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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주 안에서” 가족과 이웃을 존중하고 화목하라
장코뱅 추천 4 조회 314 26.05.09 07:31 댓글 4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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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05.09 07:40

    첫댓글 즐거운 가정의 달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 26.05.09 16:28

    네, 알겠습니다.

  • 작성자 26.05.09 07:44

    <호크마 주석: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 '주 안에서'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때 주께 순종하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함을 시사한다. 본절에서의 부모는 이교도 부모가(Mitton) 아니라 그리스도인 부모를 전제로 한다(Gnilka, Foulkes, Bruce).
    이것이 옳으니라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자녀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임을 나타낸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인륜(人倫)으로 받아들여지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인 자녀에게 있어서 마땅한 일이다.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 본절은 70인역(LXX)의 출 20:12과 신 5: 16에서 언급된 십계명의 제5계명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약속있는 첫계명'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십계명에서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여섯 가지 계명 중에 첫 계명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hilo,Gnilka). (2) 혹자는 랍비 전승에서 가장 어려운 계명을 십계명 중

  • 작성자 26.05.09 07:44

    제5계명으로 생각하고 가장 쉬운 계명을 신 22:7로 간주하는 것에 착안하여 '첫'이 수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명 중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lier, Ernst). (3) 혹자는 십계명 중 제2계명이약속있는 첫 계명이 아니라 제5계명인 본절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주장 한다(Mitton, Meyer, Caird, J.A.Robinson).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십계명 중 제2계명에 나와 있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 5:9, 10)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Lincoln).

    6: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바울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출 20:12; 신 5:16)란 문구를 '땅에서'로 자유롭게 변형시켜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런 변형을 통해서 유대인에게만 해당했던 약속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이런 변형은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함으로써 땅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됨을

  • 작성자 26.05.09 07:45

    시사한다(Mitton, Foulkes, Wood).

    6:4
    또 아비들아 - 1, 2절에서는 '부모'라고 기술한 반면 본절에서는 '아버지'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가 가정의 대표이며 자녀 교육의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Wood, Hendriksen, Foulkes).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 본문은 부모가 자녀를 분노케 하는 태도나 말, 행동을 피해야 함을 시사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정도 이상의 엄격한 훈련, 비합리적 요구, 권위의 남용 등을 행하지 말아야 하며 자녀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이해하여 자녀의 실제적인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 부모는 단순히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으로 책임이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교양'은 훈련이나 체벌을 동반한 책망을 의미하며, '훈계'는 말 로 하는 교훈이나 교정(矯正)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이런 '교양과 훈계'를 통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 양식을 가르쳐서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며

  • 작성자 26.05.09 07:45

    - 바울은 본절에서 '육체의 상전'과 '그리스도'를 대비함으로 종들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을 섬기도록 권면한다. '두려워하고 떨며'는 늘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며(Scott), '성실한 마음으로'는 두 마음을 품지않고 오직 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Wood). 바울이 이런 자세를 요구하는 것은 비록 육체의 상전은 속일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는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성도는 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복종하듯이 육체의 상전을 섬겨야 한다.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 본절은 골 3:22과 병행된다. 바울은 본절에서 '눈가림만 하여'와 '마음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그리스도의 종'을 서로 대조시키면서 그리스도인 종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권면한다. 종들은 육체의 상전이 볼 때에만 열심히 일하는 척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도리어 모든 일을 할 때에 하루 24시간 그리스도 앞에 사는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듯

  • 작성자 26.05.09 07:45

    육체의 상전을 전심으로 섬겨야 한다(Mitton).

    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 종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위선적으로 충성한다든가 혹은 강제로 시킬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신전 의식(神前意識)을 가지고 온전히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Wood, Bruce).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 본절은 종들이 사람에게 하듯 하지않고 주께 하듯 섬겨야 하는 근거이다. '그대로 받을 줄을'의 헬라어 '코미세타이'(* )는 미래시상으로 사람들이 행한 대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 혹은 심판의 날에 보상받을 것을 시사한다(Wood, Bruce, Lincoln). 한편 바울은 앞절까지 종을 대상으로 권면을 하고 있었으나 본절에서는 '종이나 자유자나' 다 보상의 대상이 됨을 밝히고 있다. '종이나 자유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과 자유인의 구별이 전혀 없는 초대 교회의 세례 전승을 암시한다(고전 12:13; 갈 3:28; 골3:11). 비록 현재의 삶에는 종과 자유인 사이에 엄격한

