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은 2천년전 현재 인천지역에 존재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추국(彌鄒國)을 소재로 창작되었습니다. 한때 인천은 비류가 건국한 미추국의 국도(國都)였습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찾고 싶은 마음에서 감히 창작으로 역사를 복원해 봅니다. 끝까지 감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류의 나라
- 여강 최재효 終 한편, 여제와 온조는 십제 등 중신과 추종세력들을 이끌고 욱리하를 건너 황악 아래 위례(慰禮)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라는 이름의 나라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다. 십제라는 국명은 자신을 믿고 따른 열 명의 신하들의 공(功)을 기리는 뜻에서 지은 것이었다. 비류왕과 온조왕이 마한에 각각 나라를 건국한 시기는 *고구려가 건국된 지 19년이 지난 뒤였으며, 주몽왕이 붕어하고 유리 태자가 고구려 제2대 태왕의 자리에 있었다. 사로국은 박혁거세 거서간(居西干)이 붕어하자 그의 아들 남해 차차웅(次次雄)이 다스리고 있었다. 대륙의 한나라에서는 황제의 외척인 왕망(王莽)이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아 나라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왕망은 한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꿈꾸었다.
‘동명왕(東明王)의 묘(廟)를 조성하라.’
온조왕은 하북의 위례로 도읍을 정하고 부여의 조상이며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는 동명왕 고두막(高豆莫)의 사당을 건립하였다. 고두막은 북부여 제5대 단군을 지낸 인물로 부여인에게는 신적인 존재였다. 온조왕의 뿌리는 바로 부여(扶餘)였다. 또한 인척이면서 담력이 큰 을음(乙音)을 우보(右輔)로 삼고 병마(兵馬)의 지휘를 맡겼다. 그런데 하북의 위례 지역은 예상했던 만큼 비옥한 토지가 아니었다. 오곡의 산출이 형편없었다.
* 고구려 : BC 37부터 - AD 668까지 존속 ‘대왕, 소신이 주변 지역을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황악 아래 하북 위례는 국도(國都)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욱리하 건너 남쪽에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고, 상당한 규모의 평지도 있어 도읍지로 삼기에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그곳으로 국도를 옮기면 백가(百家)가 스스로 우리 십제국에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을 받칠 것입니다. 서둘러 도읍지를 그곳으로 옮기시지요.’
풍수(風水)에 상당한 학식이 있는 십제(十濟) 중 한 사람인 마려(馬黎)가 온조왕에게 천도를 권하자 몇몇 대신들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중신들과 백성들은 토질이 척박한 하북 위례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대왕, 마려 대신의 의견이 참으로 합당하옵니다. 황악 아래는 땅이 거칠고 오곡이 잘 여물지 못하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북의 말갈족과 낙랑국이 수시로 쳐들어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속히 도읍지를 하남의 위례 지역으로 천도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오간(烏干) 대신이 마려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밖에도 곽충(郭忠)과 한세기(韓世奇) 등 대부분의 십제들이 하남 위례로의 천도(遷都)를 찬성하였다. 온조왕과 여제는 대소신료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모자(母子)는 직접 하남의 위례 지역을 방문하여 주변 경관을 둘러보았다. 궁으로 돌아온 모자는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하남 위례로의 천도를 결정하였다. 여제와 온조왕 일행은 욱리하를 건너 하남의 위례 지역에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였다.
온조왕은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새로운 위례에 토성(土城)을 축조하였다. 이로써 말갈이나 낙랑국 등 외적의 빈번한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온조왕은 형 비류왕에게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문후를 묻고 십제국의 특산물을 제공했다. 여제는 하남 위례성에 머물며 십제국의 국정 전반에 관여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온조왕은 여제의 요구는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여제는 비류왕을 생각하며 자주 눈물을 훔치곤 했다.
‘대왕, 형님을 이곳으로 모셔오세요. 형제가 떨어져 각자 나라를 세웠으나 이 어미의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두 나라를 하나의 나라로 합쳐야 합니다. 그 길만이 나라가 번영하고 외적들과 맞설 수 있습니다.’
