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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허창수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창세기 18 : 10 - 22
언젠가 포천에 있는 할렐루야 기도원에 교인중에 한 분이 그곳에 가겠다고 해서 모시고 갔습니다. 병원에서 더 이상 고칠 수 없다는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기적을 바라고 찾아온 것입니다. 밤 집회는 원장이 안수를 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은 줄을 지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한번 안수를 받았던 사람도 한 번 더 받겠다고 뒤로 돌아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원장이 지나갈 때 원장의 손을 잡고 끌어다 자기 머리에 갔다대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데 자기 머리를 내 밀어 억지로 안수를 받는 것입니다. 마치 원장의 손이 자기 머리에 안수만 하면 복을 받을 줄로 믿는 것입니다.
신학 공부를 할 때 부산 구덕체육관에 조용기 목사를 강사로 집회를 한다기에 가 보았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조용기 목사가 나가는 문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이미 수십명의 경호원들이 길을 열어 조목사를 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조목사가 타는 차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조목사에게 안수를 해 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목사는 안중에도 없이 곧 바로 차에 올라타고 훌쩍 떠나는 것입니다. 과연 저렇게 안수에 갈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과 그러한 사람의 머리에 손 한 번 얹어주는 것도 뿌리치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찾는 것입니다. 행복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찾는 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복은 지식도 아닙니다. 소유도 아닙니다. 건강도 명예도 권세도 아닙니다. 명품을 가졌다고 복이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고급 시계를 찼다고 해서 고급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두 번째로 복 받을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있지 않으면서 복을 원하는 것입니다. 복 받을 만한 성품과 인격과 마음씨가 되어야 하는 데 아무리 보아도 복 받을 자격이 없는데 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미 주어진 복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넘치는 복을 받았는데도 복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끔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대부분이 ‘지금은 그때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나고 보니까 그때 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지금 받은 복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전형적인 축복을 추구하던 사람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축복 받으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머리위에 손을 얹고 축복해 주시기만 하면 복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안수기도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의 원조가 야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안수기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위 능력받았다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안수 받으면 축복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능력받은 분이라고 하면 무슨 수를 쓰서라도 그에게 안수를 받으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갈 때 문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목사님, 안수기도 좀 해 주세요. 한 번만이라도 안수해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복을 구걸하지 마세요’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안수를 받아야 복이 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안수만 받으면 복이 되는 줄 알고 그것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사람입니다. 어머니와 합작을 해서 형을 따돌리고 눈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안수를 받은 즉시 들통 나서 오히려 죽게 되었습니다. 복이 아니라 화를 받은 것입니다. 더 이상 집에서 행복하게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래도 살인사건이 날 것 같아 어머니가 야곱에게 ‘네 형 에서가 화가 풀리기까지 하란 외가댁으로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서둘러 도망쳤습니다.
야곱은 광야로 도망칩니다. 해가 지고 배가 고프고 처량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처량하기 보다는 생명의 위험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광야는 낮에는 사람들이 간혹 다니지만 밤이면 맹수들이 다닙니다. 맹수들이 싸우고 죽이고 잡아 먹는 무서운 밤입니다. 어느 맹수에게 밥이 될는지 알 수 없는 공포의 밤입니다. 여기 저기서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야곱은 돌 베게하고 어쩌다 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야곱의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데기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닥다리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 위에 여호와께서 서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며 ...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든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잠이 깨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라”(16)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하나님이 아버지와 함께 하시고 그 아버지에게 안수를 받으면 복이 되는 줄로 알았는데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야곱은 광야에는 하나님이 없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거짓말하고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치는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짖고 도망치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의 신앙 착각은 능력있다는 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믿음도 없고 죄중에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사람을 찾아가서 그에게 안수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은 아버지와 함께 하시고 그 아버지로부터 안수를 받으면 축복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안수만 받으면 축복 받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야곱의 신앙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야곱은 복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복인 것을 알았습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어떤 능력있는 분으로부터 안수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야곱이 받게 된 복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13)고 하셨습니다. 땅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도망자로 땅 한 평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자손에게까지 주신다는 말씀은 야곱과 그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자손의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14)고 하셨습니다. 자손이 복을 받을 것을 축복하셨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 축복하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복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축복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15)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축복입니다. 야곱은 광야에 홀로 있었습니다. 맹수들의 소리가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했을 때 야곱은 얼마나 행복함을 느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이 너를 지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야곱에게는 그 어떤 악한 자가 덤벼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양 치는 종으로 살았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양을 치는 날부터 양이 건강하고 새끼를 많이 낳기 시작해서 외삼촌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에게 양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더 이상 속고만 살 수 없어 양이 새끼를 낳을 때 얼룩진 것은 야곱의 것이 되게 하고 얼룩지지 않은 것은 외삼촌의 것이 되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외삼촌은 그날부터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양들을 따로 관리를 해서 가급적이면 새끼들이 얼룩진 것을 낳지 않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셔서 새끼를 낳는 것마다 전부 얼룩진 것 이였습니다. 야곱은 순식간에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야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심으로 외삼촌 라반도 야곱에게는 손을 들었습니다. 미련한 라반도 야곱에게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라’(30:27)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신 것을 자신도 알고 남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15)고 하셨습니다. 지금 형을 피해 도망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야곱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축복하신대로 아내들과 자녀들과 수많은 양때와 소때를 거느리고 큰 부자가 되어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15). 끝까지 약속을 지키시며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신다는 축복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 큰 축복을 야곱은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야곱을 만나 주심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안수가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서워 떨어야만 했던 광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7)라고 고백했습니다. 광야가 바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만나는 문이요 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여러분의 광야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늘의 문이요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은 안수를 축복으로 알았던 집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잘못된 신앙관념이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광야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곳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오로지 혼자 두려워 떨어야 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에게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만들고 외롭게 만들고 무능하게 만드는 것들이 여러분에게 광야입니다.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성장 과정을 말할 때 첫째로 귀속적 신앙입니다. 어렸을 때는 내가 내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교회에 가니까 따라 다녔고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끌어 주는 대로 따르는 신앙입니다.
두 번째로 배우는 신앙입니다. 스스로 탐구하는 신앙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가를 탐구합니다.
세 번째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독립된 신앙이 됩니다. 경험을 통해서 이제 스스로 깨닫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병들 때 ‘고쳐 주세요’ 라고 하는 유치한 신앙이 아니라 병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깨닫는 신앙입니다. 시련이나 경험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병을 통해서 깨닫고,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는 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알았던 것을 비로소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광야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유치한 신앙이 성속한 신앙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고 잤던 돌을 세워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광야에 돌을 세워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광야가 하나님의 집이 된 것입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닫고 믿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복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