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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마가복음 11: 21-25.
제목: 여러분은 나무를 몇 개나 뽑아보셨습니까?
서론.
지금도 산기도 가시면, 둘레가 그렇게 크지 않은 나무를 붙잡고 기도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저도 한때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했습니까? 성경에 그렇게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눅 17장 6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지라 하였을 것이요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아멘.
그래서 이 말씀대로 자기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각자 나무를 붙잡고 기도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키보다 작은 나무를 붙들고 기도하고, 이와는 달리 자기 키보다 큰 나무를 붙들고 기도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 정도 나무 굵기면, 내 믿음으로 기도하면 뿌리째 뽑힐 것 같다고 생각해서 각자의 믿음에 따라 나무를 골라서 밤새도록 기도했던 때가 여러분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때 나무 몇 개나 뽑았습니까? 그렇게 기도했더니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가던가요? 사실, 뽕나무는 땅속에 뿌리가 깊이 박혀 있어서 뿌리째 뽑히는 것은 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를까, 보통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 비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무뿌리가 뽑혀 나갈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전날에 잎사귀 밖에는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대로 마른 것을 본 베드로의 대답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아멘.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실제로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져지라고 기도하신 분 계십니까? 저도 경험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산을 옮기는 믿음, 큰 믿음을 달라고 오래전에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되었을까요?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산을 옮기는 믿음의 은사가 없어서일까요? 의심하지 않고 믿고 기도했는데도 왜 응답이 없을까요? 예수님은 되는데, 사도들은 되는데 우린 예수님과 같은, 사도들과 같은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경험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도 문자 그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당시 교사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비유로 이해해야 합니다. 비유 가운데 과장법을 써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없는 것을 과장해서 거짓말하는 것과 있는 사실을 과장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다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 이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던져지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와 당시 성전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권한을 가진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유로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오셔서 백성과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일을 하신 것에 대한 권위를 두고 논쟁한 사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을 옮기는 믿음과 기도와 용서에 대한 말씀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을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조명하여 주시는 은혜가 있으시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예수님은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하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서서 기도할 때 자기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서 용서하라고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푸는 해석의 열쇠는 예수님은 무화과의 때도 아닌데도 열매를 얻기를 바라셨고, 맺혀있어야 할 열매가 없자 무화과나무가 사람이 열매를 따 먹지 못하도록 영원토록 저주하신 사건에 키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산을 옮기는 믿음과 기도는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대로 된 것에 대해 베드로의 반응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가 마른 사건과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이 메시지를 이루어서 그것이 반영된 말씀이 비유로 주어진 이 산더러 들려져 명하여 바다에 던져지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고 기도했다면, 그대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말씀을 푸는 데는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신 사건은 상징적 행위였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고, 이 산더러 들려져 바다에 던져지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행위가 아니라 언어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비유로 해석돼야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예언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을 때는 꿈이나 환상이나 직접 말씀을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백성에게 전할 때는 백성의 언어로 전달하기도 했지만, 자기 몸 언어, 곧 상징적 행위로,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동여매고 말 못 하는 자가 되어 백성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패역한 족속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행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세우는 등 바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에워싸임을 당하고 공격받아 성벽이 무너질 것을 징조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징조가 일어날 것을 에스겔이 하는 행위를 통해 백성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무화과를 저주하신 사건은 곧이어 이와 관계된 일이 있을 것을 징조로 보여주신 상징적인 예언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보다도 더 깊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랬다면, 산더러 들려져서 바다에 던지라는 믿음과 기도에 대해서 그리고 용서에 대해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과 당시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성경 본문을 살펴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같은 원리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붙잡는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무화과나무가 마른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나무가 말라비틀어져서 고사하려면, 나무에 물과 양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물과 양분을 충분히 공급했는데도 나무가 말라서 비틀어져서 스스로 고사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무화과는 열매를 맺는 나무이기 때문에 물과 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아야 열매를 맺게 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열매 맺는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왔습니다. 그들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로 비유됐습니다. 이 두 나무는 모두 사람들에게 열매를 줘서 먹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포도 열매와 무화과 열매는 사람이 먹기에 좋지만, 나쁜 포도 열매와 나쁜 무화과 열매는 사람이 먹기에 나빠서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먹는다는 것은 그들이 먹어서 맛을 제공하고, 건강을 제공하지만, 나쁜 것은 버려서 사람에게 밟힌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례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장 8절 이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대아인의 나라에 포로로 사로잡혀 갈지라도 극히 좋은 무화과인 것은 하나님이 돌보실 것이기 때문이고, 나쁜 무화과는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 곧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그들이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무화과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데도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에게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고 하신 저주선포는 하나님께서 더는 그들을 돌보시지 않을 것이며 버려두셔서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한없이 우시면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로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우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지극정성으로 돌보셨는지는 이사야가 부른 포도원의 노래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5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열방 중에서 사랑하심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히 기름진 산에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농부가 극상품 포도 열매를 기대하고 망대를 세우고 또 그 안에 술 틀을 파놓았습니다. 이제 좋은 포도 맺기만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나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지만, 들 포도를 맺었음은 어찌 된 것이냐? 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기대와는 달리 당연히 좋은 포도를 맺을 줄 알았지만, 그와 반대되는 결과를 얻자 하나님은 그 포도원을 더는 보호하시거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걷어버리시고, 먹힘을 당하게 하시려고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하고 그것을 황폐하게 만드십니다.
