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평(西安平)의 위치를 찾아봅시다.

지도설명: 홍대용의 연행도입니다. 요동반도의 지명과 강들의 위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서안평의 위치에 대해서 해석의 난조를 보이고 있는것이 작금의 현상입니다.
충분히 근거사서들을
검색할 수 있는 실력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기록의 해석을 왜곡하며
오히려 큰목소리로 군림하고 난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
遼東郡,秦置。屬幽州。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
縣十八:襄平。有牧師官。莽曰昌平。新昌,無慮,西部都尉治。望平,大遼水出
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長說。房,候城,中部都尉治。遼隊,
莽曰順睦。遼陽,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莽曰遼陰。險瀆,居就,室偽山,室偽
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顯,安市,武次,東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
鐵官、鹽官。西安平,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
海。沓氏。
*平郭,有鐵官、鹽官。西安平,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한서><지리지>는 서안평을 요동군에 속한다고 하며 그 위치를
비교적 요동반도의 서남부에 배치된
평곽의 남쪽, 문현의 북쪽에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沛水의 흐름을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의 평곽은 개주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서안평은 개주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실재의 흔적은 많은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리적인 특징으로 추정하면 평곽에 철관과 염관이 있었다고 함으로 서안평도 염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
니다.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高句驪,莽曰下句驪。屬幽州。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縣三:高句驪,遼山,遼水所出,西南至遼隊入大遼水。又有南蘇水,西北經塞外。上殷台,莽曰下殷。
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다시 현도군 조에서는 마자수를 설명하고 있는데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간다고 하며 이 물은 다시
서남쪽에 이르러 서안평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자수는 서개마(개주)의 남쪽으로 흐르는
고니하(古泥河)=浿水=청하=대통강으로 부르던 물로서
서북으로 역류하여 소요수(염난수)와 합류하며 다시 다른 경로의 서남으로 흘러서 서안평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추정이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요동만위치에 있어야 될 이 강물길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마자수는 현 국경의 압록강과는
어떻게 다른것인지는 물의 흐름으로 알 수 있습니다.
현 국경의 압록강은 서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없습니다.
<후한서>〈동이열전>고구려조
전략...句驪一名貊*(耳)*。有別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一]
注[一]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위의 현도군조에서는 서안평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마자수는 염난수와 합류한다고 하였는데
여기
서는 소요수와 합류한다는 대목이고, 이 소요수를 근거하여 고구려의 별종인 맥이라고 부르는 종족이
살았는데 이들을 소수맥으로 불렀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소수맥이 살았다는 개주의 서남쪽에 있어야 할 소수, 즉 소요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의 기록중에
<삼국지> 권 3의 <동이전>이나 <수서> 권 8의 <고려전>에 요서
안평을 일명 서안평
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록상의 오류가 아니라 서안평의 윤몰과 관계되는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一]하략
注[一]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魏><正始>中, 入寇<遼西><安平>,《三國魏志》卷三
《東夷傳》·《隋書》卷八一《高麗傳》[遼西安平]
作[西安平]. 按《後漢書》《郡國志》二<安平國>屬<冀州>,《志》五,
<西安平>屬<幽州><遼東郡>.
<遼西郡>沒有<安平>或<西安平縣>. 這裏[遼]字衍,
或[遼]下脫[東]字. 爲<幽州>刺史< 丘儉>所破.
其玄孫<乙弗利>, <利>子<釗>,
<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 <建國>四年, <慕容元眞>率衆伐之, 入自
<南陝>,
戰於<木底>, 大破<釗>軍, 乘勝長驅, 遂入<丸都>, <釗>單馬奔竄.
<元眞>掘<釗>父墓, 載其屍,
幷掠其母妻·珍寶·男女五萬餘口, 焚其宮室, 毁<丸都城>而還.
自後<釗>遣使來朝, 阻隔寇 , 不能自達.
<釗>後爲<百濟>所殺.
<위서> 고려전 교감기
魏正始中, 入寇遼西安平, ->
위정시(240-249)중에 요서안평을 침입하여, ->
三國魏志卷三0東夷傳ㆍ隋書卷八一高麗傳「遼西安平」作「西安平」. 按後漢書郡國志二安平國屬冀州,
志五,
西安平屬幽州遼東郡. 遼西郡沒有安平或西安平縣. 這裏「遼」字衍, 或「遼」下脫「東」字.
《삼국지ㆍ위지》권30 <동이전>ㆍ《수서》권81 <고려전>에는
「요서안평」이「서안평」으로 되어
있다. 생각컨대《후한서》<군국지>2에는 안평국은 기주에 속하며, <군국지>5에는 서안평이
유주 요동군에
속한다고 하였다. 요서군에는 안평 혹은 서안평현이 없다.