  • 작성자 26.05.09 07:46

    구분이 있다 할지라도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는 종이나 자유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Lincoln).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하고 공갈을 그치라 - 본절에서 바울은 상전에게도 동일하게 권면한다. '이와 같이 하고'는 종이 행했던 것처럼 동일하게 상전도 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과 '상전'이 상호 관계에서 동 일한 행위의 기준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상전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악용해서 종들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 상전들이 종들을 잘 대 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 이것은 종과 상전이 그리스도인임을 시사한다(Mitton).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회적 신분이 종이든 상전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2)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 '외모로 취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소폴렘프시아'(* )는 외적 요인에 기초해서 혹은 면전에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상전들은 세상에서 획득한 사회적 지위로 인해 하나님에게도 특별한 대상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바울은 상전들에게

  • 작성자 26.05.09 07:46

    그리스도께서 전혀 외모로 취하지 않으심을 지적함으로 상전들로 하여금 자만에 빠지지 않고 경각심을 갖도록 권면하고 있다.

  • 26.05.09 12:21

    에베소서 6장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가정과 사회생활의 핵심이 '주권자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상호 존중과 책임에 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자녀의 순종은 단순히 부모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적 결단이며, 부모 또한 자녀를 소유물이 아닌 인격체로 존중하며 주의 교양으로 양육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한 권면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회적 지위나 외모가 아닌 각 사람의 중심과 선한 행위만이 보상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경각심을 줍니다.

    상전이 종을 위협하지 말고 동일한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강압적인 권위주의가 복음 안에서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결국 모든 관계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대하듯 진실하고 성실하게 행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 26.05.09 16:55

    @노베 아멘!

  • 작성자 26.05.09 07:49

    <호크마 주석: 창세기>

    12:1
    여호와 -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호와'(* )란 신명칭을 본장에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본서 기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선택된 백성을 향한 그 분의 언약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2:4>.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일반 사람들도 들을수 있는 말씀으로 아브람의 계시를 받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의 심령 속에 내적으로 임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이르시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르'(* )의 의미가 대개 '말한다', '이야기 한다'란 점에 비추어볼 때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본토 - 혹자(Calvin)는 이를 '우르'로 이해하고 아브람이 구체적 소명을 받은 것을 우르에 있을 때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1:31).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떠난 곳이 '하란'인 점에 입각할 때(4절) 이는 하란 , 더 나아가 우르와 하란을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다. 떠나...가라 - '누가 네 뒤에 남든지 상관 말고 너를 위하여 떠나라' 는 의미이다.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떠남과 분리의 역사인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죄악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 작성자 26.05.09 07:49

    의와 거룩을 좇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롬 12:2).
    내가 네게 지시할 땅 - 직역하면 '내가 네게 보여 줄 그 땅'. 여기서 '보여 줄' 은 미래 미완료형으로 아직까지는 보여지지 않으나 미래에는 구체적으로 보여질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땅'은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하나 하나님으로서는 이미 작정해 놓은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 26.05.09 12:22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은 단순히 지리적 이동을 넘어, 자신을 보호하던 모든 익숙한 결계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을 신뢰하라는 전폭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곧 죄악과 우상 숭배로부터의 분리이자 떠남의 역사이듯, 우리 역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언약 안에서 의와 거룩을 좇는 순례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야 합니다.

    비록 당장 눈앞에 구체적인 목적지가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가나안'이 있음을 믿고 과거의 습관과 잘못된 가치관을 끊어낼 때 진정한 축복의 통로가 시작될 것입니다.

