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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신앙고백 요14:1-6,20:24-31
우리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늘에 떠있는 해와 달과 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면 이 정도는 한 번쯤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창조하신 것에 대해 기록했으므로 성경을 모르면 나도 모르고 모든 피조물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수 밖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인데 요한복음1장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 성경대로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열두 제자를 택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직업이나 가정환경, 출신 지역에 관계없이 택하셨다. 갈릴리에서도 택하셨고 유대에서도 택하셨으며 어부도 있고 의사도 있고 세리도 있었다. 제자로 삼으시면서 한가지 약속을 하신 것이 있는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과연! 이 제자들이 훗날 저 멀리 이방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 오늘날 세계 어디든지 교회가 세워진 것은 그 제자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을 때에도 순교를 기쁨으로 삼았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후 목매달아 자살하였다. 예수님께서 부른 제자는 열두 명인데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마태와 요한만이 열두 제자에 포함되고 누가와 마가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면 열두제자들 중에서 몇몇 제자들의 특성을 살펴보자.
1. 예수님이 택하셨던 제자들
(1) 큰 야고보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로서 사도 요한의 형이었으며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헤롯에 의해 가장 먼저 순교한 제자이다(행12:2). 헤롯 아그립바가 로마 황제 갈리굴라에 의하여 유대나라 총독이 되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을 때 제일 처음으로 야고보를 순교의 제물로 삼았었다. 야고보에 대한 순교일화는 그가 죽게 되어 끌려 나왔을 때 그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한 사람이 그와 함께 형 집행 장소까지 함께 걸어갔다. 그 사람은 의심없이 야고보의 얼굴이 창백하게 되고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죽음을 앞둔 야고보는 오히려 전쟁을 이긴 승리자처럼 기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크게 놀랐고 죽으러 가는 이 사도가 믿는 예수가 참된 하나님이심에 틀림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서 그 자신도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자처, 야고보와 함께 정죄를 받고 죽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칼로 목 베임을 당하였는데 그 일이 일어난 때는 AD44년이었다.(2) 빌립예수님께서 안드레와 베드로를 제자로 삼은 다음날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만난 사람이 빌립이다. 빌립은 사도행전 8장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주었던 제자로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서 아소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는 이방 나라에 보내졌는데, 특히 아시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견되었다. 그가 히에라볼리에 이르자 그 지방 주민들이 큰 뱀을 예배하는 것을 보았다. 빌립은 그 뱀을 파괴하는데 성공하였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빌립은 베드로와 안드레 마찬가지로 벳새다 출신으로(요1:44) 그는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했을 때 예수님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이라고 전했다(요1:45). 빌립도 복음을 전하다가 특히 미신을 이용하여 많은 돈을 번 제사장들은 그를 투옥시켰고 채찍질을 당한 후 십자가에 못 박혔던 일은 AD 52년 이었다.(3) 마태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눅5:27-28). 세리 마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유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서를 히브리어로 기록 후, 에디오피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도 AD 60년경에 복음을 전하다가 목 베임을 당하였다.
