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1907-2000)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에 일본에 가서 일본 니혼 대학 영문과를 중퇴학,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학사 학위증을 받았다.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업하여, 조선일보에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라는 시를 발표하여,,문단에 데뷔했다. 또 조선일보에 평론 ‘시의 기술 인식 현실 등 제 문제’를 실으므로 평론가로 활동했다.
1933년에 이상,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과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l시를 쓰면서 문학활동을 하였다. 1936년에 첫 시집 ‘기상도’를 발표하였다.
1942년에 낙향하여 고향 근처의 경성 중학교에 영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나중에 영어 교과가 없어지자 수학을 가르쳤다.
광복 후, ‘조선문학동맹’‘’에 가입하였다. 소련이 북한에 진주하자 월남하였다.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하자 조선문학동맹에서 탈퇴했다. 중앙대, 연세대 서울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당하였다.
그의 문학세계는 T.S 엘리엇의 영향을 받아 주지주의 이미지즘 시를 주로 썼다. 동시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기교주의를 비판하며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전체시'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그의 초기 시들은 자신의 이론에 지나치게 충실하여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흩어져 있을 뿐 시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런 결점들은 찿복되었다. 평론 면에서는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한국 시문학계의 한 전환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우리나라 문학사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주지주의 시의 도입과 그 창작, 과학적 방법에 의거한 시학(詩學)의 정립을 위한 노력, 자연발생적인 시를 거부하고 의식적인 방법에 의한 제작의 강조, 음악이나 감정보다는 이미지와 지성의 강조, 민족 및 사회현실의 수용과 모더니즘의 극복, 그리고 전체시의 주장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원본 김기림 시전집』(박태상 주해)은 많은 사람들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새노래』에 수록된 시들과 새로 찾은 75편의 시에 주석을 단 원본 시전집이다.
원본 시전집에 실린 시들은 당시의 맞춤법과 띄어쓰기, 외래어 표기에 의존하기 때문에 표기법이 현재와 많이 다르다. 따라서 발간당시의 원전을 그대로 제시하고 필요한 경우 주석을 붙여 설명했다.
『바다와 나비』는 종이 상태와 인쇄 상태가 좋지 않아 원본의 활자를 판독하기 어려워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주석을 달아 당시 표기대로 옮겨 적었다. 새로
찾은 시들은 가능한 대로 발표지를 찾아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부록으로 김기림을 가장 잘 이해했던 이상(李箱)이 쓴 「김기림에게 보낸 서신」 7통을 실어 그 당시 문단에서의 시인 김기림의 위상을 살펴보고, 김기림의 방대한 저작물 중 시 목록만을 정리하여 실었다.
원전비평가인 프레드슨 바우어즈는 원전을 확정해내는 과정에서 문서적 증거, 기본 텍스트의 결정, 상이점들의 대조 조사, 판본의 족보, 결정본의 확정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러한 원전의 확정과정은 다른 어떤 방법론보다 선행되어야 할 기초적이고 토대를 이루는 작업일 것이다.
김기림은 1930년 4월부터 폐간되는 1940년 10월까지 《조선일보》의 기자와 학예부장 등으로 근무하였으며, 1930년 9월 6일에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처음으로 발표한 이후 1950년 5월 《연합신문》에 ?조국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발표할 때까지 약 20년간 활동했다.
김기림은 1936년에 첫 시집인 『기상도』를 창문사에서 시인 이상의 장정으로 펴낸 후, 1939년 두 번째 시집 『태양의 풍속』,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세 번째 시집 『바다와 나비』, 1948년 네 번째 시집 『새노래』를 발간했다. 발간 당시의 시어가 그대로 생명력을 갖춘 상태로 원본시집을 펴내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당시 김기림은 비평을 겸하고 있어서 시가 너무 추상적이고 난해한 시사적 문명용어의 나열에 그칠 수밖에 없는 한계가 드러난다. 1930 ~ 40년대 식민지현실은 녹녹치 않아서 요즘처럼 만능 엔터테이너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김기림은 친구인 이상을 특히나 좋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기림은 이상뿐 아니라 전문 작가로서 정지용과 박태원도 존경했으며 그들과의 만남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인간적으로 김기림은 술을 마시지 못한 것에 비해서는 구인회 멤버들을 비롯해서 경향파 작가까지 매우 폭넓은 사람들과 소통과 교류를 즐겼던 화통한 문인으로 판단된다.
김기림 원본 시 전집의 출간은 우선 모더니즘을 우리나라에 크게 확산시킨 비평가인 동시에 그것을 직접 실천한 전문시인으로서의 김기림의 역할과 위상을 새롭게 조명한다. 근래에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김기림의 초기시를 무조건적인 근대문명에 대한 동경과 찬양으로 몰아가던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고 그가 근대문명에 대해 진지한 비판적 성찰을 했으며, 식민지의 왜곡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를 거리를 두려고 하는 시도를 했었다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김학동이 유족을 인터뷰해서 시인의 전기적 생애 작업과 작품 목록을 일차적으로 정리해주었다면, 김용직은 장시 <기상도>와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의 비교를 통해 기법상의 차이를 규명하는 동시에 모더니즘의 시도를 위해 김기림이 한때 공산당에 입당했던 S. 스펜서를 수용했다는 것으로, 시단의 새로운 진로를 찾으려 모더니즘과 사회성의 종합으로 지향하였다고 제시하였다고 보았다.
첫댓글 선생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덕분에 문학에 대한 깊이가 더해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