여제의 바람은 형제가 나라를 합쳐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두 개의 나라를 건설하고 통치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들의 나라를 합치면 얼마든지 마한 54개 소국들을 평정하고 장차 남삼한 전체를 통일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십제국이 나라의 기틀을 잡고 온전한 나라의 기능을 하게 되자 중신 중에는 여제의 정치 간섭을 못마땅해 하는 자들이 있었다. 만약 그녀의 바람대로 미추국과 십제국이 합병될 경우 왕은 당연히 여제의 장자인 비류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되면 자신들의 위치 또한 지금보다 낮아지거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여제가 활발하게 움직일수록 십제국 대소신료들은 불안해했다. 주변국들의 빈번한 침입이 있었지만 온조왕은 직접 철기(鐵騎)를 지휘하여 외침을 막는 등 용맹을 떨쳤다. 하남으로 천도한 후에 십제국의 국력은 날로 신장되었고, 남삼한 전체로 온조왕의 명성이 퍼져나갔다.
‘대왕, 여제(女帝)님께서 속히 미추국과 십제국이 합칠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소신도 여제님의 뜻대로 두 나라가 하나가 되면 막강한 국력을 가질 수 있으며, 빠른 시일 내에 마한 소국들을 모두 정복할 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미추국의 땅은 대부분 소금기가 많아 곡식이 잘 자랄 수 없습니다. 오로지 물고기를 낚거나 염전에 의지해 국가를 경영해야 합니다. 그에 비해 우리 십제국은 해마다 풍년이 들어 오곡이 창고마다 넘쳐나고, 백성들도 함포고복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나이다. 또한, 남삼한 각지에서 우리 십제국으로 이주하는 백성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백성의 수가 이만여 명에 이르니 이대로 몇 년 만 지나면 십제국 백성은 십만여 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백성의 숫자는 곧 국가의 힘을 상징합니다. 세월이 더 지나게 되면 두 나라의 통합이 어려워집니다. 대왕께서 용단을 내려주소서.’
십제 중 한 사람인 해루(解婁)가 소서노의 성지(聖旨)를 비류왕에게 건네며 고개를 조아렸다. 비류왕과 십제들은 고구려와 어하라에 있을 때부터 군신의 관계를 맺었던 사이라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여제의 근신(近臣)이라 모두 십제국의 중신이 되어 온조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미추국은 눈앞의 이익만 보지 않습니다. 우리 미추국은 현재 대륙에 남아 있는 어하라국도 경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어 미추홀에 나라를 세웠지만, 장차 대륙에 거대제국을 세우고 멀리 왜(倭)의 열도까지 복속할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조는 남삼한을 통일하고 나는 장차 대륙과 열도를 정복하여 경영할 것이니, 돌아가거든 어머님께 그리 전해주세요.’
비류의 의지는 확고했다. 건국하자마자 미추국을 아우의 십제국과 합칠 경우 자신의 포부는 포기해야 하고, 예상치 못한 갈등으로 형제간 골육상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단지, 십제국에 비해 백성들이 풍족한 생활을 하지 못할 뿐, 나라 운영 전반은 십제국과 비슷했다. 해루가 십제국으로 돌아와 비류왕의 뜻을 전했다.
‘아, 내 몸에서 나온 형제 사이인데 어쩌면 그리 다를까? 비류가 아직도 이 어미의 깊은 속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여제는 이전부터 비류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들이 자신의 간곡한 심정을 외면하는 게 서운했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어찌하면 형제들을 화합시킬 수 있을까에 골몰했다. 그녀는 수하 몇 명을 대동한 채 미추국을 방문했다.
‘소자, 어머님을 뵙습니다.’
여제가 미추국으로 온다는 전갈을 받은 비류왕은 신하들과 십리 밖까지 영접을 나갔다. 그녀의 존재는 십제국과 미추국에서 절대적이었다. 아버지 연타발과 졸본부여를 운영하고, 고주몽과 고구려를 건국한 이력이 있는 여제는 불세출의 여걸(女傑)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류의 고구려 태자 책봉이 허사가 되자 옛 고조선 지역으로 진출하여 어하라국을 세우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남삼한 중심지역으로 진출하여 고구려 못지않은 대제국의 건설을 갈망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신의 뜻을 잘 따르던 비류왕이 해양제국 건설의 고집을 꺾지 않고 있어 그녀의 속을 태웠다.