(4) 작은 야고보사도 요한의 형과 구별하기 위하여 작은 야고보라 불렸으며,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약1:1)로 예루살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모든 크리스챤들과 개종자들을 위하여 일반 서신인 야고보서를 써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생활지침서를 통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확증하면서 오류를 막는데 최선을 다하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 때 크리스챤들에게 크게 분개하여 대중을 선동하여 야고보를 돌로 쳐 죽였다.(5) 안드레베드로의 형제였던 안드레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선고를 받았고 그는 좀 더 천천히 죽도록 하기 위하여 못으로 박히지 않고 줄로 꽁꽁 묶이어졌다. 그 사도의 장엄하고 두려워할 줄 모르는 용기에 대해서 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드레는 십자가가 준비된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안색이나 용모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전혀 괴로워하지 않는 가운데 이렇게 외쳤다. 안드레는 삼일 동안 내내 십자가에 달려서 무서운 고통을 당하였으나 시종일관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말하였다. 고통 중에 보이는 그의 태도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기 시작하였다. 그도 마지막 밧줄의 줄이 끊어질때 몸은 땅에 떨어져 죽었다.(6) 베드로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씩이나 부탁받았으며 제자중의 수제자로 초대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초대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헤롯 아그립바가 야고보를 죽이자, 유대인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으나, 베드로는 밤에 천사의 도우심으로 풀려나 계속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베드로는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당시 로마의 황제는 네로였는데, 그는 큰 도시에 불을 지르게 한 후 그 화제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고 그들 가운데 수백 명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도록 명하였을 때 베드로는 머리를 거꾸로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그는 자신이 주님과 똑같은 방법으로 고난을 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고통스러운 자세를 취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7) 도마
도마는 갈릴리 사람으로 성격이 급하지만 용기있는 사람으로 한편 ‘의심많은 도마’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여서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있는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보고서야 부활의 주님을 믿겠다고 하였다. 그는 건축가여서 인도에 가서 왕궁의 건설을 맡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도마복음에 의하면 그는 인도애서 허황옥을 우리나라로 데려와 가야국 김수로왕과 결혼을 시켰다고 전해지므로 우리나라 김수로왕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마는 인도 첸나이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방 제사장들의 분노를 사서 창에 찔려 순교를 당했다.(8) 요한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로 알려진 요한은 한때는 야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예수께서 유다의 왕이 되면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가 에베소에 있을 때 도미시안 황제는 그를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던지라고 명하였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어 밧모 섬으로 유배를 가서 요한 계시록이라는 계시를 전해주고 있다. 그가 기록한 책은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계시록이다. 그는 나이가 많을 때까지 살다 자연사 하였다고 한다.(9) 바돌로매(나다나엘)
순전한 마음을 지닌 사람인 바돌로매는 나다니엘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바돌로매를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런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그도 복음을 전파하다가 온 몸의 피부를 칼로 벗겨지는 형벌을 받아 순교했다.
(10) 가룟유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는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유다가 있었는데 그는 유월절 엿새전 베다니 나사로 집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고자 향유를 발에 부었을 때 이 향유를 허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자였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날은 유월절 하루 전날로 서기관 장로들 대제사장들은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를 하였을 때 가롯유다는 예수를 팔고자 제사장들에게 갔다가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다.
예수님께서 만찬 때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여 넘겨주리라, 하시거늘. 제자들은 그게 나니이까?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는 자니라. 사람의 아들은 기록된 대로 가려니와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면서 가룟유다에게 마지막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만찬장에서 빠져나간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했다.
2. 부활신앙의 지각생 도마의 신앙고백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오셨는데 그 길은 십자가를 지시는 길 이외는 다른 길이 없었다. 제자들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찢긴 빵은 머지않아 찢기실 주님의 몸을 상징했고, 나누어 마신 포도주는 주님이 흘리신 피를 상징하건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울의 눈을 가렸던 비늘이 제자들의 눈도 가리고 있었습니다. 3년이나 주님과 동고동락 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세 번이나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장미빛 미래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정할 것이냐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삶의 종착역이 저만치 보이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미숙한 신앙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티끌에 불과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시편의 말씀이 떠오르다. (시103:13-14) 13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이 주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조를 아시며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시는도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혼돈과 아픔과 절망까지도 끌어안으시지만 쓸쓸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이게 현실입니다. 고난의 태풍 앞에서 시몬의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리지만 베드로는 그 말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그런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때 자신의 결심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그는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18:38).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된다는 것은 철저한 부정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몇시간 후 베드로의 외침은 공허한 외침이 되었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을 때 주님은 이미 그의 약함과 배신까지 품어 안으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이 겪으신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은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히2:18). 베드로처럼 주님앞에서도 자신만만하게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고 하였지만 세 번이나 부인했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때로는 열정이 앞서서 실수도 하였지만 다시 회복되는 제자도 있었으며 도마처럼 모를 때는 모른다고 하면서도 솔직하여 주님의 위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게 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부활신앙의 지각생 도마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기간동안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고 다소 엉뚱한 데가 있었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를 깨우러 갈 것을 말씀하실 때에 다른 제자들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는데,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한 것(요11:16)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한 후에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주여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요14:5)라고 반문하던 제자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주님이 가시는 길을 몰랐을지라도 잠자코 있었지만 도마는 확실히 알고자 주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냐고 되물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가장 위대한 말씀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요14:6) 답변해 주셨던 것을 보면 도마야 말로 조금이라도 이해가 안가면 잠자코 있는 그런 제자가 아니라 확실히 알고자 하는 그런 제자가 바로 디두모라 하는 도마를 의심많은 제자로 알고 있다는 평가는 도마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은 도마만이 아니었습니다.
