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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3편 3절-5절: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3절: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빛은 어두움을 밝히니 어두움 속에 묻히고 숨었던 것이 빛 앞에서는 원래의 모양과 모습들이 다 드러나게 된다. 구별케 하고 분별케 한다. 존재적 분별도 되지만 ‘존재들이 활동을 하는 면에 있어서 어떤 성질을 가지고 그 활동을 하는지?’ 하는 그 활동의 질적 분별이 된다. 그 다음에 색깔분별도 나오고, 활동을 하는 방향분별, 목적분별이 된다. 빛이 있으면 길을 갈 수도 있고 활동을 할 수도 있다. 빛의 역할이 상당히 많다. 정신도 밝히고, 사상도 밝히고, 영들을 분별케 하고, 사망과 생명의 길이 어떤 길인지 밝힌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서 신앙 믿음의 기준 척도가 된다. 성문적인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우리를 향하신 은밀한 뜻이 우리 삶의 기준 척도가 된다. 성경책을 불에 집어넣으면 타버리지만 이 성경책을 보고 그 속의 은밀한 뜻을 찾아서 내가 가지고 있으면 이 뜻은 불에 안 탄다. 그래서 성경이 있는 동안에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성도 속에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가는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주님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지 못한다. 주님의 나라는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것이라야 들어갈 수 있는 거다. 주님의 성산에 들어가는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또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하고, 또 내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으로 감염이 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내 속에서 역사를 하시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선지자들을 붙잡고 인도를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고, 또 사도들을 붙잡고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복음을 증거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또 성령으로 오셔서 기록된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로 주님의 성산과 장막으로 인도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건과 물질을 등용시켜서 우리로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장막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주의 장막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니까 성도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의 나라 쪽으로 나가면 질적인 면에서 점점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뵈올 날을 소망하면서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최대한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가야 한다.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최대한으로 가까워져야 한다. 그런데 성도로 하여금 이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이 사방에서 진을 치고 있고, 널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빛과 진리가 아니면 우리가 주님의 장막으로 인도가 되지를 않는다. 빛이신 주님은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서 깨달음으로 분별케 해 주면서 인도를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옳은 진리를 들었다면 그 깨달음이 자기 속에서 역사를 하고 있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자기 몸 가까이에서 여러 가지 불의한 자들의 교훈이 있을지라도 분별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 안 넘어간다. 그들의 말에 끌려가서 그들의 속셈대로 인도가 되지를 않다.
우리는 주님의 빛과 진리로서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 자기 마음 가운데 무엇이 와서 자기를 인도하고 있는 건지?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 평가성 면에서 무엇이 자기 속에서 지배를 해서 자기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지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주의 성산이란 거룩한 산이라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산이 성산이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산이 성산이다. 거룩한 산이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산이 성산이다. 그러면 산이 뭐냐? 산은 높다. 그러면 그 높은 산이 어떻게 해서 높아진 것이냐? 세상이 높인 거냐, 하나님이 높인 거냐? 세상으로 높아진 것이라면 세상 땅에 속한 거다. 세상으로 된 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 나타나서 진리이치의 깨달음은 없고 세상만 나타난다. 진리로, 말씀으로 높아진 것은 그것으로 높아졌으니 그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다. 이제 거짓 종과, 참 종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많은 종들이 알아주고 이방인들도 알아준다면 이는 세상이 높인 사람이다. 세상으로 인해서 높이 올라간 거다. 이건 성산이 될 수 없다. 거룩한 성산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것만 들어갈 수 있으니 이것은 세상이 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올라간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을 올려주지를 않는다. 알아야 올려줄 수가 있지 알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올려주겠느냐?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간 것처럼 주님의 성도가 주님의 빛과 진리로, 성령의 인도로 인도가 되면 진리의 도의 깨달음의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진리의 봉우리, 깨달음의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니 하나님께서 나타났는데, 모세가 제 마음대로 제 생각을 가지고 올라갔을까? 성령의 감화로 올라갔다.
