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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맛과 멋 그리고 향
- 『산림문학』 여름호를 읽고 -
권대근
뮨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수필은 품맛과 손맛 그리고 눈맛, 즉 향과 맛 그리고 멋을 밑거름으로 하여 피어난 꽃이라 할 수 있다. 꽃도 생태에 따라 향기를 달리하듯 수필 또한 어느 특성에 치중했느냐에 따라 성격을 달리한다. 그러나 그 성격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을 가지면서 하나의 수필로 집약되어져야 한다. 수필은 세 가지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문학의 품격, 즉 문학성을 갖는다. ‘이것이 수필이다’ 했을 때,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나 요건이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어야 우리 수필이 문학의 자리에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산림문학 수필 계간평의 관점은 <수필유삼미>이다. 수필문학의 문학성을 보다 확실하게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수필 유삼미>를 일종의 <필법>으로 정착시켜, 창작이론모형으로 발전시켜 보자는 욕심을 내어본다.
A. 수필의 <품맛>
수필은 향기가 나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조철형의 <느티나무 그늘>은 산림수필로 인간적인 향기를 풍기기에 품맛을 준다. 이 수필은 우리 주변부에 대한 관심 갖기에서 시작되는 글이다. 햇볕에 그을린 친구의 얼굴을 인정 많은 정미소, 양조장 아저씨의 모습으로 치환시킨 전략이 문학성을 견인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이 수필에 있어서 이런 상관성은 수필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다. 윤오영은 '내가 발견하고 내가 거두지 아니하면 건져 줄 이 없는 가치, 버릴 수 없는 인생의 향기를 풍겨주는 것이면 더욱 좋고, 될 수 있으면 이런 소재를 발견하고, 이런 소재를 찾으면 이미 절반은 성공이다.'라고 하였다. ‘향’이 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함의하는가.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과연 조철형 수필의 향기, 아니 수필다운 수필이 내는 향기는 어떤 것일까. 문향은 정서적 감화를 이끄는 모든 문장에 두루 통용될 최대공약수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과 함께 생명적이며 매력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정미소 아저씨의 종기가 낫자. 양조장 아저씨는 탁주에는 단무지 안주가 최고라며 느티나무 그늘에서 정미소 아저씨와 함께, 오가는 사람들에게 막걸리 인정을 베푸니, 느티나무 그늘은 자신만을 위해 드리운 그늘이 아니었다. 석경원 느티나무 연리지에 걸터낮아 환담하는데 단풍잎이 햇살과 그림자놀이를 한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배와 대추를 맛보다 중학 시절의 주먹밥, 누룽지, 등겨죽이 눈에 삼삼하다. 집에 가려하니 친구가 바구니에 감, 대추를 담아 준다. 햇볕에 그을린 친구의 얼굴은 인정 많은 정미소, 양조장 아저씨 모습이다. 연리지 느티나무에게 귀가 인사를 읍하니 곱게 물든 낙엽이 옷깃에 떨어진다. 가다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석양을 받은 느티나무 그늘이 자꾸 나를 따라온다.
- 조철형의 ⌜느티나무 그늘⌟ 중에서
조철형의 이 수필이 향기를 내는 것은 정미소 아저씨와 양조장 아저씨가 함께 동네 사람들에게 베푸는 무한 인정과 여기에 더하여, 집으로 가려는 작가에게 감, 대추를 가득 바구니에 담아주는 친구의 온정이다. 친구가 경영하는 농원 ‘석경원’ 연리지 느티나무 연상을 통해 추억을 떠올리고 인정을 퍼올리고 있는, 이런 관계미학이 만들어낸 짙은 향기와 그에 따른 고아한 빛깔이 미적 울림통을 자극한다. 이렇게 볼 때 조철형 작가의 어머니와 따뜻한 이웃 사람들은 삶의 발효제다. 그에게 있어서 ‘느티나무 그늘’은 보은의 정을 상징한다. 이 수필이 갖는 문학적 가치는 어떠하든 궁극적으로 수필적 화자의 온정과 인정이 향기를 발하면서 감동을 주고 있다는 데 있다. 명수필의 향기는 일생 동안 가슴의 내부에서 번득이는 영원한 메아리에 있을 것이다. ‘정자나무’, ‘양조장’, ‘정미소’, ‘지게미’ 그리고 ‘막걸리’에 놓인 그의 인문학적 사유는 우리를 심오한 향기에 젖게 한다. 술의 질이 과일이나 알곡, 발효제와의 혼합 상태에 따라 결정되듯 사람과의 관계도 그것을 위한 노력에 따라 결정된다. ‘연리지 느티나무에게 귀가 인사를 읍하니 곱게 물든 낙엽이 옷깃에 떨어진다. 가다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석양을 받은 느티나무 그늘이 자꾸 나를 따라온다.’라는 결말부 마지막의 여운을 주는 문장은 그 무엇보다도 수필의 문학성을 더 한다, 이들 향기나는 소재들에 담긴 휴머니즘을 능가할 향기가 어디 있겠는가.
