 받았다. 이씨는 “주례 같은 걸 매우 싫어하지만 기꺼이 나섰던 이유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젊은 부부를 격려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결혼식 당일 “그대를 위하여 내가 있는 것이지, 나를 위하여 그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윤기 소설 속 주례사를 현실에서 들으며 “책 속에서 사람이 살아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기억했다.


정토회 법륜 스님의 주례 법문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져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주례사는 신혼부부뿐 아니라 결혼생활을 시작한 지 꽤 시간이 지난 부부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는 “두 사람은 오늘 이 순간부터는 덕 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이렇게만 생각하면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고 말한다.

상대방 덕 볼 생각으로 결혼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성직자 아닌 일반인 '연설'은 우리만의 독특한 관행

 

주례사를 통해 본 결혼문화의 변천

 

 

19세기 기산 김준근이 그린 풍속화. 전통혼례를 치르는 모습(왼쪽)과 혼례·첫날밤을 지내고 신부가 신랑 측 집으로 가는 모습이다. 조선시대의 결혼식은 신부 측 집에서 열렸다.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

 

 

혼인(婚姻)에서 혼(婚)은 남자가 장가든다는, 인(姻)은 여자가 시집간다는 의미입니다.

혼례 때 신랑과 신부가 입는 옷은 본래 궁중에 입궐할 때의 복장입니다. 신랑은 흉배에 학 두 마리가 그려진 당상관(정3품), 요즘으로 치면 3급인 국장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옷을 입습니다.

신부는 숙부인(당상관의 부인에게 내려지는 지위)의 예복을 입었고요. 조선시대는 계급사회였어요. 이런 사회에서 혼례 때는 일반인도 당상관·숙부인의 옷을 입을 수 있었다는 건 의미가 큽니다.”

27일 낮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 집’에서는 전통혼례에 대한 작은 세미나가 열렸다. 10여 명의 참석자는 대부분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 주부였다. 이들은 일본과 다른 한국의 결혼문화를 익히고, 나아가 자신들처럼 국제결혼을 하는 커플의 예식에 통역 등 자원봉사활동을 펴려는 뜻에서 세미나를 마련했다.

‘한국의 집’에서 집례를 담당하고 있는 이승관(전 성균관전례연구위원장)씨는 전통혼례에 대한 설명을 ‘6례’로 이어갔다.

6례란 혼담(婚談·신랑 측이 신부 측에 청혼하는 것),

납채(納采·신랑의 사주를 적어 신부의 저고릿감으로 쓰일 비단과 함께 신부 측에 보내는 것),

납기(納期·신부 측에서 혼인 날짜를 정해 신랑 측에 알리는 것),

납폐(納幣·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 예물을 보내는 것),

대례(大禮·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부부가 되는 의식을 올리는 것),

우귀(于歸·신부가 신랑을 따라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를 말한다.


이 중 대례가 요즘 말하는 결혼식이다. 대례는 나무 기러기를 앞세운 신랑이 식장에 들어서는 전안례, 신랑·신부가 서로 절을 올리는 교배례, 서로 술잔을 나누는 합근례 등의 절차로 진행된다.

현대식 결혼에서처럼 주례가 주례사를 들려주는 순서는 없다. 대신 전통혼례에는 집례가 있다.

집례는 행사를 이끄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혼례에서는 행교배례(교배례를 올리겠습니다), 신부선재배(신부가 먼저 절을 두 번 하겠습니다), 신랑답일배(신랑은 한 번 답배를 하겠습니다) 등의 순서를 큰소리로 일러주는 역할이다.

이승관 전 원장은 “결혼식의 주례는 좋은 충고의 말을 해주는 역할이지만, 전통혼례의 집례는 행사를 전반적으로 주관한다”면서 “과거에는 집례를 주로 신부 아버지의 스승이나 (신부 아버지와) 가까운 어른이 맡았다”고 말했다. 과거 전통혼례가 신부 측 집에서 열렸던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설명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을 보내는 것은 물론, 이후 신부는 짧게는 하루에서 사흘, 길게는 여러 달에서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시댁에 살러 가는 것이 흔했다.