우리가 진리의 도의 깨달음의 봉우리에 설 때 하나님의 의사성, 즉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신앙이 질적인 면에서 낮으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이제 갓 낳은 아이가 부모의 뜻을 어떻게 알겠느냐? 어느 정도 성인이 되어야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 그런데 성인의 나이가 되었어도 부모의 애를 탱탱 먹이는 자식도 있다. 죽을 때까지 나이를 먹어도 집안 식구들의 애를 탱탱 먹이는 늙은 사람도 있다. 이건 사람이 안 됐다.
우리는 믿어갈수록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사성을 알게 된다. 진리의 도의 봉우리로 올라가면 그렇다. 하나님의 의사성을 아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빛과 진리가 아니면 모른다. 이러면 거룩한 산으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구렁텅이로, 넓은 길, 세상 길, 멸망 길로 인도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자는 ‘나에게 주님의 사랑을 주시옵소서’ 라고 안 해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사랑을 내려 쏟는 거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진리의 도의 봉우리로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다 자기 좋도록 해 달라고 하고, 자기 비위를 맞춰달라고 한다. 그러니 사람의 사고방식 생각이 어떻게 커지겠느냐?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장성하라. 성장하라’ 라고 했다.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크려면 낮아져라.’ 예수님께서 낮아지는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셨느냐? 냄새나는 발, 먼지투성이 발을 씻겨주셨다. 예수님의 이 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가 자기의 얼굴을 깎아내리면 안 내려가려고 한다. 오히려 더 올라가려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의 발을 닦아주겠느냐? 손도 못 닦는다. 겸손하지 못하고 말씀으로 만들어지는 수종이 안 돼 나온다면 이 사람은 안 만들어졌다는 거다.
우리는 서로의 약한 것을 보듬어 줘야 하고, 짐을 지고 있는 것을 보면 덜어줘야 한다. 그런데 자기가 혼자 짐을 지고 있으면서 ‘누군가 나를 안 도와주나?’ 라고 한다면 이것도 참 문제다. 주님 앞에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은 그 길로 인생이 끝나도 누구에게 원망을 안 하는 거다. ‘누가 쑤시든지, 누가 찌르든지 그건 너희들이 할 일이고, 마귀가 시켰던 하나님이 시켰던 그건 너희들이 할 일이고 나는 내 할 일만 한다’ 하고 나가면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고, 자기가 주님의 성품으로 커진다.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 남이 깎아내리던 긁던, 남이 이걸 알아주던 말던 묵묵히 수종을 들면 되는 거다. 이건 하나님께서 보시는 거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대로, 직분을 주면 주는 대로 사람 사는 곳에는 얼마든지 일이 있다.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일반적으로 ‘장막’이란 광야에서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둘러치는 막이다. 맹수들이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안의 것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모세의 장막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설계대로 만든 장막이다. 이 장막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임재의 장막이다. 하나님의 설계대로 장막을 지었으니까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다. 만일 하나님의 설계가 아니라 인간의 조작배기 설계라면 하나님께서 이 장막에서 모세를 만날 때 이 장막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의사성을 알고, 그 뜻을 내 뜻으로 삼고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으로 영적 경지의 신앙생활에 이르게 해 달라는 소원기도다. 세상이 경건치 않은 자들과, 간사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로 가득해질 때 신실한 성도들은 주님의 빛 되신 진리를 찾아 붙잡고 구별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최고의 신앙경지로 올라가야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예 말할 필요가 없는 거고,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훈성과 교인들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소리, 특히 교회에서 종들이 나팔(설교)을 부는 것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많을수록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보면 교회가 많다고 하는 것은 분별력을 가지라는 거다. 신실한 성도들은 진리의 빛을 가져야 한다. 진리가 기준 척도가 돼야 한다. 안 그러면 불의한 자들과, 간사한 자들과,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먹혀버린다.