  • 작성자 26.05.09 07:51

    <호크마 주석: 여호수아서>

    =====24: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 23장에 이어서 여호수아는 다시 한번 고별 연설을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각 지파지도자들을 세겜에 소집하였다. 특별히 소집장소를 세겜으로 정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큰 역사적 의의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세겜'(Shechem)은 (1) 일찍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성스러운 곳이며(창 12:6, 7) (2) 하란에서 돌아온 야곱이 '디나 사건'(창 34장) 이후 크게 각성하고 이방의 각종 우상들을 묻어버린 개혁의 장소일 뿐 아니라(창 35:4) (3)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대로 계약을 새롭게 한 맹세의 장소였기 때문에(8:30-35),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집하여 언약을갱신하기로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족장 시대 이후 줄곧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우상 척결 맹세를 중심으로 언약 갱신이라는 신성한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큰 효과가 있었다"

  • 작성자 26.05.09 07:52

    (Hengstenberg, Keil & Delitzsch, Vol. 2. p. 226-227).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 - 23:2주석 참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 여기서 '하나님 앞'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즉 (1) 언약궤가 세겜으로 옮겨져 18:6;19:51에서처럼 '언약궤 앞'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는 견해. (2) 제단이 세겜에 세워져 있음을 뜻하는 견해 등이다. 그러나 카일(Keil)은 헹스텐베르그(Hengstenberg)의 입장을 따라 이러한 견해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즉 여기서 '여호와 앞'이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수아에게 임한 것을 볼 때, 본절의 '여호와의 앞'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거룩한 종교적 의식을 치루는 신전 사상(神前思想)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Ibid)는 것이다.

    =====24:2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 - 창 11:26에 따르면 데라(Terah)는 아브라함, 나홀, 하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하란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일찍이 죽었기

  • 작성자 26.05.09 07:52

    때문에(창 11:28) 본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나홀 만이 언급되었다. 한편, 아브라함과 나홀의 부친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그의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거주하였으며, 205세를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창 11:31, 32).
    강 저편에 거하여 - 여기서 '강 저편'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으로,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거주했던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 지방을 가리킨다(창 11:31).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 여기서 '다른 신(神)'은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섬겼던 우상으로, 당시 갈대아 우르 지방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섬겼던 월신(月神, moon-god)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당시 이러한 우상 숭배에 빠졌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비록 우상 숭배에 빠지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역시 우상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Keil). 이러한 사실은 결국 이스라엘이 만백성 중 선택받게 된 것이 결코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그들도 옛적 조상 때에는 우상을 섬기고,

  • 작성자 26.05.09 07:52

    그 영향권 하에 있었던 똑같은 이방 족속이었으나,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소명(부르심)에 의해 구별된 민족, 언약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지금 이 은혜로운 사실을 회고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었던 것이다.

  • 작성자 26.05.09 09:14

    (3) 용서하는 자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옴(잠 19:11). 원수를 갚는 자는 상대편의 악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대적하는 악을 더 많이 만들어 놓는다. 요한 번연은 진리 파수를 위해서는 강경하였으나, 진리의 적들이 그를 욕할 때에는 온유하게 참았다고 한다. "분쟁"(* )은 "원수를 맺는"일에서 나오는 법이다. 분쟁은 언제나 그것이 확대될 위험성의 있고 확대되면 수습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잠25:8에,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하였고, 잠17:14에는 "다누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하였고, 잠18:19 에는,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고 하였다. "시기"(* )는 남이 나 자신보다 웃해진 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은 마땅히 남이 자기보다 우수함을 볼 때에 기뻐해야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나보다 우수한 자를 나의 선생으로 알 때에 기쁨을 가지게 됨. 선생이 없는 사람은 인도자 없는 소경과 같다. (2)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 작성자 26.05.09 09:14

    그것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보다 우수한 자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에는,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하였고, 전7:9에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하였고, 잠 27:4에는,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라고 하였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분노"하는 성질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많은 손해를 당한다. 고대(古代)의 유명한 학자 제럼(Jerome)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공적이 있으나, "분노"하는 성질이 과도하여 어거스틴(Augustine)에게 보낸 편지에도 분노를 나타냈다. 그것은 그의 업적에 커다란 오점(汚點)이 아닐 수 없다. "당 짓는 것"이란 말(* )은 어원적(語原的)으로는 '임금 노동자'(賃金勞動者)를 의미한다(Greijdanus). 이 의미에서, 이것은 육체의 유익으로 매수되어 단결해서 진리를 항거(抗拒)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진리를 위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게 된 단결은 작든지 크든지, 집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그것은 당을 지음이 아니다. 다만 비진리를 세우기 위하여 육체적 수단으로

