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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Sermon
음성설교 받기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31-32
He presented another parable to them, saying,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and this is smaller than all other seeds, but when it is full grown, it is larger than the garden plants and becomes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AIR come and NEST IN ITS BRANCHES." Matthew 13:31-32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3
But now faith, hope, love, abide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1 Corinthians 13:13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한1서 5:11
And the testimony is this, that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1 John 5:11
천국에 관한 네 번째 비유는 야고보서를 중심으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는 믿음에 수반되는 행위의 중요성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로마서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믿음이 나아가야 할 다음 과정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결코 로마서의 가르침과 대치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We’d better take a look the meaning of the fourth parable about the kingdom of heaven related with James, because it mentions about the importance of work following to faith. It sounds like to stand against the teaching of Romans, which tells us to get righteousness only through faith, but James reveals us the next step of faith, so it is not to stand against Romans.
이러한 가르침의 강조점이 다른 이유는 당시 초대교회의 복음전파의 경로와 상황을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터키주변의 아시아 전도를 마친 바울이 장차 스페인 쪽으로 전도여행을 가기위하여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선교비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신앙관을 피력하고 또 그들의 신앙을 오직 복음에 서게 하기 위한 복음적 신학이 로마서에 담겨 있습니다.
The reason why these two letters emphasize in different points will be understood by the knowledge of the path and situation of the evangelism of the first generation church. Paul wrote a letter to the church of Roma in ordre to ask for support the mission trip to Spain. So he revealed his point of view of faith, with which he wish to make them stand steady in correct teaching of the Gospel.
로마교회는 바울이 전도하여 세운 교회가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을 받은 제자들이 바울의 박해를 피해 흩어져 각지에 복음을 전할 때 세워진 교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복음의 체계가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채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의로워질 수 있다는 이행득의의 신앙과 믿음으로 된다는 이신득의의 신앙이 혼재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의의 신학을 로마서에 담아서 보냈던 것입니다.
The church of Roma was one of the churches which were established by the disciples who had been escaped from the persecution of Paul after the Pentecostal Holy Spirit descension. So the Gospel could not be systemized yet, being mixed of both of doctrines between the justification by faith and the justification by work. So Paul wrote the letter to the church of Roam in order to make it clear, the Gospel of the justification by faith.
그러나 이 서신이 역으로 예루살렘 교회에까지 전달되고 읽히면서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다보니 행함은 따르지 않고 믿으면 다 된다는 식의 방종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네 명의 야고보가 나오는데 그 중 많이 거론되는 열두제자 중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제자들 중 처음으로 순교를 당하게 되고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중 하나로서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로마서에 의한 믿음에 대한 오해를 풀게 하려는 의도로 기록된 야고보서는 믿음에는 행위가 수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However, when this letter had been sent to the church of Jerusalem inversely, some came to get the attitude of self indulgence only with faith without work. James was the chairman of the church of Jerusalem. He was the younger brother of Jesus. With the purpose to solve the misunderstanding for the Gospel by the letter sent to Romans, the letter of James contains that faith should be followed by proper works.
이것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으로서 복음의 한 내용이 등장하고 지나치거나 오해된 면이 발생하면 거기에 따른 신학이 또 제시되면서 오늘날까지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된 것입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황에 따라 사람들의 인격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상황에서 이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This is the situation of the time when the Bible had been written in origin. A doctrine was told and if there was a misunderstanding for that, then, another theology might be suggested, being sent even to each one of us today. This is the proper path of sending the Gospel to reveal the way of the providence of God to work through people. Now what we need to consider is how we approach the matter of faith and work in our situation.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에 다 동의하지만 여전히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이행득의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현대 기독교의 큰 두 흐름인 개혁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개혁주의는 오직 믿음을 강조하고 자유주의는 행함을 강조하여 마치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다른 가족인 것처럼 분리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개혁주의에서 오직 믿음을 외치면서 행함이 따라야 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계명을 지키는 것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자유주의는 행함이 강조되다 보니 믿음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Today many christians must agree with the fact that we can be saved by faith, but still have the idea to be justified by work in some portion. There are two different flow in christianity today, they are the reformed and the liberalism. The Reformed believes the justification by faith, while the liberalism insists justification by works, which is the reason why they are separated each other like different family. Of course, in the teaching of the Reformed, we can find emphasizing work but it focuses on the commandment, while the liberalism are weak in faith and the sovereignty of God, because they insists work by their own will.
이러한 상황에 대한 답을 주께서 주신 천국에 대한 네 번째 비유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 드리자면 행함은 온전한 믿음이 있을 때 얻게 되는 결실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믿음의 행위가 짐이 되어서도 아니 되고 믿음에 우선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겨자씨는 믿음이 크기의 문제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표현 때문에 흔히 믿음이 자라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 여기에서의 믿음은 겨자씨가 가진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생명은 곧 영생, 즉 영원의 세계에 대한 믿음입니다.
The fourth parable of the Lord for the kingdom of heaven provides us with the answer for this situation. Speaking conclusionally, work is like fruit only when we have the faith in perfection. This reveals that the work of faith should not be a burden, nor be priority to faith. The mustard seed in this scripture reveals the fact that faith is not the matter of size. Because of the expression that the mustard seed will be grown up to be a tree, people used to think that our faith is to be grown up, but in fact, here, the faith is to be revealed by the life of the mustard seed, while this life is the faith for the eternal world, the eternal life.
우리의 영이 온전하게 창조되었고 주 안에 하나 됨으로 오직 살려주는 역할만 하게 소생한 것과 주께서 우리 영과 연합하시고 부활하신 영혼과 신령한 몸까지 우리 인격에 연합하신 것이 사실로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인데 이것은 영혼의 기능을 확대하고 탁월하게 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다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자신됨으로 충족하도록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나친 것이 본래로 회복되고 그렇게 자신다움을 회복하게 되면 더 이상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자연스러움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몸의 대속이 이루어져 더 이상 몸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몸이 구원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도구가 되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에게 닥치는 어떠한 상황이라도 그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과 모든 조건은 하나의 현상으로서 실체가 아님을 인식하고 오직 영원에 속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We can have the faith of perfection only when we know that our spirit is created in perfection, being revived by the unification with the Lord, while the resurrected Lord is united with our whole self. The end of faith is the salvation of soul, which does not reveal to extend the feature or a function but to reveal to restore as it is. When we are going to recognize that everything has been given us as grace in satisfaction, then, each excessive thing will be restored not to bother any more. In this process, the redemption of the body will be done, not to worship body but to consider it as the best tool for the salvation of soul. In any circumstance, we can overcome to consider it to work altogether for good eventually, while we can get the distinguishment to recognize that all situation is just phenomena not a true subject.
우리의 행함은 아는 것을 좇아 나타나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영원에 속한 것이 실상임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의 행함은 당연히 그 실상을 좇아 나타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위가 선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음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영원에 속한 믿음과 항상 있을 소망, 그리고 사랑을 좇아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행함의 열매로 나타날 것이고 그러한 삶이 오늘 본문에 말씀하신 나무의 모습입니다.
Our work will follow knowledge. When we would recognize that things to be belonged to the world of eternity are the true subject with faith, then, which will be followed by works. There is no rule to judge which work is good or bad. Only the eternal faith, everlasting hope, and the fruit love will be born in our living, which is the shape of the tree mentioned in the scripture of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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