4절: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그런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해 주시고, 성도는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그런즉’이라고 하는 거다.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의 단도 역시 하나님의 설계대로 만들어졌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순서를 보면 먼저 번제단에서 죽어지고, 떡상에서 낱낱이 깨어지고, 촛대에서 밝혀지고, 향단에서 엎드러지고, 법궤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러니까 장막에 들어가는 최종은 법궤 앞에서 하나님 음성을 듣는 거다. 성도가 이 법궤 앞에까지 들어가는 것이 최고의 신앙의 경지라는 거다. 제사를 드리는 순서는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신앙의 이치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경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려면 먼저 번제단에서 죽어야 한다. 처음에는 죽어야 한다. 옛사람 자기가 죽어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죽듯이 옛사람이 하나님의 설계인 말씀의 단에서 죽고 부서져야 한다. 세상 요소적인 지혜지식이나, 세상성적인 도덕성이나 소원이나 목적은 완전히 죽어야 한다. 그런데 안 죽으려고 하지 않느냐? 자기가 예수를 믿은 후에 옛사람성이 하나라도 죽은 게 있느냐? ‘내가 옛날에는 이런 취미가 있었는데 예수 믿고 보니 몹쓸 취미로구나’ 해서 죽인 취미가 있느냐?
그러면 자기의 옛사람이 말씀에 의해 죽는다고 해서 바보가 되는 거냐? 그게 아니다. 하나가 죽으면 하나님의 것이 하나가 더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자기는 올라간다. 옛 것이 부서질수록, 옛사람의 사고방식, 옛사람의 지혜지식의 기준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고 자기 속에 진리지식을 기준으로 세워놓고 이 기준을 따라 살아가면 자기는 올라간다. 세상지식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세상지식은 생활에 이용물, 구원에 이용물로 써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진리지식처럼 자기의 기준으로 세워놓고 사는 건 죄가 된다. 세상지식이 기준이 된 사람은 아무리 ‘진리 진리’ 해도 속에서 세상지식이 자꾸 올라온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물론 다른 뜻도 있는 거지만 자기의 옛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자기의 천국은 그만큼 커지는 거다. 이 세상 것으로 해서 남에게 이기면 뭘 할 거고, 지면 뭐 할 거냐? 어차피 세상 것이요,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수치감만 자꾸 쌓인다.
또 떡상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 옛사람이 죽고 부서지고 가루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이겨진다. 잘 만들어진다. 그런데 목사님들 세계부터가 정말로 안 부서진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느냐? 나의 자아가 죽고 부서지고 뭉쳐져야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
옛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죽지 않고 교회를 다니면 이건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다. 옛사람이 그대로 살아있는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다. 종교인은 하나님에게 옛사람의 소원인 자기 사정을 들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뭣도 뭣도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건 누구의 소원이냐? 인간 자기의 소원이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겠습니다. 그러니 잘 만들어질 수 있도록 세상 복도 풍족하게 주십시오’ 라고 한다면 이건 누구의 소원이냐? 인간 자기의 소원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만들어지고 싶습니다. 내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니 하나님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하면 우리로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이런 저런 사건 환경을 막 주신다. 내가 보기에 최고로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성도에게 최고의 좋은 것을 주신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를 했다면 토를 달지 말아라. 하나님 앞에 토를 달지 말아라.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수금은 줄을 튕기면 통이 울려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악기가 좋을수록 줄의 조임이나 악기의 몸통이 섬세하게 잘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까 악기의 재질이 중요한다. 노력이 많이 들어간 잘 만들어진 악기일수록 그 줄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주 섬세하고 긴 여운의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수금으로 주를 찬양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이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최고의 고상한 경지에 이르면 어느 새 세상의 근심 걱정은 다 물러가고 기쁨만 가득 들어있어서 마음 깊은 중심에서 저절로 찬양이 나오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 수금이니 비파니 하는 것이 아무렇게나 기록된 것이 아니다. 통을 울려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신앙의 경지에 오른 성도의 마음은 악기통과 같아서 살짝만 자극이 와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온다. 사실 우리 인간은 느낌의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을 반기면 희락의 경지에 이르고 찬송이 나오는 거다. 노래를 잘 할 줄 몰라도 집에서나 일터에서 마음속으로 흥얼흥얼 하면서 찬송이 나와야 한다.