여기서「요遼」자는 연衍(군더더기)자字이거나, 「요遼」자 아래「동東」자가 탈락된
것이다.
<후한서><동옥저>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에 대한
주석
沈欽韓曰, 明志,海州衛, 本沃沮國地, 今奉天海城縣.
又奉天蓋平縣,高麗國蓋牟城, 本其地.
* 주석자 심흠한은
동옥저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본옥저의 위치를 설명하기를, <명지>에 나오는 해주위가 본 옥저국지이고,
그곳은 지금의 봉천 해성현이며,
개평현이었다. 고구려의 개모성이 '그 땅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구려개마대산은 당연히 요동반도의 천산산맥, 또는 단단대령을 벗어날 수 없고 동옥저는 그 천산
산맥의 바로 동쪽에
그리고 평양성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것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개마대산 동쪽에는 동옥저가 있었기에 요동군의 서안평이 존재할 수 없는것입니다.
만약에
단동지역까지 요동군이 있었다면 요동반도의 중남부에 속한 많은 지명들도 포함이 되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살수의 위치는 청천강이 아니라
초자하입니다.
초자하는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으며 벽류하의 동쪽에 있는 장하로 합류합니다. 그러니까 이곳을 동옥저 지역
이라 하는것입니다. 구산은
벽류하라고 주장하였음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거의 대동소이한 위치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살수의 기록입니다.
○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大獸林原}>, 號爲<大武神王>. <<삼국사기>> 상 <고구려본기> 2
대무신 27년조
대무신 27년(서기 44) 추 9월 한 나라의
광무제는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으로
군, 현을 삼으니, 살수의 남쪽이 한나라의 영지가 되었다.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시니 대수촌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이라 하였다.
(이 전쟁으로 한달뒤 대무신왕이 서거한것으로 추정됨) 필자주.
그렇다면 살수의 남쪽이 어디일까요? 다시 다음 기록으로 살수의
남쪽을찾아 보시겠습니다.
[15卷-高句麗本紀3-大祖大王-04年]
○四年, 秋士{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대조대왕 4년(서기 56) 7월,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으로 성읍을 삼으니, 경계가 동으로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 살수에 이르렀다.
여기서 동으로 창해에 이른다라는 해석은 지도를 참조하시면 요동반도의 남쪽 해변에서 동으로는 창해라는
해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해설만으로는 함흥의 동쪽에 있는 동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나, 다음으로 연결되는 남으로는
살수에 이른다는
기록이 함흥의 동 옥저설을 부정합니다.
만약에 살수가 함흥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면 청천강과는 관계가 없는 지명이 되는것입니다.
그리고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와서 정벌을 한곳이 함흥의 남쪽이 되어야 한다니 이때의 살수는 평안도와는
관계가 없는 지명입니다.
참고로 이병도박사의 <한국고대사연구> 269쪽에는
삼한도라는 지도가 있는데 옥저의 위치를 함경남도로
비정하고, 북옥저의 위치를 함경북도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함경남도의 남쪽은 텅텅빈
바다밖에는 없는데 그 곳이 살수라는 설명이 전연히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옥저와 북옥저의 거리가 천여리 라는 기록도 무시하고 지도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방향도 옥저와 북옥저가 맞지를 않습니다. 지도상 함경남도와 북도는 동서간이라야 맞는얘기고, 남 북간은
틀린 설명이 아니겠습니까?
숨겨진 안압지(雁鴨池)의 수수께끼


사진설명: 위 고분벽화에 봉황이 오동나무(?)를 향해 날으는 그림입니다. 죽은자들을 소생시키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생기(生氣)의 화신으로 봅니다. 이 그림안에는 용과 봉황의 그림이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물과 불이 생명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이 나무를 우주목으로 보기도 하는데 애매한 추정이지요. 보기에도 키가 훌적 큰것이 오동나무처럼 보이네요. 씨가 떨어져서 다시 새끼나무가 크는 모양도 마치 오동나무의 어릴때 모습처럼 보입니다. 봉황이 나타날때는 나무에 매달려 있던 열매들이 땅으로 떨어져서 새싹을 틔우고 아낙네들의 나들이가 분주한 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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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장도의 보탑초라는 바위로 조천지의 가운데 있던 바위입니다.
물에 떠있는 무덤이라는 뜻으로 부도(浮屠)의 표상이 된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바위에서 한웅님의 조천의식이 있었던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필자는 5년전인 2002년도에 <<신시본토기>>를 쓰면서 경주 안압지의 구조물에 대해서 특별히 소개드린
대목이 있습니다.