‘대왕, 나는 대왕의 어미입니다. 형제가 작은 나라 하나씩 꿰차고 앉아 마치 소꿉장난하듯 하니, 이 어미는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습니다. 저승에 계신 대왕의 아버지도 형제가 힘을 합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계실 겁니다. 더 늦기 전에 이 어미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두 나라를 하나로 합쳐 삼한에서 제일 강한 나라를 만드세요. 그리고 차차 마한과 진한, 변한의 소국들을 모두 정복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면 형제의 명성이 천년만년 후세들에게 전해질 겁니다. 제발 이 어미의 청을 들어주세요.’
여제는 아들에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애면글면했다. 그녀의 조쌀해 보이는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비류왕은 눈만 지그시 감고 있을 뿐 응답이 없었다. 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신들은 우두망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난처한 입장이었다. 천근 바위 같은 침묵이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어머니, 돌아가세요. 소자의 마음은 이미 굳어졌습니다. 우리 부여족이 영원히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남삼한은 온조 아우가 십제국을 잘 다스리고 국력을 신장 시키면 얼마든지 일통(一統)할 수 있습니다. 소자는 장차 대륙에 두고 온 어하라국과 지금의 미추국 그리고 열도까지 아우르는 해양제국을 건설하려 합니다. 비록 시작은 미미하겠지만 언젠가 그 결과는 광대할 것으로 봅니다. 온조 아우는 아우 나름의 길이 있고, 소자는 소자가 갈 길이 따로 있습니다.’
비류왕의 뜻은 확고부동했다. 아무리 여제가 비류에게 진심 어린 말로 형제애를 강조해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녀는 비류왕의 말에 아뜩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여제는 며칠 동안 미추홀에 머물렀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녀가 십제국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 미추국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대로 앉아만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 약한 대왕이 여제님의 뜻을 덜컥 받아들일 경우 우리 미추국은 사라지고 없을 것입니다. 무슨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합니다.’미추국 좌보(左輔) 벼슬을 하고 있는 태천(太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침, 대왕께서 사흘 후에 어하라에 가실 겁니다. 그때 우리가 십제국에 선제공격을 합시다.’
태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부령 최욱(崔旭)이 열을 올렸다. 그는 다혈질로 성미가 매우 급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나 공사(公事)에는 적대감을 드러내며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거 아주 좋은 방책입니다. 그래야 그 늙은이가 우리 미추국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 단단히 십제국 놈들의 버릇을 고쳐놔야 합니다.’
이번에는 우보(右輔)인 성간(成干)이 목소리를 높였다. 미추국의 중신들은 연일 은밀한 장소에 모여 구수회의를 열었다. 비밀리에 회의에 참가한 중신들 대부분은 두 나라가 통합하는 것을 원치 않는 자들이었다. 회의 주요 쟁점은 어떻게 하면 십제국과의 통합을 막느냐, 였다. 온조왕에게 강골의 전사다운 풍모가 있다면, 비류왕은 귀공자 풍모로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고 전략가다운 면이 있었다.
중신들은 미추국을 찾아오는 여제가 반갑지 않았다. 그녀가 자꾸만 찾아올 경우 장자인 비류왕의 마음이 돌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미추국의 국력은 십제국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두 나라가 통합 된다면 미추국은 십제국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뻔했다. 미추국 중신들은 양국이 지금 상태로 각자도생하며 발전하는 길을 모색하려고 했다. 또한 비류왕의 해양제국 건설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지만, 나라가 십제국에 흡수 될 경우 비류왕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고, 자신들의 입지도 사라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미추국 병사들이 우리 십제국 국경을 넘어와 민가를 불태우고 식량을 약탈해 갔다고? 그게 정말이렷다?’
온조왕은 신하들에게 급보를 받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미추국 병사들이 자신의 영토에 들어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여제였다. 그녀는 미추국 병사들이 침입한 욱리하 하류지역을 직접 돌아보았다.