(1) 처음으로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을지라도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해 불안해서 한 데 모여 있을 때인데 저녁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며 주님께서는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불안 근심 염려가 떠나갔고 이제는 기쁨이 충만케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21).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디론가 사라졌던 도마가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도마를 반갑게 맞이하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빅뉴스를 말했지만 도마의 반응은 전혀 의외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고 합니다. 그래서 도마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의심많은 제자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2) 두 번째로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그런 일이 있은 후 여드레가 지났을 때 모든 제자들은 다시 집안에 모여 문을 굳게 닫고 있을 바로 그 때 주님이 두 번째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20:26-31) 26 여드레가 지나서 그분의 제자들이 다시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더라. 그때에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그 뒤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시니 28 도마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매 2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느냐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두 번째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특히 도마가 더욱 놀라웠던 것은 주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두 손을 내밀어 내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내 옆구리의 창자국에도 손을 넣어 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는 어떻게 여드레 전에 자신이 제자들에게 하였던 말을 마치 예수님이 알고라도 있듯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도마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리고” 신앙을 고백하고 맙니다. 도마의 신앙 고백은 요한복음의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도마의 신앙 고백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요한복음에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 도마의 불신앙과 부활한 주님을 만났을 때의 도마의 위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마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잘 알 수는 없는 것은 성경에서 도마에 관해서는 많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비중 있게 다루어져 있습니다.
(3)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도마어록
1)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11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에서 보면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장 달려가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신 후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간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선생님! 유대인들이 방금도 돌을 들어 치려고 했는데 왜 다시 베다니로 가고자 합니까?’ 하며 말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도마가 불쑥 나서며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며 엉뚱한 소리를 한 것처럼 들립니다. 언제 어디서든 상황인식을 제대로 모르면서 용감하게 들이대었던 모습이 도마의 모습인 것처럼 보지지만 실은 목숨을 아까와 하지 않았던 주님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최고의 진리의 말씀을 얻게 한 도마의 질문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현실에만 마음을 두고 있던 제자들은 그 예비된 나라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14:1-6)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제자들이 지금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데 이 말씀을 이해했을까요? 다른 제자들이 묵묵히 있을 때 도마가 물었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도마는 과감히 그 길을 물었을 때 위대한 대답을 얻어내었습니다. 5 도마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어찌 그 길을 알겠나이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여기서도 다른 제자들은 모르면서도 가만히 있었지만 도마는 말하기를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고 말했기 때문에 위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피조물인 사람이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티끌같은 인생이 메시야를 알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3. 도마신앙고백의 의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도마는 예수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님을 뵙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남겼다. 우리가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볼 때 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충성스럽고 솔직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도마를 두고 의심많은 도마라고 하는데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도마를 찾아오셔서 도마로 하여금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보게 하고 그 입을 통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신앙고백이 나오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일시적으로 살아났다가 다시 죽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으로 산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정말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일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주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마귀의 승리로 끝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마귀는 법적으로 패배당한 것입니다.
