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효는 조선을 지탱하는 기본 이념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효행을 장려하고자 발간한 삼강행실도에는 진나라의 효자 왕상이 등장한다. 비록 계모지만 왕상이 병든 어머니를 위해 추운 겨울 잉어를 잡아 봉양한다는 내용이다. 서울 대치동 <한상석 해물집> 주인장 한상석(36) 씨는 맛있는 아귀찜을 병약한 엄마에게 맛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그가 아귀찜 조리법을 익힐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귀찜 조리법 배웠는데 급히 가신 어머니
왕상 이야기는 파급력이 강했다. 잉어는 조선시대 내내 효의 아이콘이 됐다. 장신구나 민화에도 잉어는 인기 소재였다. 민간에는 비슷한 모티브의 잉어설화가 고을마다 생겨났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어렸을 적 우리 부친께서도 조모님의 병구완을 위해 잉어를 구하려고 사방으로 수소문하셨다. 당시 부친은 잉어찜을 해드리면 당신 어머니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실 거라는 믿음이 확고하셨다. 한상석에겐 아귀가 바로 잉어였다.
아들 삼형제를 낳고 기른 그의 모친은 병약했다. 약한 몸으로 기르기 힘들다는 아들을 셋씩이나 키워냈다. “아버지까지 네 명의 남자와 씨름하느라 엄마가 진이 빠졌을 거”라고 한씨는 말한다. 한씨는 20대 시절부터 바텐더로 일했다. 받았던 보수가 크지 않은데다 대부분은 어머니의 약값과 치료비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사실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기억은 별로 없다고. 그래서 아들은 맛있는 음식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엄마께 드리려고 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지속했던 바텐더 생활을 그만두고 나이 서른이 넘어서 한식당 직원으로 들어갔다. 열심히 일하고 배웠다. 하지만 그의 모친은 3년 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네 남자를 남겨둔 채.
질기지도 무르지도 않은 매콤한 아귀찜
한씨는 모친을 위해 배운 솜씨로 식당을 차리기로 맘먹었다. 그 동안 모친 치료비를 대느라 무일푼이어서 다시 몇 년간 식당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한상석 해물집>은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한씨가 금년에 마련한 식당 공간이다. 장사밑천이 넉넉지 않아 좋은 자리는 아니다. 대신 식당에 자기 이름을 걸었다. 하늘의 모친이 실망하지 않을 점포로 키워나갈 생각이다.
이 집 아귀찜의 메뉴 이름은 ‘마산아구찜’이다. 규격은 소, 중, 대 세 가지다. 가격은 각각 3만9000원, 4만9000원, 5만9000원이다. 몇 가지의 반찬과 달콤한 샐러드, 상큼한 샐러드와 함께 한 상 차려낸다.
조리를 전수해준 사부의 소개로 중국산 아귀 가운데 가장 상급 품을 사용한다고. 크기도 큰 것이 맛도 좋아 다소 비싸더라도 큰 것을 구매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살점이 너무 질기거나 무르지 않고 적당한 탄력을 유지한다. 향긋한 미나리 향과 함께 콩나물의 아삭한 식감도 양호하다. 소스의 매운 정도도 과하지 않다.
아귀찜에는 마늘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보통 간 마늘을 구매해서 쓴다. 그런데 이 집은 통마늘을 구입해 직접 갈아서 넣었다. 마늘 향이 한결 순하고 자연스럽다. 아귀찜 맛을 돋워주는 숨은 공신은 미더덕이다. 미더덕 가격이 비싸 미더덕과 비슷한 맛을 내는 오만둥이를 사용하는 집이 많은데 이 집은 미더덕만 쓴다.
낮에는 주로 인근 가정주부들이 모임 장소로 이용하고, 저녁에는 직장인들의 회식 모임이 많다. 아귀찜에는 우리 술인 문배주가 잘 어울린다. 아귀찜을 조금 남겨 양념을 넣고 볶음밥(3000원)으로 먹으면 거뜬한 한 끼 식사가 된다.
꾸덕꾸덕 구운 코다리구이, 매운맛 도피처 해물계란찜
<한상석 해물집>은 다른 아귀찜 집에 비해 곁들이 메뉴가 다양하다. 코다리구이, 해물계란찜, 메밀부추전, 도토리묵, 왕새우튀김(2마리) 등이 있다. 모두 6000원으로 음식의 양과 질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여럿이 아귀찜을 먹으면서 골고루 맛보라는 뜻에서 메뉴를 구성했다. 그런데 아귀찜이나 해물찜 등 메인 메뉴를 주문하면 이 곁들이 메뉴들 가운데 두 가지를 서비스로 제공한다. 물론 두 가지를 고르는 건 손님 몫이다.
이 가운데 코다리구이와 해물계란찜 인가가 높다. 코다리구이는 석쇠에서 꾸덕꾸덕 알맞게 구운 살점을 베어 먹는 맛이 좋다. 코다리 살점이 입 안에 단맛으로 들어와 기분 좋은 매콤함으로 남는다.
해물계란찜은 매콤한 맛의 도피처로 유용하다. 아귀찜의 매운 맛이 그리 자극적이지 않지만 입맛에 따라 맵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한 번씩 해물계란찜으로 매운 맛을 가셔내고 다시 아귀찜을 먹는 게 요령이다. 해물계란찜으로도 매운 맛이 다 가시지 않으면 넉넉하게 나온 두 가지 샐러드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반찬으로 나온 메밀부추전은 꼭 먹어볼 것을 권한다. 메인 메뉴에 딸려 나온 전이나 부침은 질이 낮아 대개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집 메밀부추전은 다르다. 메밀과 부추가 몸에 좋은 식재료일 뿐 아니라 웬만한 튀김보다 훨씬 고소하고 맛있다. 아직도 앳된 얼굴인 주인장 한씨는 식당 사장이 된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엄마가 계시지 않아 가끔 속상하다고. 그러나 엄마 같은 손님들의 칭찬을 들으면 무척 기분이 좋다고 한다.
“인근의 아주머니들께서 아주 많이 찾아오세요. 당연히 엄마 생각이 나지요. 비슷한 연배이시니까요. 그분들이 참 고맙지요. 우리 엄마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아귀찜을 만듭니다.” < 한상석 해물집> 서울 강남구 선릉로86길 44-5, 02-501-5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