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르의 자개상자
탐욕이 가득한 안간, 그들은 말의 운송으로서 유용함을 알아보자 곧 바로 전쟁용 수단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말의 전장용 이용은 기원전 3천 년 경으로 추정한다. 어디에서 전차를 제일 먼저 발견했을까. 사실 어느 곳인지에 대한 이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발굴이 되었다고 그곳이 최초의 곳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4대문명 발상지라고 하는 곳이 제일 유력하지 않을까. BC 3000년 황하 유역의 문명과 BC 3000∼2500년 사이의 인더스강 유역의 문명, BC 3000년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우리는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라고 한다.

4대문명지 중에서 제일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릴 수 밖에 없다 싶은 곳은 단연 메소포타미아다. 나일강처럼 좁고 비옥한 토양이 아닌 넓고 얕은 지형으로 거의 평지를 이루고 있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은 쉽게 침범당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이었을테니까. 이러한 조건 때문 신성한 왕권에 의해 유지되던 이집트와는 다르게 광활한 지역 전체를 단일한 통치 체제로 결속하기위해 통제의 원칙, 즉 함무라비 법전이 등장했을 것이란 생각도 해 본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들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바로 이 말이 적힌 함무라비 법전이다. 이 법전은 기원전 1800년경 함무라비 왕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8피트 높이의 딱딱한 돌기둥에 새겨져 공포되었다. 그로 인해 이 법전은 거의 4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이보다 앞서 수메르 아카드인들도 법률을 갖고 있었는데, 함무라비는 이 모든 것들을 종합 수정하여 세계 최초의 성문법전을 편찬하였던 것이다. 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가 3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지배계층은 사제 및 세속 귀족들, 일반 시민 계층은 상인 및 농민들, 최하위계층은 그 숫자가 급증하고 있던 노예들이었다. 따라서 3가지 형태의 법조문이 각 계층에 다르게 적용되었으며, 동일한 계층 내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법 앞에 평등하였다. 그리고 아주 대표적인 유물인 우르의 자개상자 (The Standard of Ur). 나는 대영제국 박물관에서 이 상자를 반시간 넘게 쳐다보아야만 했다.
이는 분명 수많은 침범과 침략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문물이 교환되고 문명이 꽃폈던 문명의 열매를 고스란히 현세에 증거로 확실히 남겨놓은 인류를 대표할만한 유산이다
.
우르(Ur) 는 수메르와 바벨론 문명중심지이며 아브람의 고향이다. 창세기 11장 에는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로 적혀있다. (창 11:28, 31; 15:7; 느 9:7). 우르, 키쉬 그리고 우룩은 수메르와 바벨론 사람들에게는 문명의 중심부로 유명한 곳이다. 그 중에서도 우르는 종교적인 도시로 중요한 신당들이 있었다. 바벨론 시대에서 BC 6세기까지 그 지역에 큰 지구랏이 세워져 메소포타미아에서 중요한 신전이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우르는 현재 이라크와 근접해 있으며 비옥한 초생달 지역의 동쪽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바그다드의 남동쪽에 위치한 텔 엘- 무카야르(tel el-Muqayyar)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유프라테스강의 항구를 이용하기 쉽게 되어 있다.

갈대아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의 하류 유역 바벨론과 페르시아 만 사이에 끼여 있는 지역에 위치하며 갈대아의 대표적인 성읍이 우르이다. 이 또한 창세기에서 언급을 하고 있다. (창 11:28, 31). BC 1000년경 갈대아인들이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갈대아 우르라고 불리게 되었다. 우르는 산업과 종교의 중심지로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 대단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창 11:28; 느 9:7). 이곳 무덤(BC 2900-25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의 발굴 결과, 당시 문화의 화려한 발전상을 보여 주는 토판, 장신구, 보석 등이 발견되었다.
갈데아의 우르는 바빌론의 제1~제3왕조시대 (B.C. 2700경~B.C.2000경)의 수도로서, 또 수메르 초기왕조시대로부터 신 바빌로니아시대에 이르는 달(月)의 신 난나르를 제사하는 도시로 번영하였다. 신역은 350X200m의 사각형이며 주위는 벽으로 둘러싸이고 그 가운데는 주로 제3왕조시대에 재건된 여러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건물의 하나로 이라크 고고국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닝가르 신전, 에눈마프 신전 등도 있었다.
