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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밖은 온통 구름 천지에 이슬비가 내린다.
오전에 일선교에 있는 의구총과 산동에 있는 의우총을 찾기로 하였다.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안동 수물민들이 일선교 부근 냉산 자락에 터를 잡아 새로 마을을 일구고는
그 땅이 도개 땅인데도불구하고 도개보다 해평이 낫다고 민원을 넣어 소속을 해평면으로 바꾸었다.
고을로 치면 해평이 들이 넓고 인구도 더 많으며 더 부유하기 때문에 해평을 선호한 것이렸다.
그래서 그 마을은 지금 행정구역상으로 해평면 일선리로 되어 있지만 나는 아직도 일선교가 있는 그 부근이
도개 땅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 마을앞으로 25번 구 국도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마을 저만치 앞 응달진 도로 귀퉁이에 의구총이라는 돌비석이 하나 기우뚱하게 서 있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옛날 그 비가 서 있던 비포장길 도로변은 고추밭이 되어 있고 지금 그 의구총은 그보다 조금 더 해평쪽으로 내려가서
도로옆에 거대한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의구총은 넓게 잔디밭을 만들고 돌계단으로 층을 쌓아 올렸으며 봉분을 올리고
그 봉분 뒤에는 개에 얽힌 이야기를 네 장의 돌에 새겨서 둘러놓았다.
이 정도면 이름도 없이 사라져가는 숱한 인간들보다 훨씬 더 고귀한 삶이 아닌가?
그런데 원래 도로 옆에 서 있던 것은 저 의구(義狗)라는 비석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1993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비가 있던 그 곳도 사실은 원래의 자리가 아니라 1952년에 도로를 내면서 옮긴 것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원래의 자리는 구 도로가 있었던 그 어디 쯤으로 강과 더 가까운 위치일 것이다.
따라서 위치상으로는 지금보다 더 강에 가까운 곳이어서 전설에 신빙성을 더 한다.
개에 관련된 설화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넓게 분포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 그것이 기록된 것은 고려 말부터인데
주로 <보한집>이나 <동야휘집>, <청구야담> 등에 실려 있다.
중국의 경우는 우리보다 이미 1,000년이나 앞서서 개에 대한 이런 기록이 있다고 하니
아마도 우리나 일본 쪽의 기록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 기록들은 대체로 '의로운 개'에 대한 것들이다.
이 때 '의롭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본 결과이다.
주인에게 충성을 다 하고 죽은 개들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이로 미루어 개를 통해서 인간들의 배은망덕함을 교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죽은 개들은 전부 다 의로운 개, 즉 의구(義狗)인 것이다.
인간이 개와 인연을 맺은 역사는 18,000년 전, 빙하시대 말기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가장 오래 된 흔적은 북유럽에서 나타난다고 하며 이스라엘에서는 12,000년 전의 무덤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개와 인간이 함께 한 역사는 짧게 잡아도 2만 년은 될 것 같다.
인간이 수렵채취를 하다가 늑대새끼를 키우고 길들이며 번식을 통해서 지금의 숱하게 많은,
다양한 개들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개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로서 사냥과 전쟁, 또는 애완용으로, 우리의 경우는 식용으로도 이용되어 왔고
또 머리가 명석하고 충성심이 강하므로 다른 동물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개는 특히 충성심이 강해 주인을 잘 따라서 주인을 먼저 해하는 일이 없고(서양의 도사견은 제외),
결국은 주인이 자기를 잡아 먹을 줄을 알면서도 끝까지 섬기고 따른다.
이처럼 개가 가지고 있는 충성심과 의(義)에 빗대어 인간을 경계하고 교훈하자는 의미에서
'개보다 못 한 인간'이란 말까지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개는 주인에게 충성도 하고 나중에는 자기 몸까지 제공하지만
나쁜 인간은 주인을 배반하고 고기도 제공하지 않으니 개보다 몇 배나 못 한 셈이 되는 것이다.
개에 얽힌 이야기들은 유형별로 몇 종류, 구체적으로는 10여 종이 되는데 그 유형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사냥을 나갔다가 주인을 물려는 뱀(또는 호랑이)를 물어서 주인을 구한 내용.