  • 작성자 26.05.09 09:14

    서로 단결한 것은 작당(作黨) 행위이다. 고대의 제2에베소회의는 당파를 짓는 악한 사람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주회(主會)한 회의인데, 그 회는 비상하게 경건한 플라비아누스(Flaviaus)를 축출하였고, 이단자(異端者) 유두게를 포용하였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 회의는 성령이 주장하시기 않았다. 나는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 BK. 4. chap. 10).교회사(敎會史)에 나타난 대로 교황 그레고리(Gregory) 11세가 죽은(1378 A. D.)후에 교황권 쟁탈전으로 인하여 울반(Urban) 6세는 로마에서, 클레멘트 7세는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각각 교권을 가지고 근 30년을 분립하였으니, 이것은 순전히 권리를 위한 당쟁이다. "분리함"이란 말(* )은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화합성(和合性)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참됨과 거짓됨은 그 교회의 공동 고백과 권징 실시 여부(與否)로써 판별되고, 그 교회의 성원인 개인 신사들의 사생활의 완전 여부는 별도의 문제이다. 만일 누가 교회의 개인 신사들의 결점으로 인하여 교회적 생활을 버리고 물러선다면,

  • 작성자 26.05.09 09:15

    그것은 혹시 "분리" 행위가 되기 쉽다. 그러나 만일 누가 교회의 부패를 경고하며 진리와 의(義)를 증거하다가 교권의 억압(抑壓)으로 축출을 당한다면 그는 "분리"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영광을 얻을 것뿐
    의미한다. 곧, 이것은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진리와 표준에 위배되는 의견을 채택함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면, "이단"이란 칭호가 타파(打破)에 대한 편견으로 사용되니 실례(實例)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옳은 편에서 그릇된 편을 향하여 부른 파명(派名)인 동시에,그릇된 편을 향하여서도 사용하였다. 공정한 의미에서 "이단"은 역사적으로 고백해온 성경적 교리를 위반하고 다른 의견을 채택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잘못된 다른 의견을 채택하였다가도 조만간 그것을 버렸으면 그는 이단자 아니다.

    =========5:21
    투기 - 이것은 "시기"가 좀더 약화된 것이다. 이것은 남이 소유한 것에 대하여 심술이 나서 그것을 빼앗으려고까지 생각하는 악심(惡心)이다.
    술취함 - 신구약 성경은 술에 취하는 것을 금한다. 잠23:29-35;엡 5:18 참조. 술을 약으로 사용함이 허락되었는데 (딤전 5:23),

  • 작성자 26.05.09 09:15

    그것을 빙자하여 술을 탐해 먹는다면, 그것은 속이는 죄까지 범함이다. 신자가 술에 취하는 것이 불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할 때에 알 수있다. (1) 신자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니(벧전 2:9),술에 취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 실수하게 된다(레 10:9;겔 44:21), (2) 술에 취하면 일반적 행동에도 실수 하게 된다.(잠 23:29-35). 신자가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진리를 다 준행하지 못하는데, 술에 취하여서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으랴? (3) 술에 취함은 건강을 해하는 것이다.
    방탕함 - 이것은 음란 이외의 모든 무절제(無節制)한 향락주의를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는 진리를 악용(惡用)하여 이 세상 향락을 방종스럽게 취할 수 있다고 생가하면 안 된다. 신자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나 이제는 진심으로 율법을 지켜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순종할 자유인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겨야 할 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향락을 자기 마음껏 취할 처지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극기(克己)하며 사랑의 수고를 해야만 한다.

