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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화해가 먼저다(마5장21-24)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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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서울 청파감리교회)
• 조각난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남북의 교회가 민족화해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바로 어제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환갑을 지나 진갑이 되었는데도 분단현실은 극복되지 않았고 평화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곧 열릴 것 같았던 평화통일의 문은 굳게 잠기고, 평화의 섬 제주에는 해군 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민항기를 향해 총을 쏜 해병대 초병의 모습은 지금 한반도의 긴장이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이러한 때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민족화해를 기원하며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화해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에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인류 역사는 형제간의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 전체는 그런 갈등과 화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첫 사람 가인은 형제 살해자가 되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적자嫡子와 서자庶子 사이의 갈등 때문에 갈라서야 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장자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서로를 적대시했고,
요셉과 형제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고 급기야 형제를 종으로 팔아버리는 악행까지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갈등 이야기만 전하지 않고 화해 이야기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의 장례를 함께 치르며 화해했고, 에서와 야곱도 브니엘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요셉과 형제들도 생의 시련을 거치면서 오랜 갈등을 끝내고 서로를 용납했습니다.
화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핵심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엡2:14)라면서 주님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6).
화해야말로 예수님의 으뜸가는 관심이었다는 말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 가족 교회(Sagrada Familia)에 들렀을 때 저는 수난의 파사드(정면)에 세워진 한 부조물 앞에서 오랫동안 서성거렸습니다. 그것은 기둥에 묶여 있는 채찍질 당하는 예수님의 수척한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었습니다. 수비락(Subirachs)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었는데, 고뇌에 찬 주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조각난 세상으로 인해 아파하시는 주님의 심정이 고스란히 제게 전이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교회 청년 한 분이 그 조각 앞에 서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흐느껴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화해의 반대말은 불화일 겁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담을 쌓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바탕에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멸시가 있습니다.
• 성내지 말라
본문에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담긴 속뜻을 밝혀주고 계십니다.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이 계명을 지킨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것, 그들을 보고 ‘얼간이’ 혹은 ‘바보’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살인에 버금가는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그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누군가를 마음으로부터 배제하거나 무시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가 그런 대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립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가끔 김수영 시인이 1963년에 쓴 시 <罪와 罰>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는 이 시에서 직접 겪었을 법한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의 화자는 비오는 거리에서 우산대로 아내를 때려 쓰러뜨렸습니다. 어린놈은 그 급작스런 사태에 놀라 울었고, 구경거리라도 난 듯 취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음이 찜찜했습니다. 아내를 때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이가 받았을 상처 때문이 아닙니다. 혹시나 아는 사람이 그 광경을 보지나 않았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속물스런 마음의 끝을 보여줍니다. 종이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것이 못내 아까웠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가차 없는 자기 분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도 제 걱정을 하는 게 자기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시인을 보고 파렴치하다거나 비겁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게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형제나 자매를 보고 성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참 어려운 요구이십니다. 살다보면 분노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불의한 일이 자행되고 있는 데도 분노할 줄 모른다면 그는 허깨비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최근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93세의 프랑스인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가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세상, 모두가 돈을 좇아 질주하도록 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에 대해서 분노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불의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인식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불의한 현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면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약은 사람들입니다.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늘 불온한 사람들로 취급당합니다. 현실의 어둠에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대수가 여기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거룩한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세상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금하신 분노는 ‘습관이 된 분노’ 혹은 ‘악의’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허물을 보는 일의 챔피언들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을 빼주겠다며 대드는 자들입니다. 자기 기준에 따라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기준이라는 게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누구이길래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사람”(고전7:23)을 함부로 정죄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남을 무시하는 사람은 말로도 남을 모욕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극단적인 언사를 가급적 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 대목에서는 모질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일깨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웃에게 가하는 모욕은 이웃과의 친교는 물론이고 하나님과의 친교도 가로막습니다. 잠언의 지혜자는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17:5)이라고 말했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들에게 하는 일을 당신에게 하는 일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 화해라는 거룩한 소명
예수님은 성내지 말고, 형제를 모욕하지 말 것을 당부한 후에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23-24)
우리는 이 말씀을 가볍게 받아들이곤 합니다.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제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살다보면 갈등이 없을 수 없지만, 그 갈등은 속히 풀어야 합니다. 시간을 끌수록 관계는 버름해지게 마련입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깃드실 수가 없습니다.