5장 7절에 보시면, 바로 이 여호와의 포도원이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포도는 정의와 공의인데, 들 포도를 맺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공의와 정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포학하고 정의와 공의를 버림으로 인해 이곳저곳에서 그들의 포학함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는 부르짖음만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도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버린 사건과 이 산더러 들려져 바다에 던져지라는 산을 옮기는 믿음의 기도의 배경이 되는 성전 청결 사건에서 보듯이, 정의와 공의를 가르쳐야 할 백성의 지도자들, 특히 거룩한 성전을 중심으로 일어난 정의와 공의의 짓밟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버리듯이 예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제사, 보여주기 위한 경건한 모습, 보이기 위한 선행, 보이기 위한 기도, 길게 기도하여 경건한 척 보여주려는 외식하는 기도와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하는 구제,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한 채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비둘기파는 자와 환전상의 폭리를 눈감아준 대가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특히 서기관들은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켰습니다. 재판하는 대제사장은 객과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송사를 외면했고 위선과 외식으로 가득한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을 이용해 자기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 죄로 오염되고 더럽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와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비둘기파는 자를 내어 쫓아내시고, 환전상의 돈 바꾸는 상을 둘러 엎으신 것은 상징적 행위로서,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던 그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이고, 예루살렘 성전은 더는 하나님의 집의 기능을 잃고 이방인에 의해 짓밟힐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 나무요 무화과 나무이듯이 우리도 열매 맺는 나무로 신약성경은 비유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마태복음 3장 10절 말씀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7절에서, ”이처럼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세례요한이 말했듯이 좋은 열매를 맺지 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 지리라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나무는 버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요한복음 15장의 참 포도나무에도 비유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우리는 거기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극상품 포도 종자를 심었지만, 극상품 포도가 아니라 들 포도를 맺은 이스라엘처럼,
요한복음 15장 5, 6절 말씀 보시면,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고 떨어져 나간 가지는 가지처럼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살라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과실을 맺는 것과 같이 예수님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 안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말씀 안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며,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용서, 죄 사함이 전제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원리로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 13, 14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사람들에게 밟히지만,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은 모든 음식 재료에 맛을 내게 해 줍니다. 또한 우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빛을 잃어버린 등불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도, 맛도, 빛도 제공해 주지 못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서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맛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에게 밟히고, 열매 맺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하고, 그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안이고, 그 말씀은 용서가 전제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거룩한 희생 제사와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가르침 속에서 바로 이와 같은 죄 사함이 용서가 그 자신은 물론 백성에게 보여지고 가르쳐져야 했음에도 그것은 단지 거짓과 외식으로만 가득 찼고, 사마리아 사람과 이방인은 죄용서가 전제된 그래서 구원받아야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백성의 장로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한 거짓과 위선과 외식으로 드리는 제사와 기도가 마치 산처럼 버티고 있어서,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없도록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죄로 오염된 성전에서 희생 제사와 기도가 드려졌지만, 그것은 진정한 죄 사함과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산이 들려져 바다에 던지라는 명령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비유로서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처럼 그래서 사람에게 열매를 제공해 주지 못한 쓸모없는 무화과처럼, 산이 옮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쓸모없는 정죄와 거짓과 위선으로 오염된 성전이 훼파되고 새로운 용서의 공동체 곧 교회가 세워질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 산은 마치 죄와 허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사마리아 사람과 이방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버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산이 옮겨지면 평지가 되듯이, 이 산이 저 바다에 던져지는 것처럼, 죄와 허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던져져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산처럼 버티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서서 기도할 때 누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그를 먼저 용서하는 것이 이 산더러 저 바다에 던져지리라 하여도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그렇게 용서를 선언한 대로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을 옮기는 믿음이란, 그런 능력을 기적을 행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산처럼 느껴지는 죄와 허물을 가진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를 용서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장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와 용서를 통해 나타나는 사랑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받고자 하셨던 그 열매가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인데, 그것은 기도를 통해 나타나고 그렇게 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 것은 먼저 그들을 용서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로 산처럼 버티고 있어서 걸림돌이 돼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지만, 사마리아 사람이라서, 이방인이라서 본성 전에 들어갈 수 없지만, 용서를 통해 구현되는 새로운 공동체 새 이스라엘과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용서받은 자 그리고 그 용서하심을 받아서 자기에게 죄와 허물을 진 자를 용서하는 자에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는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천국 백성은 서로 사랑하고, 내게 잘못한 자라도 그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해운대숨쉬는교회 주일강단(11. 5) 여러분은 나무를 몇개나 뽑아보셨습니까? (막 11:21-25)|작성자 삶에서 쪄낸 아침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