  • 작성자 26.05.09 09:11

    <호크마 주석: 갈라디아서>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 "육체"란 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부패성을 의미한다(롬 8:7). 이런 괴악한 것의 움직임이 우리의 눈에 감취어서 보이지 않느다면, 우리는 그것을 정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저히 나타나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지적하여 멸절할 방침을 세울 수 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 이 세 가지는 성적 죄악(性的罪惡)이다. 하나님과 원수된 육체(인간의 부패성)는 무엇보다 먼저 성적 죄악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힌다. 고전 3:16-17,6:13-20참조 성경은 사람의 성적 죄악이 자기 몸에 대한 범죄라는 의미로 말하기를,"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라"(고전 6:18)고 하였다. 곧, 그 성적 죄악은 몸이 주님의 성전된 거룩한 소속임을 위반한다는 것이다. 다른 죄악은 외계(外界)의 남들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지만, 성적 죄악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 특히 그 손해는 종교적인 면이 더욱 크다. 고전 6:15-17에 말하기를,"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 작성자 26.05.09 09:11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몸을 가지고 성적 죄악을 범하면, 그것은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범성죄(犯聖罪)이며, 주님 앞에 정절을 지키지 않는 훼절(毁節)의 죄도 된다. 안셈(Anselm)은 말하기를, "다른 죄들은 대항하여 싸움으로 이길 수 있으나, 성적 죄악은 피함으로야 이긴다"고 하였다. 요셉이 이 죄를 이긴 방법도 그러하였다. (창 39:1-18). 안셈의 말은 물론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는 성경에 의거한 것이다. 죄악의 많은 종류 중에는 매력을 가지고 유인하는 것들이 있는데, 성적 죄악이 거기에 속한다. 성적 죄악은 외모의 미(美)를 가지고 사람을 꾀어 넘어뜨리는 독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독사(毒蛇)의 이빨에서 나오는 살인독(殺人毒)과 같다. 또 그것은 마치 알프스 산의 아름다운 잔디 언덕과 같다. 많은 여행자들은 아름다운 잔디가 있는 땅을 든든히 디디고 발을 붙이려다가 떨어져 죽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음행은 멸망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음행자를

  • 작성자 26.05.09 09:12

    가리켜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려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으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잠 7:22-23)고 하였고, 그런 죄를 범하게 하는 집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잠 7:27)고 하였다. "음행"(* )은 특수한 범

    ========5:20
    우상 숭배와 술수 - 이것들은 종교적 죄악이다. "우상 숭배"라는 것은 하나님늘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 섬기려는 동기에서 생긴 행동이나.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거나, 혹은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그것에게 돌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육안(肉眼)으로 보고 야 믿겠다는 마음이 역시 우상 숭배의 사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교만이요 어리석음인 것이다. 보이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상 속성인데,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분으로 여긴다면 그 얼마나 교만한 행위인가? 죄 없는 스랍들도 두 날개로 그 얼굴을 가리우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한다(사 6:2). 출 33:20에 말하기를,

  • 작성자 26.05.09 09:12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였다. 욥 9:11에는,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라" 하였고, 딤전 6:16에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안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라고 하였고, 요일 4:12에는 말하기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하였다(시 18:11;골 1:15 참조). 히 11:3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고 하였으니, 보이지 않으시는 그가 모든 보이는 것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그의 보이지 않으시는 성질은 더욱 우리의 신앙을 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셨다. 보지 못하나 믿는 그 신앙은 더욱 고상하다. 그 이유는 ,(1) 보이는 감각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참 신을 그대로 믿는 까닭이며, (2) 신앙을 방해하는 감각주의(感覺主義)의 마음을 이기며 믿는 까닭이다. "술수." "우상 숭배"가 제사적(祭祀的)인 방면의 범죄라면

  • 작성자 26.05.09 09:12

    "술수"(* )는 예언적(豫言的)인 방면의 범죄이다. (1)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나온 예언은 천국을 중심한 하나님 말씀이지만, "술수"(術數)는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이다. (2) 예언은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케 함을 목적한다. 그러나 "술수"는 인간으로 하여금 낙심케 하든 지 혹은 요행수를 바라보게 하여 도덕적 반성을 잊어버리게 만든다.(4) 예언은 그것을 받는 자가 거의 뜻밖에 자주 의식(自主意識)에 의하여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客觀的啓示)를 받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술수
    의 말씀(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이적(異蹟)을 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적을 믿는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표준 이적들을 믿는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에 따라 그런 이적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시대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바로 살기만 하면 주님의 뜻인 경우 특별 섭리의 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술수"의 잔재(殘滓)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 이유는, "술수"는 우리의 신양을 해롭게 하며 또한 하나님께 욕을 돌리기 때문이다.

