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움직이네요. 수술한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병상에 누운 그는 오른발에 힘을 주며 애를 썼다. 하지만 발목 아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리디스크 파열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신경이 눌려 오른 다리에 마비 증상이 왔다. 김병지는 “연말이라 할 일도 많은데 이렇게 있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 18일이었다. 축구 선수인 아들을 직접 차로 경기장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나섰다가 교통 사고가 났다. 상대방 차량의 일방 과실이었다. 큰 사고는 아니어서 보험 처리를 진행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허리가 뻐근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가벼운 여파로 생각했다.
침을 맞으며 한방 치료를 하는 정도로 끝냈다. 20일 K리그 사싱식에 베스트11 골키퍼 부문 시상자로 예정돼 있어 스스로 통증을 누그러트렸다. 시상식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마비 증상이 왔다. 22일 병원을 찾아 MRI 검사를 진행했다. 허리디스크 파열이었다.
1차적으로 주사 치료를 시도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28일 수술대에 올랐다. 오전 10시에 수술실로 들어가 오후 2시에 나왔다. 허리디스크치고는 큰 수술이었다. 눌린 신경을 회복시키기 위해 뼈를 상당 부분 깎아냈다. 하루 종일 안정을 취해야 했다. 통증으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수술 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김병지는 여전히 병원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다. 은퇴한지 2년이 됐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로 현역 같은 몸매를 유지했다. 그래도 세월을 이기진 못했다. 10년 전에도 김병지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만 36세에 A대표팀에 복귀해 평가전을 치르다 부상을 입었다. 당시엔 수술을 받고 사흘 만에 일어나 재활을 시작했지만 이번엔 회복이 더디다.
“10년 동안 문제가 없었는데 교통 사고가 무섭더군요. 큰 사고가 아니라 방심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습니다. 연말은 병원에서 보내야 할 것 같아요.”
병원 측은 최소 6개월, 길게는 2년 가량의 재활을 예상하고 있다. 정확히는 예상이 불가능하다. 수술 부위는 2개월 정도면 아물지만 신경에 문제가 왔기 때문에 긴 재활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2015시즌을 끝으로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김병지의 정력적인 활동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이사장인 김병지스포츠문화진흥원과 함께 재능기부,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왔다. 각계 각층의 요청으로 강연에 나서며 도전의 연속이었던 인생담을 소개했다.
올해부터는 SPOTV 해설위원을 맡으며 새로운 도전을 했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신태용 A대표팀 감독, 김봉길 23세 이하 대표팀 감독 선임 등의 큰 일을 맡았다. 소아암 환자를 위한 기부캠페인인 슛포러브와 함께 전국을 누비며 친선 경기를 펼치는 지구방위대FC 활동, 아프리카TV의 인기 BJ 감스트와의 합방으로 술담배는 끊어도 드리블은 못 끊는 드리블 성애자 윙병지 아저씨로 통하며 10대들에게 인기를 얻는 특별한 경험도 했다.
가장 애착이 컸던 일은 유소년 축구 발전이었다. 현역 시절부터 김병지축구클럽을 운영하며 구리, 남양주 지역 유소년 축구 발전에 공헌했다. 최근에는 유소년 선수와 생활스포츠 동호인들이 마음 편히 공 찰 수 있는 여건 마련을 위해 롯데마트, 롯데아울렛과 손잡고 전국 각지에 있는 매장 옥상의 유휴공간을 풋살장으로 개조하는 프로젝트에 나섰다.

지도자 자격증도 지난 11월 완비했다. 그가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위해 세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마침표였다. 김병지는 골키퍼 지도자 1급, AFC(아시아축구연맹) 지도자 1급을 보유하고 있다. P라이선스만이 남은 상태지만 현재 자격증으로도 골키퍼 코치와 프로 2부 리그 감독은 수행이 가능하다.
사실 프로 지도자에 대한 욕심은 크지 않다. 자격증을 딴 가장 큰 목적은 아이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김병지는 지난해부터 골키퍼 인스트럭터 활동을 남몰래 이어왔다. 선수 시절 함께 했던 선후배, 동료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내셔널리그 팀까지 팀을 방문해 골키퍼들의 훈련을 도왔다.
골키퍼 교육은 한국 축구에서 가장 열악한 영역이다. 대부분의 학원 팀들은 전문 골키퍼 코치가 없다. 어린 선수들은 중계나 인터넷을 통해 눈대중으로 배운 것을 맨땅 위에서 엉성하게 발휘하고 있다. 다이빙, 캐칭, 스텝 등 기본기가 부족해 운동 능력 하나로 버틴다. 김병지의 체계적인 훈련과 노하우는 많은 도움을 줬다. 요청이 이어지자 올 겨울에도 전국의 동계훈련장을 누비며 인스트럭터 활동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재활과 치료로도 마비 증상이 완치되지 않으면 지도자 생활을 하기는 어렵다. 김병지는 “당장 애들한테 킥을 해 줘야 하는데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가장 행복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좌절은 없다. 축구 선수 김병지는 강력한 목표 의식과 끝 없는 노력으로 환경, 자신의 한계를 넘어왔다. 작은 키로 인해 축구부 활동이 어려워지자 양친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부산 소년의 집 기계공업학교(현 알로이시오 전자기계공고)로 전학을 가 축구부 생활을 이어갔다. 졸업 후 대학 진학이 어려워지자 창원시의 공장에서 일을 하며 낮에는 용접을, 저녁에는 직장인 축구부 활동을 했다.
아마추어 선수임에도 국군체육부대(상무)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며 그의 인생은 새로운 방향으로 갔다. 상무에서 성실한 군생활과 돋보이는 기량으로 호평을 받아 제대 후 울산 현대에 입단했다. 빠른 몸놀림과 선방 능력으로 차범근 당시 울산 감독으로부터 ‘번개’라는 별명을 얻으며 승승장구했다.

1995년에는 국가대표로도 데뷔하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하며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1998년 K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골키퍼로서 최초로 필드 골을 넣었다. 포항 스틸러스, FC서울을 거치며 골키퍼 최초로 K리그 최고 이적료, 연봉을 기록했다.
2008년에는 시련의 시간을 겪었다. 만 37세에 이른 A대표팀 복귀 경기에서 허리 부상을 입었다. 다들 은퇴를 예상했지만 재활을 마친 뒤 2009년 경남FC로 이적하며 제2의 전성기를 썼다. K리그 500경기 출전, 600경기 출전을 넘었다. 2015년 전남 드래곤즈에서 23년 간의 긴 여정을 마치며 그는 706경기 출전의 대기록을 남겼다. 현역인 이동국이 통산 최다 출전 4위인 469경기를 기록 중임을 감안하면 향후 김병지의 대기록을 넘길 이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2017년 김병지는 또 한번의 도전 앞에 섰다. 이전의 것들 이상으로 어려운 도전이다. 그는 “나도, 가족도 일어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김병지답게 이번에도 이겨내야죠”라고 말했다. 그의 입원과 수술 소식이 알려진 뒤 온 무수한 연락 중에는 지난 1년 간 그의 지도를 받았던 전국의 유망주들의 응원 문자도 있었다. 병상에 누운 그를 잠시나마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순간이었다.
이번 도전도 이길 것을 약속한 그는 지난 30년을 지탱해 준 양손을 큼지막하게 펼치며 환하게 웃었다.
“반드시 일어날 겁니다. 이 녀석들을 다시 훈련장에서 만나야 하니까요.”
글=서호정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