(1) 도마의 신앙 고백이 주는 교훈
오늘 도마의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주님이 입으신 부활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육체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인간의 혈육과 동일한 몸으로 부활했다면 문들이 닫힌 곳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계시던 때, 곧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도 물위를 걸으신 것을 보면 그 분은 이 우주의 시공간의 법칙에 매인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특별한 몸을 입으신 것 같습니다. 장차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한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을 입고 영생할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서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이 평강입니다. 이 자리에서 단언하여 드릴 수 있는 말이 있는데 만약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없다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은 아직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무엇인가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뻐하였을까? 주께서 주신 평강이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점령하였을 것입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처음 여드레 동안은 평강을 누릴 수 없었지만 부활한 주님을 본 후에는 그의 위대한 신앙고백과 더불어 평강의 평강을 소유하였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도마는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도마의 이 신앙고백은 자신의 눈앞에 계시는 부활의 주님만이 자신의 주님이며 하나님이라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도마는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부활의 삶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이 평강이 없다면 사실 우리는 아직도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2)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도마의 신앙고백의 비교
주님께서 두 번째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계시므로 우리의 마음과 모든 삶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공을 초월해서 계시는 이 주님 앞에서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마가 직접 못자국과 옆구리를 만져 보았을까요? 제 생각에는 감히 만져 보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못자국과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만져보라고 하신 후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싶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의 신성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마의 이 신앙고백은 요한복음의 클라이막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보통 신앙고백하면 ‘베드로의 신앙고백’만 알고 있었으나 오늘 도마의 신앙고백은 어쩌면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이 바로 이 한 마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저와 여러분도 베드로와 똑 같이 주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죠! 베드로가 분명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성령님의 은혜로 신앙고백 한 것이지 그의 삶을 통한 그런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그가 정말로 깊은 체험을 통해 주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일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에서 만나는 도마의 신앙고백은 위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깊은 인간적 회의와 의심을 거친 다음에 나오게 된 신앙고백입니다. 도마는 매우 신중하고 합리적이며 매우 용기 있는 도마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도마가 신앙고백을 하는 것에도 성령님의 역사는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처음에는 우리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했을 때 그는 이 분이 하나님이심을 진실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으나 나중에는 부인했고, 도마는 주님 살아생전엔 그를 하나님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부활한 주님을 만난 그 순간엔 그의 전 존재를 통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분명히 그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으했으나 도마는 그 분을 주님으로서, 하나님으로서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남은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바치고 순교의 길을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였으므로 제자들을 대표해서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신앙 고백한 것을 요한이 기록한 것은 우리도 도마와 같이 부활의 진리를 터득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도마의 신앙고백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용기를 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느냐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29)”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그 분을 믿는 믿음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보지 못하고 믿는 우리가 참으로 복된 자인 것입니다.
(3) 성경을 기록한 목적
마지막으로 요한은 (30-31)절에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표적들을 행하였으나 성경에 기록한 것은 믿고 생명을 얻는데 꼭 필요한 것만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는 예수께서 죽으신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벌써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나오는 것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미혹을 받을 위험이 있는 때였습니다. 요한이 이 도마의 신앙고백을 기록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예언된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임은 물론이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믿고 그 이름으로 생명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유대 땅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한 사람,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즘 WCC 중심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예수”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사단의 교묘한 속임수에 불과함을 오늘 우리는 도마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들이 입게 될 영광스런 몸이 된다는 것을 믿으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몸은 분명히 살과 뼈가 있으며 음식을 먹기도 하는 육체임은 틀림없으나 또한 시공간의 제한은 받지 않는 신비한 육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궁금해 하는 모든 것을 밝혀주는 책은 아니지만 우리의 구원과 삶에 꼭 필요한 것만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사건과 부활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도마의 신앙고백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으로 한 역사를 살았던 한 인물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해주는 위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1장에 사도요한의 신앙고백을 보면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신 창조의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의 말씀을 실었습니다. 이사야9장6절에서도 밝혔듯이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복음입니다. 우리들도 도마가 고백한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어야 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