‘아아-, 이 일은 나의 큰아들이 저지르지 않았다. 분명히 비류 모르게 미추국의 일부 신하들이 획책한 망동(妄動)일 것이다. 비류는 아우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일이 점점 꼬여가는구나. 우태님, 어찌해야 합니까? 이렇게 두 나라가 갈등을 겪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나요?’
여제는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초저녁 동녘 하늘에 뜬 보름달 속에 전 남편 우태(優台)가 앉아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지상에서 두 아들이 벌이고 있는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슬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모든 연유는 사실 우태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태가 살아 있었다면 비류와 온조는 지금쯤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며, 고구려는 건국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인생이 어찌 예측이 가능할까? 예견이 가능한 인생은 참 인생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불투명한 미래와 전혀 자신의 앞날을 알 수 없는 내일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설만(褻慢)하게 행동하다가도 정도를 걷게 된다.
‘문을 열어라. 나는 미추국왕의 어미다.’
‘대왕님은 지금 어하라에 가셨습니다. 반년이 지나야 돌아오십니다. 외부인은 그 누구든 절대로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여제께서는 어서 돌아가십시오.’
미추국의 궁궐이 있는 학봉 산성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다. 이 석성(石城)은 비류왕이 미추국 개국을 선포하면서 축조한 산성으로 무척 견고했다. 산성을 지키는 수비대장이 여제의 앞을 막아섰다. 여제는 기가 막혔다. 군사들이 자신을 몰라보는 것도 아닌데, 감히 왕의 생모 앞을 가로 막아선 것이다.
‘이놈들, 내가 누군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죄송합니다. 저희는 대왕의 명령 이외에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여제님, 제발 십제국으로 돌아가십시오.’
야살스럽지만 늙은 수비대장의 의지는 너무나 확고하여 여제는 차마 악다구니를 할 수도 없었다. 군졸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하찮게 보이는 것을 그녀는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이놈들, 너희들이 나를 능멸하는구나. 너희들은 나중에 오늘 일로 인하여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니라.’
그녀가 돌아가자 학봉 산성은 깊은 잠에 빠져든 듯 조용했다. 무심한 산새들만 이리 저리 날며 마음 급한 여제를 전송했다. 아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서는 여제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하남 위례성으로 돌아온 여제는 수시로 동명제의 사당에 들어 제(祭)를 올리고, 지난날의 이력을 회상하는 것을 낙(樂)으로 삼으며 무료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도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는 온조왕은 일상이 변해버린 여제에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어머니, 형님은 곧 어머니 품으로 돌아올 겁니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미추국의 백성들이 남부여대하고 십제국의 경계를 넘고 있습니다. 소자는 국경을 수비하는 군사들에게 십제국으로 넘어오는 미추국의 유민(流民)들을 최대한 친절하게 대할 것이며, 그들이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가 필요하면 방을 내주라고 했습니다.’
온조왕은 여제를 안심시켰다. 온조왕은 형 비류왕의 어하라 출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척후(斥候)를 운용하는 군부의 고위 인사들은 비류의 행방을 알고는 있었지만 형제의 우의를 감안하여 차마 온조왕에게 말 할 수 없었다. 비류왕의 어하라국 출타가 당초 예상했던 것 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비류왕은 미추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제는 매달 미추국에 전령을 보내 비류왕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반년이 넘도록 비류왕으로부터 일자무식(一字無息)이다 보니 여제의 조급증은 극에 달했다. 또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여제는 급보를 받았다.
‘내 아들, 나의 큰 아들 비류가 죽을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다고? 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냐? 미추국의 왕이며 나의 장자인 비류는 지금 어하라에 나가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죽을병에 걸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여제에게 보고하는 신하나, 보고를 듣는 여제나 미추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믿고 싶지 않았다. 여제는 누군가 장난을 하기 위하여 퍼트린 소문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온종일 큰 아들 비류왕의 무사(無事)를 빌고 또 빌었다. 다음날 여제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미추국으로 향했다.