<2> 술취한 주인이 들에서 잠이 들었는데 들불이 나서 개가 몸을 적셔 주인을 구하고 죽은 내용.
<3> 주인이 우물에 빠져 길가는 사람에게 주인을 구하도록 하였는데 그 사람이 개를 사고자 하니
개가 자기를 팔도록 유도하고는 팔려갔다가 다시 주인을 찾아 온 내용.
<4> 개에게 밥을 나누어 준 빈자(貧者)를 개들이 몸으로 따뜻하게 해 주었으나
빈자가 죽어 개들도 슬피 울며 떠나갔다는 내용.
<5> 주인을 죽일려고 하는 하인을 개가 물어서 주인을 구한 내용.
<6> 주인의 친구가 사냥길에 주인을 죽이자 개가 시체를 지키고 나중에 살해자를 찾도록 한다는 내용.
<7> 개가 주인의 고향집에 편지를 전달한 내용.
<8> 사기행각에 걸린 주인이 곤장을 맞게 되자 개가 이를 극구 말려 주인이 용서받도록 한 내용.
등등이다. 대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만한 내용들이다.
수 천리 길을 달려 집을 찾아간 진돗개도 있었고 몇 년이 지나도록 주인을 기다리는 버려진 개도 있으며
죽자고 주인을 보호하는 개도 얼마든지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널리 유포된 것은 <2>번 유형이다.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한 내용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그 분포지는
*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천도4리 개 무덤
*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
* 경기도 장단군 분지내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역치리 역제 방죽
*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매송리 개목이(狗項)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원동산의 오수나무와 의견비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개비골(狗碑洞, 可碑洞)의 개비석
* 전라북도 김제시 김제읍 순동리 의견비와 개 방죽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개 비석
*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 구룡리 신기마을 매개내 의구비
*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양괴리 산정마을 개 무덤과 방죽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개 비석과 의구총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양호리 의구총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1리 최부자네 개 무덤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사동 개좌산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법대리 개고개(狗峴)
* 황해도 송화군 구총(狗塚)
* 평안남도 중화군 양가묘(楊哥墓)
* 평안남도 삼화군 의구총
* 평안남도 자산군 구묘산(狗墓山) 등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매우 넓게 유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중에서 전북 오수리의 내용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고 들었다.
이 의구총에 실린 내용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연향(延香, 현 해쳥 위쪽의 산양)에 노성원(盧聲遠)이라는
우리(郵吏, 지금의 우체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황구(黃狗)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 개는 천성이 유순하고 눈치가 빠르고 민첩하여
사람의 뜻을 잘 꿰뚫어 보았다.
또한 주인의 명령을 잘 따랐으며 한시도 주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노성원이 이웃 마을에 일을 보러 갔다가 술에 잔뜩 취한 채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노성원은 월파정(月波亭)의 북쪽 한길 가에 이르러 말에서 떨어져 정신없이 쓰러져 자고 있었고,
황구는 주인 옆에 앉아 주인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길 옆 숲에서 일어난 들불이 차츰 번져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노성원 가까이로 타들어오고 있었다.
황구는 주인을 깨우기 위해 노성원의 옷을 물어뜯고 얼굴을 핥고 하였으나,
술에 곯아떨어진 노성원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새 불길이 노성원의 옷에 옮겨 붙을 기세였다.
다급해진 황구는 수백 보 떨어진 낙동강까지 달려가서 온 몸에 물을 흠뻑 적시고 와서는
불에 뒹굴어 불을 끄기 시작하였다.
황구는 있는 힘을 다해 수십 번 왕복한 끝에 겨우 불을 껐으나
안타깝게도 온 몸의 털이 심하게 탄 채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아무 것도 모른 채 한참을 푹 자고 난 뒤에 일어난 노성원은
자신의 옆에 몸이 젖고 꼬리가 탄 채 죽어 있는 황구를 발견하였다.
이상하게 여겨 주위를 두루 살펴보니 황구가 불을 껐던 흔적이 있고,
젖은 재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제야 황구가 자신을 구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사정을 알고 깊이 감동하여
추도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후세 사람들이 그 황구를 의롭게 여기고 가엾게 여겼으며,
그 곳을 개무덤터(狗墳坊)라고 하였다. 지나가는 길손들은 모두 황구의 의로움을 이야기하고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을 찬탄하였다고 한다.