신전은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종종 수리 개축되었으며 신역의 외측에는 둔기 왕(Dungi, Shulgi)과 부르 신왕(Bur-Sin)의 지하묘지를 만들었고 신역의 북쪽에는 개인저택을 세웠다. 왕묘군에서 출토된 미술작품으로는 조개와 홍옥수 및 라피스 라줄리를 상감한 『우르의 스탠더드(군기[軍旗])』, 금으로 된 황소상의 머리가 있는 류라(竪琴), 앞발을 내밀고 있는 풀밭의 양. 메스 · 칼람 · 두그 왕(Mes-Kalam-Dug)의 금제투구, 금제단검, 금제의 컵, 조개를 상감한 쟁반, 금, 홍옥수, 라피스라줄리 제의 장신구류 등이 있어 초기왕조시대를 대표한다. 우르 제3왕조시대의 것으로는 우르남 왕의 돌비석, 닝가르 여신상의 머리부분이 있다.<미술대사전>
우르는 일찍부터 원격지 무역을 하였고 크게 번영하여, 수메르 지방의 도시국가 중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영국의 C.L. 울리는 '왕가(王家)의 묘지'로 일컬어진 지구에서 약 2천기(基)를 발굴하였으며, 왕묘(王墓)는 그중 16기이다. 모두 지하에 석조로 만들어졌으며, 호화로운 부장품과 다수의 순사자(殉死者)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왕 슈브 아드 묘에는 정교한 금·은세공과 보석을 여기저기 박은 머리장식품·빗·귀걸이·가슴장식품 등을 여왕의 시체에 장식하였고, 28명의 성장(盛裝)한 시녀를 매장하였다.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한 하프, 7현금(七弦琴), 2마리 당나귀가 끄는 썰매, 황금그릇 등 다수가 출토되었다.
또, 메스 카람 두그의 묘에서 출토된 황금단검과 투구, 다른 묘에서 발견된 스탠더드(標幟) 등 모두가 수메르문명의 높은 수준을 나타낸다. '왕묘'는 이전에 이미 파헤쳐졌으나, 죽음의 수갱(竪坑)에서는 6마리 소가 끄는 2대의 수레와 병사·시녀·마부·악사 등 63명의 시체가, 또 죽음의 대수갱에서는 74명의 순사체가 발견되었다. 이는 순장을 말한다. 울리는 이것들을 BC 3200년 이전의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현재는 초기 왕조시대 후반으로 여기며, 왕묘 성격에 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다.
아무튼 이 마법의 요술 상자 같은 유물은 고대도시 우르의 로얄 묘지라 하는 왕족 무덤에서 발굴되었는데 번영한 나라답게 그들의 진 일보한 생활상을 바로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나무상자 쓰임은 무엇이었을까. 놀라운 사실은 학자들은 이것이 악기의 울림통이라는 것이다. 악기의 울림통치고는 너무 아름답고 새긴 기록이 경이롭다.
접착제로 조개껍질과 붉은 석회석, 코발트 색상의 라피스 라즐리를 모자이크 형식으로 붙인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로 치면 영락없는 자개장인데 그 상자에 새겨진 형상은 아주 이념적이다. 한 면은 평화를 말하고 다른 한 면은 전쟁을 의미한다. '전쟁'으로서 전차, 적을 짓밟는 모습, 벌거 벗은 행진과 창.'평화'패널은 동물, 물고기를 묘사 하고 연회의 행렬이 보인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전쟁 패널이다. 전쟁 신에서는 4륜 마차가 보인다. 그런데 인간에게 친숙한 소가 끄는 달구지가 아니다. 자세히 보면 말의 귀가 8개다. 영화 벤허에서 보았듯이 말 네 마리가 끌면 아마 시속 60KM는 족히 달렸을 것이다.