성직자를 나타내는 라틴어 pontifex는 ‘다리를 건설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교황을 일컬어 Pope라고도 하지만 Pontiff라고도 하는데, 그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이 갈라진 것들을 잇는 일임을 보여주는 호칭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부름’ 앞에 선 모든 이들의 과제입니다.
이사야는 굶주린 사람에게 정성을 쏟고,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려고 애쓰고, 억압의 줄을 끌러 주고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사람을 일러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사58:12)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보다 놀라운 찬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그런 화해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자기를 찢는 사람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던 성 가족 성당의 탄생의 파사드 한 가운데에는 돌로 새긴 사이프러스 나무가 서있고, 그 나무 아래에는 날개를 펼친 펠리컨 한 마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곳에 펠리컨이 등장한 것은 중세부터 펠리컨이 성찬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펠리컨은 부리로 자기 가슴을 쪼아 병든 자식에게 피를 먹여 살리는 새라고 여겨졌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을 찢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자기를 찢는 사람만이 화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네가 먼저 변해야 화해가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화해는 불가능합니다. 미움과 질투와 멸시의 마음은 목에 걸린 가시와 같아서 우리 영혼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신앙 공동체 안에 머무는 까닭은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서로를 환대하는 삶이 가능함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한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24) 말은 간단하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요구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애쓸 때 우리 영혼은 커집니다.
• 공존의 모색
개인과 개인 사이에 얽히고설킨 문제를 푸는 것도 어렵지만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갈라진 이들이 화해를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무고하게 피 흘린 이들의 한 맺힌 신음소리가 여전히 가시지 않은 한반도에서는 화해를 말하고 도모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특히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자기 몸을 바치신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 민족화해주일을 맞이하면서 함께 마련한 공동예배문에 나오는 기도 제목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1. 우리의 아픔에 동참하시는 주님께, 서로를 향한 남북의 분노가 사라지고, 대결과 반목이 주님의 평화로 변화되기를 기도합시다. 서로 맺은 화해의 약속을 기억하여 이 땅에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고, 남북이 서로 공생하는 평화를 간구합시다.
2. 남과 북이 서로를 이웃으로 인식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불신과 미움이 자리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통일의 기운이 샘솟아, 북녘의 어린이들이 곧 우리의 아이들임을 고백하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3.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신 주님께 기도합시다. 어려움 가운데 처한 북녘의 동포들이 낙심하지 않고, 인내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국제적 경제제재로 어렵게 열린 개성공단의 문이 닫히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4.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주님께, 64년간의 분단의 광야생활이 종식되고 분단의 아픔과 불이익이 없는 통일조국을 위해 기도합시다. 남과 북의 교회가 더욱 긴밀해지고 통일을 위해 교회가 큰 역할을 감당하도록 기도합시다.
5. 하나 되게 하시는 주님께 기도합시다. 주님의 평화와 사랑으로 남과 북, 사람과 사람들이 겸손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고 섬기는 신앙으로 한겨레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북녘 어린이들의 안타까움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간구합시다.
‘불화’의 세상을 ‘화’의 세상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거룩한 소명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화해와 공존을 모색한다면, 불화의 뿌리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낯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들은 어두운 마음이 빚어낸 우리의 분신들일 뿐입니다. 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자송(自訟)’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잘못된 것을 보면 자기 안에 법정을 차려 놓고 자기와 송사를 벌이라는 것입니다. 자송하는 마음이 없을 때 우리는 타송(他訟)을 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남에게서 찾는다는 말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나의 작음을 알고, 나의 어둠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게 될 것입니다. 6월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아픈 달입니다. 이 6월을 화해의 달로 바꾸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우리의 나날이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예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