1665년(현종 6) 선산부사 안응창(安應昌)이 고을 노인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의구전(義狗傳)'을 지었고,
1745년 박익령(朴益齡)이 화공에게 '의구도(義狗圖)' 4폭을 그리게 하여 첨부하였다.
이 내용이 <일선지>, <선산부읍지>, <선산읍지>, <청구야담>, <파수록>, <한거잡록>,
심상직(沈相直)의 <죽서유고(竹西遺稿)> 등에 전하고 있는데,
개 주인이 김성원(金聲遠) 또는 김성발(金成發)로 바뀌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마을 이름, 개 주인 이름, 구체적 지명,비석 등을 증거로 내세움으로써 전설이 된다. 전설은 설화와 달리 구체적 증거물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개비석이 있던 곳은 일선교 부근인데 나의 외갓집 동네인 산양에서 꽤 먼 그 곳을 이웃 동네라고 한 것도 그러려니와 월파정 북쪽 길가에 쓰러졌다는 것도 형편상 잘 맞지 않는다. 월파정은 낙산에 있던 정자로 알려져 있어서 비석이 있던 곳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다만 이 의구총이 있던 곳이 일선교가 있는 낙동강에서 멀지 않은 강 옆이라 물을 적셔서 불을 끄느라 개가 몇 번이나 왕복해서 뛰어 다니다가 지쳐서 쓰러져 죽을 정도는 된다. 의구총이 있던 곳이라면 월파정 북쪽이라고 하지 않고 그 당시의 지명인 용산진이나 용바우밑이라고 썼을 것이다.
봉분 뒤에는 <의구도> 4폭을 화강암에 확대, 조각하여 봉분 뒤에 세우는 등 일대를 정비하여 의구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봉분은 직경 2m, 높이 1.1m이고, 화강암으로 된 「의구도」의 크기는 가로 6.4m, 세로 0.6m, 너비 0.24m이다.
참고로 이와 유사한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의 의구설화는 고려 후기 최자의 <보한집>에 실려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개인(金盖人)은 거령현(居寧縣, 현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사람이다.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매우 영리했다.
어느 날 김개인이 외출을 하는데 개도 주인을 따라 나섰다.
김개인이 술에 취하여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데, 들불이 일어나 불길이 번져 오고 있었다.
개는 곧 옆에 있는 시냇물에 들어가 몸을 적시어 불 주위를 빙빙 돌면서 풀을 적셨다.
그래서 불길을 막았으나 개는 힘이 빠져서 죽었다.
김개인은 잠에서 깨어나 개의 모양을 보고는 슬프게 여겨 노래를 지어 슬픈 심정을 나타내었다.
김개인은 개의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주고 지팡이를 꽂아서 표시해 두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지팡이는 나무가 되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오수(獒樹)라고 부르게 되었다.
악보 가운데 ‘견분곡(犬墳曲)’이 이것이다.
훗날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칭송하기를,
“사람은 짐승이라 불리는 것 부끄러워하지만/ 공공연히 큰 은혜를 저버린다네/
사람으로서 주인 위해 죽지 않으면/ 어찌 개와 같이 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진양공(晉陽公) 최이(崔怡, ?~1258)가 문객들에게 개의 전기(傳記)를 지어 세상에 전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세상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갚을 줄 알도록 하기 위한 뜻이었다.]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148
2011. 7. 3
머루눈
첫댓글 에혀..... 도개땅에서 유전이나 하나 터졌으면 좋겠다 금맥이 발견 되던지... 싫다고 바꾼놈들 절대 편입금지 시키고...... 쯥
상주에서 야가실(효전이네 집이 있는곳) 거쳐 신평, 원당곡, 다곡동을 거쳐가는 고속도로...그 길 닦을때 유심히 살피봐라..유전, 금덩어리 또는 옛날 유적들이 나올지 모린다.. 오원은 그 쪽에 땅도 많잖아?? ㅋㅋㅋ
우리집 얀이도 저렇게 되려나?
오늘부터 사료를 한술더주어야겠다.......ㅎㅎㅎ
덩치로 봐서 주인을 구하기는 힘들듯...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