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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낙동강은 조선 시대 삼차강(三叉江)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수문이 건설되면서 본류에서 벗어나 선암강(仙岩江) 또는 불암강(佛岩江)이라 불리면서 낙동강 하류의 지류가 되었다. 대저 수문을 통해 유입한 강물은 강동동[대사]에서 평강천으로 갈라지고, 경상남도 김해시 불암동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 둔치도 남단에서 조만강과 합류하여 녹산 수문을 거쳐 남해로 빠져 나간다. 낙동강이 남해로 유입하면서 새로운 삼각주를 형성하여 진우도와 대마등 등의 모래톱을 형성하였다. 개발 제한 구역에 속하여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농업이 영위된다. 농업은 삼각주와 하안 평야에서 주로 이뤄진다. 삼각주로 이루어진 대저 지역은 비옥한 충적토로 농사에 적합한 토질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관수와 배수가 어려워 농업이 행하여지지 못하였다. 개척은 조선 후기에 들어 이루어졌으며, 초기에는 주로 밭농사가 행하여졌다. 1916년 대저 수리 조합이 결성되어 농지 개량 사업이 시작되었다. 1931년 동낙동강 하폭을 넓히고 인공 제방이 축조되면서 단일 유로를 형성하고, 대동 수문과 녹산 수문을 설치하면서 서낙동강은 저수지 기능을 하게 되었다.
가락동의 분성 배씨(盆城裵氏)는 효자 배덕민의 아들들이 죽동에 처음 정착하며 가락동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집안이 된다. 명지동의 남평 문씨(南平文氏)도 명지동에 염전이 시작되기 전에 들어와 세거지를 형성한 집안이다. 가덕도동에는 경산 전씨(慶山全氏)가 가덕도 북부 지역에 세거를 형성하였고, 그다음 신안 주씨(新安朱氏)가 가덕도 남쪽 대항 마을에 정착하여 양대 세력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서구의 입향 성씨를 분석하면 주로 1600년대와 170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기 많은 성씨가 이곳에 입향한 여러 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라는 점이다. 각 집안 족보에는 그러한 정황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 입향 경위를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입향이 발생한 것으로 미루어 양란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녹산동 녹산 마을의 밀양 손씨(密陽孫氏) 입향조 손세립은 임진왜란 의령 의병장 손입갑의 증손 아들이다. 1670년경 녹산 마을에 입향하였는데, 입향 경위가 양란과 관계가 있으리라 추측된다. 둘째, 부산의 동래 지역 입향 성씨가 대부분 내륙을 통하여 내려왔다면 강서구 쪽 입향 성씨는 거의가 김해 지역에서 들어왔다. 즉 일반적으로 부산 지역 성씨는 동래 지역으로 들어와 부산 전 지역으로 이거하였지만 이곳은 그러한 경로를 밟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 17세기 전후로 강서구 지역은 사람이 살기가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낙동강과 인접하여 무인도나 습지가 많은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김해까지 내려온 이들이 18세기가 되면서 인근 강서 지역으로 이거하여 삶을 영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 이곳의 환경이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가락동 죽림 마을과 죽동 마을, 송산 마을의 분성 배씨는 전부 김해에서 들어왔다. 가락동 식만 마을의 김해 김씨(金海金氏), 강동동 상덕 마을 남평 문씨, 강동동 북정 마을 단양 우씨(丹陽禹氏), 녹산동 범방 마을 남양 홍씨 등 대부분의 입향 성씨를 들 수 있다. 김해 지역이 아닌 양산에서 이거한 성씨는 녹산동 사암 마을 밀양 박씨(密陽朴氏), 남원 지역에서 이거한 녹산동 사암 마을 남원 양씨(南原梁氏) 등을 들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