유가의 예법을 집대성한 중국의 『주자가례』와는 맞지 않는 풍속이다.

『주자가례』에는 신랑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데려와 혼례를 치르고 곧바로 함께 사는 것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조선 초 조정에서는 『주자가례』처럼 혼례를 치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곤 했지만, 워낙 오래된 풍습이라 바뀌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신부 집에서 대례를 치르고 첫날밤을 보내는 풍속은 조선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얘기다.

이런 혼례 풍속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역시나 개화기에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에 따르면 최초의 신식 결혼식은 1888년 정동교회에서 열렸다. 선교사 아펜젤러의 주례로 한용경과 과부 박씨가 올린 결혼식이다. ‘예배당 결혼’이라고도 불렸던 신식 결혼은 기독교의 전파, 그리고 전통혼례보다 절차가 간소한 점 때문에 널리 퍼졌고 점차 교회만이 아니라 강당·음식점 등 일반시설에서도 열렸다.

신식 결혼에 큰 영향을 미친 서양 기독교 문화권의 결혼식은 지금도 성직자의 주례로 열리는 경우가 많다.

성직자가 아닌 민간인이 주례를 맡아 주례사를 들려주는 경우가 더 많은 우리네와는 좀 다르다. 미국인 그렉 필립스(한국닛산 사장)는 “미국에선 대다수가 교회나 성당에서 목사님·신부님 등 성직자를 모시고 결혼식을 올리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주례 문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목사님이 개인적으로 신랑·신부와 잘 아는 경우에는 그 사이의 관계나 추억을 언급할 수는 있지만 한국의 주례사같은 것은 아니다”라고 전한다. 공공기관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에도 관계자가 형식적인 절차를 진행할 뿐, 주례 말씀을 들려주는 일은 없다는 설명이다. 필립스 사장은 “주례는 출발하는 부부에게는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새길 메시지를 주고, 하객들까지 다함께 축복의 메시지(주례사)를 들음으로써 모두 함께 새 부부를 축복하는 의미의 좋은 문화라고 생각한다”면서 “더불어 하객들도 각자의 결혼생활을 되돌아보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구상을 한 번 더 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가까운 일본도 주례사 문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혼례 세미나에 참석한 일본 여성들은 “주례사에 해당하는 절차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신랑·신부의 가족·친구가 사전에 부탁을 받아 차례로 덕담을 건네기는 하되, 이는 결혼식이 아니라 피로연에서라는 얘기다. 일본의 결혼식은 신사·교회·예식장 등에서 적은 수의 일가친척만 참석한 가운데 비교적 간단하게 열리고, 이후 친구 등까지 참석하는 피로연이 더 성대하게 열리곤 한다.

그 기원이 무엇이든, 결혼식의 주례 문화 역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상황과 결합하면서 지금에 이른 것만은 분명하다. 국회의원이 주례를 서는 모습이 보기 드물어진 것도 이런 예다. 과거 한때 정치인, 그중에도 국회의원은 전국 각지의 결혼식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인기 주례였다. 1970년대 초 의정활동을 시작한 노승환 전 의원은 1만7000여 쌍의 주례를 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의원들의 잦은 주례는 점차 의정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비판을 들었다. 과거 의원 중에는 주말이면 겹치기 주례를, 그것도 7~8쌍이나 서느라고 교통체증을 피해 스쿠터로 이동하는 것이 화제가 된 경우도 있었다. 의원들의 주례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90년대 초 14대 국회에서는 초선의원들이 ‘새로운 정치, 깨끗한 정치’를 다짐하면서 ‘회기 중 주례 안 서기’를 실천항목 중 하나로 내걸기도 했다. 결국 국회의원의 결혼식 주례는 98년 법으로 제동이 걸렸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국회의원·지방의원·지자체장·정당대표 등과 그 배우자가 선거구에서, 또 선거구 바깥이더라도 선거구민과 연고가 있는 경우에 결혼식 주례를 서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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