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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호남신문 2015. 2. 15 무등의 미소 황영준
나는 광주에서 20대에(1963년) 공직생활을 하고 이어서 목회자로 살다가 은퇴했다. 무등의 품에서 청년의 꿈을 꾸었고 그렇게 살다가 고희를 넘겼다. 아련한 추억에 젖는 때가 많다.
연말에 아내가 다니는 빛고을노인합창단 공연이 있어서 동행했다. 장소가 빛고을시민문화관이라는데 내가 모르는 곳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그 위치가 시민회관 자리이다. 수년 전까지 교회들이 모여서 ‘광주시 복음화대성회’를 모였던 곳이다. 그러니까 그 건물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세워서 명칭을 바꾼 것이라 생각했다. 찾아가보니 지상 4층짜리 웅장한 새 건물이다. 출연팀이 공연에 앞서 연습하는 시간에 맞춰 왔으니 공연까지는 1시간 넘게 여유가 있다. 그동안 광주천을 구경하기로 하고 광주공원 앞에서 천변 산책로로 내려갔다. 광주천이 자연친화적으로 정리되었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광주천이 확실히 변했다. 얼굴 찡그리게 냄새나는, 악취가 풍기는 그런 하수도가 아니었다. 넉넉하게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한 가운데로 깊은 도수로를 내고, 좌우로 자전거 길과 산책로를 만들었다. 중간 중간에 정감 있게 징검다리가 놓이고, 하얗게 핀 갈대 아래 물오리가 놀고, 곳곳에 운동기구와 휴식공간이 있다. 자연이 활짝 열린 지붕 없는 공연장도 여럿이다. 눈을 들면 파란 하늘, 좌우로 꽉 들어찬 건물과 아파트 숲, 그 사이에 숨길을 열어주는 생명의 젖줄이 흐른다. 얼마만인가. 광주천을 걷는 것이. 30년? 아니~. 공무원으로 있을 때 광주천 정화를 위한 청소작업에 동원된 것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40년이 넘은 것 같다. 도시발전에 따라 도로가 확장되면서 다리를 넓혀서 다시 놓고, 새로운 다리도 생겼다. 그 위로 운전하고 다니면서도 광주천 변화는 보질 못했었다.
무등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냇물에서 빨래하고, 시골 사람들까지 찾아오는 시장이 서고, 여름이면 미역 감고, 겨울이면 썰매를 탔던 곳. 징검다리나 건축현장의 강철판을 엮어놓은 뽕뽕다리를 건너다녔던 광주천이, 인구가 증가하면서 쓰레기가 쌓이고 폐수가 흐르고 악취가 코를 싸매게 했다. 실개천들은 복개를 해서 도로를 만드니 곳곳이 막혀 물난리가 나고 썩어갔다. 그런 광주천을 생태환경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하수관을 정리하고 환경을 정리해서 증심천이 광주천으로 이어지고 담양천과 황룡강을 만나 영산강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자전거도 지나가고, 좌우 산책로에는 운동복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걷고 있다. 광주대교에서 상류인 지원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폐선이 된 남광주역 철교 아래까지 걷는다. 철도 노선이 바뀌어 남광주역이 폐쇄되었지만 광주천을 건너는 철교 교각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게는 아련한 추억이 있다. 1960년대, 광주전신전화국에 근무할 때 방림동에서 하숙을 했다. 장마가 지나면 맑게 흐르는 철교 밑에 내려가 사람들 틈에 섞여 미역을 감았다. 철교 아래쪽에는 구멍이 동그랗게 뚫린 강철판을 잇대어 임시로 가설한 뽕뽕다리가 있었다. 내 출근길이었다. 사람들이 건널 때면 다리가 출렁거려서 박자를 맞추어 걸었다. 아이들이나 여학생들은 많이 불편해 했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전대병원 앞을 지나 골목골목을 걸어 도청 옆으로 해서 경찰서와 국세청을 지나고 전신전화국이 나왔고, 몇 년 후에는 체신청으로 출근했다. 광주천을 걷노라니 흘러간 과거가 아련한 추억이다.
며칠 후에는 아내와 함께 걸었다. 어려서부터 광주천변 학동에서 살았기 때문에 추억이 새록새록 할 것 같았다. 역시 어린 때를 회상하며 좋아했다. 할머니와 함께 빨래통을 머리에 이고 나와 방림다리 부근에서 빨래를 했단다. 좋은 세탁비누가 없었던 때라 시커먼 비누를 썼는데 말똥비누라 했고, 천변에는 가마솥을 걸어놓고 빨래를 삶아주는 분도 있어서 자갈밭에 빨래를 널어놓고 물놀이를 했었단다. 상류라서 항상 물이 맑고 물고기도 많았다며 추억에 젖는다. 석양빛을 밭은 무등산이 살포시 웃는 것 같다. 그대들도 많이 늙었다며.
흰구름 따라 광주천 따라 자연이 흐른다. 벌겋게 녹슨 철교 아래로 역사가 흐르며 옛 이야기를 속삭인다. 아~ 세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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