“앞으로 우리 미추국의 운명은 어찌되는 것입니까?”“대왕이 아직 살아 계십니다. 원기를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대왕의 병색으로 보아 다시 일어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만약 대왕이 붕어하시면 중신 중에서 덕이 있는 연장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덕은 나이에 상관없습니다. 먼저 왕이 될 후보 두세 명을 뽑고 모든 대소신료들이 그 중 한 분을 선택하도록 합시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입니다. 백성들의 뜻도 물어봐야 합니다.”“대왕이 붕어하면 십제국과 합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안 됩니다. 지난번 우리 군사들이 십제국 국경을 넘은 사건을 잊으셨습니까? 우리 미추국이 십제국과 통합할 경우 여제와 온조왕은 그때 일로 우리 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어하라에서 돌아온 비류왕이 중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미추국 중신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장 비류왕이 붕어하고 나면 나라를 이끌 인물이 없었다. 그는 생전에 자식을 보지 못했다. 왕의 후사(後嗣)가 정해지지 않은 나라의 장래는 불안했다. 중신들이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 보아도 결말이 없었다. 한 중신이 나라를 십제국과 합치자는 의견을 내놨지만 설왕설래로 끝났을 뿐이었다.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비류왕이 앙상한 손을 여제에게 내밀었다. 하얀 살갗에 푸른 실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여제는 아들의 손을 꼭 쥐었다. 아들의 손에서 온기 대신 한기(寒氣)가 전해졌다.
“대왕, 힘을 내세요. 칠칠한 대왕이 어하라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병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만사(萬事)를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랍니다. 이 어미도 이리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자식이 먼저 간다는 말은 온당하지 않답니다. 이제 어미는 대왕을 탓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부여족의 영원성을 추구하려는 대왕을 단지 한 어미의 아들로만 생각하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대왕, 어서 병석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세요.”
여제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참척(慘慽)의 슬픔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하라국의 백성들은 어머니와 우리 형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자가 뜻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우에게 꼭 대륙과 열도(列島)를 개척해야 한다고 전해주세요. 한(漢)나라 일부와 열도의 왜국은 옛날 조상들이 건국한 배달국(倍達國)과 단군조선의 나라였습니다. 소자는 고토를 수복하지 못하고 이렇게 꺼져가는 것이 안타깝고 억울합니다. 어머니와 아우가 소자의 바람을 성취해 주세요. 천년이 지나거나 혹은 만년이 흘러도 그 두 지역의 영토는 반드시 현재 배달 백성들이나 후손들이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배달민족은 주변 오랑캐들에게 두고두고 시달리게 될 것이며, 천추의 한을 품게 될 것입니다. 소자가 몸을 돌보지 않고 영토 확장을 위해 동분서주하다 병이 찾아 온 줄도 몰랐습니다. 어머니, 불초 소자가 먼저 가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못난 아들을 용서하소서.” * 참척 -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 보다 먼저 죽는 일
간신히 말을 잇던 비류왕은 두세 번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여제는 비류왕을 끌어안고 울부짖으며, 몸부림 쳤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우태를 전장에서 잃고 이번에는 큰 아들의 죽음을 맞아야 하는 그녀의 속은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대왕, 대왕, 그 바람은 대왕이 일어나 북벌남정하면서 이룩해야 합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이리 가면 안 됩니다. 대왕, 대왕…….”여제의 통곡소리에 비류대왕이 가늘게 눈을 뜨고 어렵게 입을 떼었다.
“어-머-니-, 죄-송-합…….”“대왕, 대왕,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어의(御醫)가 비류왕의 맥을 집어보았다. 가늘게 뛰던 맥박이 곧 멈추고 말았다. 미추홀에 미추국을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류왕은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여제는 큰 아들을 잃은 충격과 슬픔으로 식음을 전폐한 채 매일 대성통곡하였다. 불혹의 나이도 넘기지 못한 채 비류왕은 세상을 버렸다. 그가 여제의 아들이 아니고 여염(閭閻)의 아들이었다면 천수를 누렸을 것이었다. 비류왕이 붕어하자 중신 들은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다. 당장 자신들의 운명이 오리무중에 들었기에 난국을 헤쳐 나갈 방책을 세워야 했다.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로 모여 들었다.