악기의 어떤 줄을 튕겨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듯이 마음 속에 기쁨이 가득하게 들어있으면 자연히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거다. 사람이 만들어진 대로 소리가 나게 돼 있다. 이것만큼은 못 속인다.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진 것만큼 무슨 소리든 소리가 나온다. 든 대로 나온다. 안 만들어졌으면 안 만들어진 것만큼 소리가 나온다. 이건 못 속인다. 스스로 진단을 해 봐라. 사람이 잘 만들어졌으면 만들어진 대로 아름다움이 밖으로 나오고, 안 만들어졌으면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자기 속에 분쟁이 있으면 누구와 말을 할 때 큰소리가 나오겠느냐, 작은 소리가 나오겠느냐? 큰소리가 나온다. 마음 속에 고통이나 슬픔이 있으면 눈물이 나오고 마음이 아리다. 마음이 끙끙 앓는다. 반대로 기쁨이 들어있으면 노래와 춤이 나온다. 나는 마음속이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나는데 누가 내 옆에서 기뻐서 찬송을 부르며 웃고 있으면 미칠 지경이 된다. 자기에게 슬픈 일이 왔으면 울어버리고, 기쁘면 찬송을 하고, 죄를 지었으면 회개를 해야 한다. 죄를 지어놓고도 울지 않고 자꾸 속으로 참고 있으면 병이 된다. 그리고 그 화풀이를 남에게 하기 쉽다.
자기는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 속에서 수금과 비파소리가 나야지 맨날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면 되겠느냐? 자기가 잘못해서 얻어맞으면서 ‘왜 나만 때리느냐? 저 사람도 때리지’ 이것은 수금을 타는 소리냐, 툭사발 깨지는 소리냐? ‘저 놈을 잡아갈 귀신은 없나?’ 이게 무슨 소리냐? 수금 타는 소리냐? 내 주머니에 돈이 많아서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하는 것은 무슨 악기소리냐?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승리하고 나오는 승리의 개가, 이건 무슨 악기소리냐? 이제 자기 속에서 무슨 악기소리가 나는지 알 수 있겠느냐? 자기 속에서 전쟁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자기 속에서 평화의 비둘기가 날아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자기가 살면서 세상에다 자기의 안고를 두고 살면 늘 근심과 걱정이 자기 몸을 안개처럼 감싸게 된다. 또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일도 잘 된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제 쯤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언제쯤 나의 일이 잘 풀리려나? 이런 근심 걱정을 하게 된다.
진리신앙을 가진 성도가 거짓되고, 간사하고, 육적이며, 세상적인 불의를 행하는 거짓된 교회들이 커지는 것을 자꾸 생각을 하게 되면 불안해지고 낙망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생명의 좁은 길을 가면서 진리를 사수할까?’ 이런 염려 걱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진리를 붙잡고 놓치지 않게 된다. 이걸 바꿔서 말하면 진리를 붙잡은 자는 그런 세상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진리를 붙잡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또 하나님을 바라보며 진리를 놓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속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신다. 약속으로 되어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상화 인격화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속성품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 속에는 하나님처럼 가치판단 평가성을 내릴 줄 아는 지혜지식이 들어있다. 이것이 다 하늘로부터 온 거다. 전부가 하늘의 신령한 요소로 되어있는 거다. 그래서 악한 집단들 속에 빠지지 않게 되는 거다. 자기는 세상 요소성을 붙들고 있으면서 ‘내가 예수를 믿으니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겠지. 보호해 주시겠지’ 하는 것은 자기 착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붙잡고 있는 신앙성도의 체면을 세워주신다.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러니 어찌 찬송이 안 나오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