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창 시리즈 1/4
이매창과 유희경의 상사相思 짝사랑
이매창李梅窓 (1573년~1610년)
황진이와 조선의 명기이면서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3대 여류 시인.
부안현 아전과의 첩에게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시와 거문고에 능란,
부친이 일찍 사망하자 16세에 기생이 되었는데
당시 현감은 미모를 중시하고 풍류마저 없는지 하룻 밤을 끝으로 버렸다. 매창은 수궁사를 바쳤는데...이에 첫 비련을 맛본다.
매창은 그뒤로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는데 그녀의 시 증취객贈醉客에 잘 나타나 있다.
잠자리하자는 당김에
비단적삼이 찢어지도록 거부하는 이유는 행여 맺힌 정이 끊어질까 두려워서 그런다고 했다.
이러길 2년이 지날 때 운명의 유희경을 만난다.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1545~1636)은 효성 깊은 천민 신분에서 성실 정당한 노력으로 출세했다.
예학자 남언경의 제자가 되어 깊은 학문을, 박순의 제자가 되어 당시를 익힌 그는 당대 최고급에 해당하는 시인이었다.
한양 양반가에서 장례직을 뛰어나게 수행하다가1591년(선조 24년) 초봄, 46세의 유희경은 서울을 떠나 명기 계생이 있다는 부안으로 향했다.
매창이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한양에서 온 시객詩客이란 말을 듣자,
"유희경과 백대붕 선생님 가운데 뉘신지요?"
"내가 유희경이오."
그만큼 촌은과 백대붕의 문명이 멀리 부안에까지 알려져 있었던 터이다.
이것이 애틋한 그리움의 서막이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에게 빠져들었다. 28년의 나이 차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날 유희경은 기쁜 마음으로 시를 썼다.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 들었는데
시구와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진동했지.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구나.'
화담 서경덕계의 문인으로 기녀를 멀리하고 반듯한 선비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지만, 이때 매창을 만나 황진이를 만나 30년 면벽을 깬 지족선사가 되고 말았다. 평생 처음으로 부인 외에 ‘파계’를 했던 것이다.
며칠을 지낸 후 언제 한양에서 호출할지를 몰라 불안하여, 곧 다시 만나면 그때는 열흘간 정을 나누기로 하고서 서둘러 떠났다.
여기까지는 천생연분같았다.
몇달을 기다려도 안 오는 임을 그리워 하며 불후의 시를 짓는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내 생각 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누나.'
유희경과의 첫사랑은 매창의 영혼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그녀는 천리 밖 정인을 모질도록 그리워했고, 그것은 나중에 서러움과 한으로 응어리지기까지 했다.
한양의 유희경 역시 초기엔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전쟁은 길어지고 기다림은 막막하여 흐르는 세월에 애탄다.
'마음 속 그리운 정 말로는 다할 길 없어
밤새 생각타보니 머리카락 반이나 세었구나.
신첩의 괴로워하는 이 심정 아시려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이 손가락을 보옵소서.'
그리움에 그리움을 더하는 이들의 독한 인내의 사랑이었지만, 시절은 이들의 편이 아니었다. 7년 전쟁의 불길이 조선땅을 온통 휩쓸고 갔으며, 전후에도 세상이 어수선하긴 마찬가지였다.
왜란 중에 충정의 길에 올인한 유희경은, 독보적인 예학과 임금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얻은 관직,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분상승으로 인한 양반들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자신도 애가 타지만 여류시인 매창의 간절한 연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정유재란 직후 1598년 김제군수 이귀李貴(딸의 숨은 공로로 인조반정 성공하여 1등 공신, 이조참판, 대사헌, 좌찬성)의 인품과 문학에 반한 매창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기댔다.
이귀와 매창은 정은 간직하되 기다리지 말자며 이별 후, 부안현감 윤선(후에 의정부우참찬)과도 마음이 통해 애첩이 되어 시와 음악의 사랑을 나누었지만, 윤서와도 정만 간직하고 기약없는 이별을 한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16년만인 1607년, 공주참판을 마치고 온 유희경과 매창이 다시 만날 때는 63세와 35세 였다.
두 사람은 눈물 흘리며 두 손을 부여 쥐었지만, 행여 고약한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자신은 물론 자손들에게까지 흠결이 미칠 것을 염려하는 태도를 보이고 다음 날 일찍 떠나자, 매창은 절망한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610년 매창은 38세의 나이로 죽어 부안읍 남쪽 봉덕리에, 유언 따라 손때 묻은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녀의 부음을 들은 유희경은, 본인을 향한 그리움 일로로 평생을 점철한 매창을 생각하며, 고마움과 허전한 마음으로 시를 지었다.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매창이 죽은 뒤에도 유희경의 생애는 신선같은 풍모로 20여 년 92세까지 이어졌다. 승승장구하는 노년을 보내면서 80세에 금강산을 유람하며 매창과의 첫 만남 그 시절을 돌이켜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사랑이 아니라 한때의 풍류였다.
가엾구나 매창이여!
뭇사람과 통정을 했지만
마음만은 일로였으니
가여워라 가여워라!
그대의 짝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