  • 작성자 26.05.09 09:13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 - 이 여덟 가지 죄악은 육체적으로 범하는 불화(不和)의 죄악이다. "원수르 맺는 것"(* )은 성경이 여러 가지로 금한다. 사람이 원수를 맺음은 자기와 충돌된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지 않음에서 기인된다. 신자는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출 23:4-5에,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고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하였고, 욥31:29에는,"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라고 하였고, 잠 24:17에는,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하였다. 롬 12:21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다. 우리가 원수에 대하여 선을 행함으로 몇 가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 (1) 하나님의 완전성이 나타남(마 5:48). (2)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심판장이 되는 참람한 죄를 면함(롬 12:19).

  • 26.05.09 12:11

    늘 그렇듯 좋은 설명입나다.

  • 26.05.09 11:22

    우리가 십계명의 제5계명, 엡 5장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이번 묵상에서는 '주 안에서'를 강조함으로써 더 심도 있고 방향을 달리해서다뤄 주신 것이 유익하고 좋네요.
    기독교인들이 간과하거나 많이 들어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악행을 계속하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돌아보게 하는 점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아 돌이키는 것도 인력으로는 안 되고, 은혜가 임해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패륜적인 범죄가 너무 빨리 번지고 있는 것 같고,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의 마음을 더욱 하나님께 두고 신실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먼저는 어른 된 부모가 더 정신을 차리고, 자녀들을 사랑해 줘야죠. 자녀의 인격과 독립성을 존중하고 자유를 지나치게 침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죠.
    자녀는 부모하기 나름입니다. 자녀는 유전자는 물론 습관과 행동을 부모에게서 고스란히 물려 받기 때문에 자식을 부모의 거울이라고도 하죠. 면류관도 되고요. 잘 키우면 부모는 자녀에게서 훌륭한 보상을 받게 되고, 못 키우면 가장 큰 고통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가족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 갑니다.💞

  • 26.05.09 12:13

    아멘!

  • 26.05.09 12:13

    성경이 말하는 부모 공경은 결코 맹목적인 복종이나 범죄에의 동조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주 안에서"라는 전제는 부모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공의가 우선함을 명시하며, 학대나 패륜적 요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신앙의 길임을 일깨워 줍니다.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의 환경인 '아버지의 집'을 떠나 복의 통로가 되었듯, 우리 역시 잘못된 굴레를 끊어내고 복음의 자유 안에서 건강한 관계를 세워가야 합니다. 모든 대인관계가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주 안에서의 교제"로 거듭나, 상처 입은 영혼들이 진정한 해방과 치유를 누리길 함께 기도합니다.

  • 26.05.09 15:12

    아멘 🙏

  • 26.05.09 12:15

    우상 숭배와 이단적 가치관으로부터 영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자 믿음의 결단입니다.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났듯, 영혼을 파괴하는 해악된 관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뜻에 부합합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성경적 요구와 인격적 학대에 맹목적으로 순종하기보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안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참된 회복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 26.05.09 16:29

    네, 공감합니다.

  • 26.05.09 16:31

    "주 안에서" 행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유효하며, 영혼을 파괴하는 반인륜적 범죄나 부당한 억압에 맹목적으로 굴복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자녀의 인격을 손상시킬 때, 자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둘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생명 존중의 가치에 부합하는 정당한 선택입니다.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의 환경을 떠나 새로운 신앙의 길을 개척했듯, 우리 역시 인간성을 파괴하는 해로운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영적 안전과 평안을 지키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자유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자녀가 학대와 고통 속에 방치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에, 위급한 상황에서는 전문 기관의 도움을 구하며 미움이 아닌 긍휼의 마음으로 자신과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가장 성숙한 신앙적 대처가 될 것입니다.

  • 26.05.09 16:56

    네, 매우 공감합니다.

  • 26.05.09 17:09

    영화 "해리엇"의 한 장면을 통해 성경 구절이 어떻게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아전인수격으로 왜곡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당시 흑인 노예 제도는 명백한 불법 체포와 인신매매라는 범죄에 기반한 반인륜적인 제도였음에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에베소서 말씀을 인용한 것은 성경의 본뜻을 심각하게 훼손한 비극적인 사례입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억눌린 자를 해방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선포하며, 결코 불의한 지배나 억압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주 안에서"라는 전제 하에 상호 존중과 사랑을 가르치지, 가해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나 범죄에의 동조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참된 정신인 자유와 은혜 안에서 모든 대인관계를 바로 세우고,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실천하는 믿음의 가정과 사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 26.05.09 17:21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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