B. 수필의 <손맛>
홍만희의 ⌜봄꽃을 기다리며」에서 나는 <멋>이란 어떤 것을 의미할까. 바로 손맛이다. 품맛이 향기를 의미한다면 수필의 손맛이라고 하는 멋은 빛깔에 해당한다. 문학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로 보면 ‘형상’에 해당된다. ‘봄꽃’에 대한 홍만희의 해석에는 <멋>이 우러난다. 여기서 멋이란 정서의 문학적 형상화를 의미한다. 이렇듯 같은 이야기라도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의미는 달라진다. 하나의 대상이나 사건은 작가의 손에 의하여 형상화되는 과정에서 내용이 변질된다. 그것은 작가의 세계관에 따라 그 관점이 달라질 수 있지만 그보다는 작가의 기교가 무엇보다도 큰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은 홍만희 수필이 갖는 서술의 특수성이다. 수필은 주제 전달의 과정, 즉 형상화에서 문학성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밝은 정서적인 사람만이 수필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소소한 일상’에 대한 작가의 의미발견이 미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저질 정치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쓰고 있다. 정서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바로 "멋"이다. 삶의 희망적 관조과 일상의 행복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햇살’, ‘봄꽃’ 등으로 치환해서, 부드럽고 윤택하게 각색하여 함축성 있게 표현하는 데서 풍기는 분위기, 전달차단성, 그것이 곧 멋이다.
오늘도 햇살은 변함없이 눈부시게 비춥니다. 봄 햇살이 비추자마자 온화한 기운만이 가득합니다. 그 환하고 따뜻한 기운에 매화는 더욱 고즈넉합니다. 잠시 상념에 잠긴 저를 매화나무 사이로 끌어냅니다. 아침저녁은 아직 쌀쌀하지만, 조만간 매화는 만개할 것 같습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도 하지만 햇살이 내려앉은 매화나무 고랑 사이는 참 따듯합니다. 이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온 누리에 퍼지는 이 햇살의 아름다운 눈부심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 홍만희의 ⌜봄꽃을 기다리며⌟중에서
인용 예문은 수필의 전개부다. 이 수필은 여성적인 정조로 또 낮은 목소리로 현실비판을 잘 승화시킨 글이다. 일반적으로 수필은 비판성을 본질로 하지만, 잘못하면 비판을 수필 속에 승화해서 담아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홍만희는 이런 수필의 본질적인 의미도 은근 수용하면서 객관적 상관물을 이용해서 메시지를 잘 형상화시켜 냄으로써 문학적 성취에 성공하고 있다. 수필다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을 다른 의미로 전환시키는 치환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문장이 비유를 만나면 멋을 내면서 더욱 진솔해지고, 참신성을 띠게 된다. 수필 문장은 이처럼 다른 산문어와는 달리 본질적으로 함축성이 담겨야 하는 것이다. “이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온 누리에 퍼지는 이 햇살의 아름다운 눈부심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나 “심중에 꽃만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던가. 제 눈은 때로 먼 곳을 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필의 마지막, “안타까운 것은 여기까지 무슨 공사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한 무더기 모래흙을 실은 트럭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지나갑니다.”처럼 비유는 필자의 느낌이나 생각을 독자에게 더욱 정확하게, 참신하고 생동감 있게 진실하게 전달하는 구실을 한다. ‘트럭’과 ‘굉음’은 으미의 재구성을 하도록 독자에게 요구하며 독자를 미적 사유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수필은, ‘햇살이 내려앉은 매화나무 고랑 사이는 참 따듯합니다.’와 같이 비유나 상징을 사용하여 문장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매우 돋보인다고 하겠다. ‘자연’과 ‘문명’의 대비도 멋지다. 비유를 쓰면 구체적이고도 간결하게 나타낼 수 있다. 사람들은 구체적이고 단순화된 것을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C. 수필의 <눈맛>
박용구의 산림수필은 체험과 지성에서 우러난다. 삶이 비판적 사상에 용해되고 문제의식으로 표현됨으로써, 한 편의 멋진 수필이 탄생된 것이다. 아름다움은 현란한 빛깔과 진한 향기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 현실과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위정자의 이념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평가되지만, 작가는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진실이 배제된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일반적 통론이라는 점을 기념식수 이야기를 통해 잘 지적하고 있다. 한 작가의 가치는 한 시대를 대변함으로써 그 폭을 확장할 수 있다. 박용구의 현실이나 대상을 보는 예리한 눈맛이 바로 수필의 맛이다. 박용구 수필의 맛은 문학 본질적 요소로 보면 ’인식‘에 해당한다. 