“좌보 어른, 이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병부령 최욱이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이 참에 그냥 십제국과 통합하는 게 좋겠습니다. 온조왕은 형님 나라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실 것입니다. 모두가 고구려와 어하라국을 거쳐 함께 미추홀에 이주한 부여백성들 아닙니까?”좌보 태천은 남의 이야기를 하듯 했다.
“우리들이 사주하여 십제국 국경을 넘어 일으킨 소요사태를 온조왕이 어찌할지 걱정입니다. 우리 모두 공모자 아닙니까?”병부령 최욱이 인상을 써가며 한마디 했다.
“그 일은 병부령이 지시해서 벌어진 일 아닙니까?”태천의 말에 순간 회의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자신은 그 일에 책임이 없다는 태천의 말은 바로 중신들을 두 패로 갈라놓았다.
“속히 의견을 모아 결론을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미추국 대소신료와 백성들에게도 나라의 운명에 대하여 공지해야 합니다.”우보 성간이 양측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당장 결론을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사들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병부령 최욱의 말에 일순간 중신들은 다시 긴장하였다. 병부령이 회의장을 뛰쳐나가 군사를 동원한다면 전쟁이 날 판이었다.
“지금 가장 좋은 방안은 우리 미추국과 십제국이 통합하는 것입니다. 주저하고 있다가 말갈이나 낙랑국 등이 침범해오면 속수무책입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야 합니다.”성간이 다시 양측의 눈치를 보며 중재에 나섰다.
“옳습니다. 그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안입니다. 내가 여제께 말씀드려 우리 미추국의 지난 과오에 대하여는 일체 묻지 않는 조건을 제시하고 나라의 통합을 타진해보겠습니다.”
태천이 중신들을 안심시키며 협상안을 내놓았다. 중신들의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십제국과의 통합을 강력히 반대하던 중신들도 나라의 정체성을 살리고 백성들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십제국과 통합을 택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장시간 진행되던 비밀회의는 십제국과 통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병부령 최욱을 위시한 일부 중신들이 끝까지 반대했지만, 그들에게 지금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형님의 붕어 소식을 전해들은 온조왕도 급히 미추국을 찾았다.
“형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벌써 세상을 뜨시다니요? 우리 형제가 동부여를 떠나 졸본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어하라국을 거쳐 이곳 마한까지 오는 험난한 천로역정을 용케도 잘 헤쳐 왔습니다. 형님께서는 이제 좀 살만해지니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이 아우에게는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 부러진 느낌입니다. 형님께서 그동안 어하라국에 갔다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아우가 형님의 유지를 받들어 대륙의 어하라국을 잘 아우르고 왜(倭) 열도까지 경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아우가 못하면 제 후손이 반드시 그리할 것입니다.”
미추국의 대소신료들과 백성들은 비류왕의 붕어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나라를 건국하고 백성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며 배달민족의 부흥과 미추국의 중흥을 위해 불철주야 힘을 쏟던 비류왕이었다. 그의 죽음은 곧 미추국의 몰락을 의미했다. 여제와 온조왕은 미추국 중신들과 의논한 끝에 학봉 북쪽 기슭 양지바른 곳에 비류왕의 능침(陵寢)을 마련했다. 비류왕의 인산날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백성들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온조왕은 형님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나서 미추국 대신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미추국 중신들과 백성들은 대왕의 탁월한 영도력에 감화되어 십제국에 의탁하고자 합니다. 모든 미추국 백성들의 중론이오니, 부디 뿌리치지 마소서.”“여러 중신들의 소중한 의견을 수렴하겠습니다.”
미추국은 십제국에 흡수 통일되었다. 그 과정에 여제는 강력한 영도력을 발휘하였다. 미추국의 병부령 최욱이 군사를 일으켰지만, 여제가 이끄는 특공대에 의해 궤멸되었다. 두 나라가 통일되면서 미추국과 대륙의 어하라국의 중신들과 백성들이 대거 십제국으로 이주하였다. 온조왕은 그들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百濟)라고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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