기동력을 갖추고 비포장 들판에서 전투용으로 달려나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차의 견고성, 충격 흡수 장치, 마찰 감소(Bearing), 조향 능력 등이 발달되지 않으면 가다가 순식간 분해되고 말 것이다. 이들은 완벽한 마차를 발명했을 뿐아니라 이미 전쟁에 전차로 사용할 만큼 발달해 있었다. 자세히 파악을 해보자면 마차는 4개의 나무로 만들었으며 덩치가 비교적 큰 편에 속하며 말이나 나귀가 끌도록 한 형태인데 고정 센터 폴은 마차에 말을 제어하지만 형태로 보아 돌 때는 어쩔 수없이 불안정했을 것이다. 외측에 위치한 말 두마리는 하중을 당기는 역할보다는 위치설정에 보다 더 힘을 쓸 수 밖에는 없다. 마차는 땅에 닿을 정도로 낮아 최소 2명 정도 탑승이 가능했으며 전면에 사람은 말을 다루었고 반면 뒤쪽의 사람은 투창을 들고 적을 상대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코 끈은 말의 속도를 콘트롤하고 채찍이나 목청을 높여서는 방향을 제어하였겠지만 멍에는 전 중앙 폴에 달라붙어 유용하여 보이지는 않는다. 최신의 연구 결과에서 견장의 다양성이 존재하였음을 밝혀냈다. 말의 숨 막히는 현상을 막기 위해 목에 건 멍에는 어깨 쪽으로 변형되고 등쪽의 멍에는 가슴쪽으로 이동하는 등의 최적의 형태로 변하는데 청동기 시대는 이런 정도에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투창은 마차에 탑재된 화살통에 집어넣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적이 아주 근접한 위치에 있을 때 효과적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상 적을 깔아 뭉게는 형상을 그려넣은 고대적인 이러한 묘사는 심리적인 효과가 더 강했다. 왕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전위적인 역할이 컸다. 이후 보병의 출현으로 실제 이런 방식은 큰 효과를 갖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육중한 4륜 구동의 마차는 분명히 전쟁터에서는 기동성의 어려움이 크기 때문 경비도 만만하지 않았으며 또한 마부와 말이 훈련을 반복해야 하며 그런 면에서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말 중심의 무기형태는 무장하지 않은 보병에 비해 많은 이점이 있었다. 이를테면 속도 화력(투창의 수는 개인보병보다 훨씬 유리)그리고 방어적인 면에서 유리하다 할 수있다. 이러한 장점은 4륜 구동에서 오는 폐단을 개선하고 보다 좋은 방안을 강구하는데 큰 몫을 했다. 그 결과 기원전 2천 년 경에는 새로운 2륜 구동의 전차가 등장한다. 바로 미타니 왕국의 사람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제 그들을 만나보자.
*************
BC 2200~500년의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주요도시의 특성을 나타내는 종교적 건축 구조물로, 내부를 진흙 벽돌로 채우고 외부를 구운 벽돌로 덮었다. 안에는 방이 없으며 보통 기단은 길이가 각각 50m인 정4각형이거나 세로 40m, 가로 50m의 직4각형이다.
지금까지 약 25개의 지구라트가 발견되었으며 수메르·바빌로니아·아시리아 유적에서 거의 같은 수가 발견되었다. 원상태의 높이만큼 보존되어 있는 지구라트는 하나도 없다. 원래는 밖으로 낸 3개짜리 계단이나 나선형 통로를 통해 올라가도록 했으나 발견된 지구라트 가운데 거의 반수는 올라갈 수 있는 어떤 길도 찾아볼 수 없다. 경사 부분과 테라스를 종종 나무와 관목으로 조경해 바빌론의 공중 정원 같은 구조를 만들었다.
가장 잘 보존된 지구라트는 우르(지금의 탈알무카이야르)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것은 엘람의 초가잠빌에 있는 것으로 길이가 각각 102m인 정4각형 기단에 높이는 24m인데 그것도 원래 높이의 반으로 추정된다. 전설상의 바벨탑은 일반적으로 바빌론에 있는 마르두크 대신전 지구라트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