이 수필의 <맛>은 대상을 우호적이면서 참신하게 인식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데서 나온다고 하겠다. 작가가 중시하는 미의식의 유형은 창의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사고다. 두 사고 유형이 이렇게 맛있는 글을 쓰는 데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념식수, 그냥 값이 비싸다거나 희귀한 나무라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기념식수에 대한 우려로 이 수필은 출발하고 있다.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태산의 대묘에서 오랜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은 여기에 기념식수한 한백 곧 측백나무이다. 오랜 세월을 버티며 내장과 속살이 다 메말라 가면서도 지금까지 견디어 살아남아 봄이면 새 가지를 뻗어 바람이 불면 심장을 무너지게 하는 만가 같은 측백나무의 바람소리가 흥망성쇠의 길고 긴 중국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는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 박용구의 ⌜기념식수 -한백⌟ 중에서
독창성과 비판성을 가져오면서 이 수필이 고고하면서도 담박한 맛을 주는 것은 바로 ‘오랜 세월을 버티며 내장과 속살이 다 메말라 가면서도 지금까지 견디어 살아남아 봄이면 새 가지를 뻗어 바람이 불면 심장을 무너지게 하는 만가 같은 측백나무의 바람소리가 흥망성쇠의 길고 긴 중국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는 것 같아’라는 작가의 미적 사유 때문이다. ‘흥망성쇠의 중국역사’를 ‘만가 같은 측백나무의 바람소리’에 견주어내는 데서 작가의 문학적 내공이 발휘되고 있다. 장르의 특수성으로 보아 수필은 해박한 지성을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것들이 이 수필의 맛을 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식을 넘어 인식을 지향함으로써 글에 재미와 흥미 그리고 생동감이 넘치고, 긴장감이 묻어나오는 것이다. 이 수필은 기념식수에 관한 상식에 도전하는 문제의식이 눈맛을 내고 있다. 참신한 해석력이 들어가면 수필의 그 맛과 효능이 배가된다. 어떤 사물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나 의미를 도출해 내는 능력도 기지의 소산이라고 볼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기념식수’에 대한 판단이나 해석적 능력도 인식이라 볼 수 있다. 이 수필은 기념식수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인문학적 사유를 지향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문학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3. 로그아웃
좋은 수필의 요건에 세 가지가 전부일 수 없다. 한 편의 본격수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주제, 제재, 문장, 구성 등 구성적 요건뿐만 아니라 주제의 의미화, 문장의 개성화, 구성의 다변화 등 기능적 요건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산림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수필학자로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 작가나 독자나 읽고 싶은 계간평을 써나갈 것을 약속한다. 진정 좋은 수필이란 진통과 고뇌 속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수필을 창작함에 있어 필법에 대한 진통과 고뇌는 좋은 수필을 낳는 씨앗이요, 어머니다. 수필은 언어를 부리는 역량에 따라 ‘작문’이 되기도 하고, ‘잡문’이 되고, ‘작품’이 되기도 한다. ‘작문’과 ‘잡문’의 수준에서 벗어나 작품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조건 주제를 의미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수필유삼미>의 필법을 수필 창작시 기법으로서 활용해 보기를 권한다.
롤랑 바르트는 ‘글쟁이’와 ‘작가’를 확연히 구별하라고 했다. 이 말은 ‘글쟁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사람이고, 작가는 전달 차단적 언어를 재료로 표달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다. 작가는 말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언어적 물질을 만들어내는 거인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누드는 다 같다고 해서 르노와르가 그린 누드와 ‘플레이보이’ 잡지에 나오는 것을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도 분명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된 것에 공감하고 동의해야만 한다는 이 의무도 아닌 의무를 칸트는 ‘심미적 의무’라고 불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의무를 받아들여야 하며, 동시에 성실히 수행해야만 할 것이다. 문학 감상이라는 차원에서 곱씹어 보면, 독자의 심미적 의무는 더욱 의미심장한 말이다. ‘수필의 향과 맛 그리고 멋’의 관점을 통해 본 계간평이 산림수필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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