전설속의 삼신산을 단순이 모방한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말씀 드린것입니다.
당시에는 아무데도 신라가 발해해협에 있는 장도까지 진출했었다는 기록을 본일이 없었기 때문에 안압지와
연계시킬 수 있는 동기가 전연히 없었지만 현장을 답사하고 돌아온 이후 안압지를 연구하다가 지당의 북쪽
호안으로 별도로 떨어져 시설되어있는 두개의 바위섬을 발견 한것입니다.
이 두개의 바위섬은 삼신산을 상징하는 삼도와는 관련이 없는 섬처럼 보일 뿐만이 아니라 삼신산의 상징
만을 갗출려면 구태여 있어야 하는 바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삼신산 지역으로 알려진 현장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바위들이었는데 이 바위
들까지 상징물로 조경이 된것입니다.
현장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바위일 뿐만이 아니라 풍류도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선조들의
조천의식을 치루던 바위를 빼놓을 수는 없었겠지요.
필자는 책을쓴 이후로 수년간을 안압지에 대한 깊은 정보를 찾고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무왕 능비문을 만나게 된것입니다.
떨어져 나간 많은 기록들은 제쳐두고라도 3행의 문장만으로도 은어를 이용하여 안압지를 알리고 있다는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안압지는 계획된 문무왕의 숨겨진 유택으로 추정이 됩니다.
당시 주변의 정세들이 전쟁이 많은 세상이었음으로 거의 절대적으로 장묘지를 숨기고 가묘를 세워서
본묘를 보호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증상들이 문무왕의 대왕암 유적에서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대왕암의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최첨단의 기술을 모두 동원하여 발굴을 시도 하였지만 근거가 될만한 유물
은 찾지를 못한것이 그 근거입니다.
안압지를 어떤이들은 궁정의 후원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동쪽으로 후원을 삼는 집은 명당이 될 수 없습니다. 동쪽은 사당을 두는것이 관례입니다.
다음글은 안압지의 일반적인 내용입니다.
경주 안압지
작품명 : 경주 안압지. 장르구분 : 누정건축. 지정종목 : 사적 제18호. 용도별 구분 : 연못
제작시기 : 674년.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관련인물 : 문무왕(文武王, ? ~ 681)
개요
[안압지 배치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74년(문무왕 14)에 '궁내(宮內)에 못을 파고 산(山)을 만들고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 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안압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못의 이름에 관해서는 초기에 간행(刊行)된 <동국여지승람(東國
與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등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안압지란 이름은 조선시대 초기에 와서 폐허(廢墟)가 되어버린 신라의 옛 터전에 화려했던
궁궐은 간 곳이 없고 쓸쓸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못 위에 안압(雁鴨)들만 노닐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문무왕 19년에는 못 서편에 동궁(東宮)이 건립되었다는데, 임해전(臨海殿)은 아마도 정전 (正殿)의 이름
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안압지는 동궁에 속해 있던 못인 것이다.
이 곳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못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었던 곳 이기도 하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연지와 주변건물]
현재의 모습은 1975년부터 2년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로 얻어진 자료를 토대로 정비한 것이다.
이 곳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5년 3월부터 1976년 12월말까지 2년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못의 둘레는 호암석(護岩石)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었는데 서암(西岩)과 남암 (南岩)은 직선으로,
북암(北岩)과 동암(東岩)은 곡선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못 안에는 크고 작은 3개의 7섬이 있었고, 물은 동쪽 북천의 지류(支流)에서 끌어온 것 같으며,
넓이와 높이가 약 40㎝정도의 화강암으로 된 수로를 통하여 들어온 물은 2개의 큰 석조를 거쳐서 못에는 폭
포와 같이 낙하하도록 만들어졌다.
출수구(出水口)는 북암 중간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마개가 있어서 수위(水位)를 조절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목관(木管)을 통해서 빠져나간 물은 당시의 하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못 주변에서 회랑지(廻廊址)를 포함하여 26개소의 크기가 다른 건물 터가 확인되어 그 중 서쪽 못가의 5개
건물 중 3개만 신라시대의 건물로 추정하여 복원했다.
초석(礎石)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을 그대로 모조하여 회랑지를 제외한 건물 터에만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안압지와 임해전 등 부속건물을 추정하여 50분의 1로 축소한 모형도를 만들어 원래의 임해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
[입수구 시설]
원지(苑池)는 동서길이 약 190평방미터의 평면 속에 15,658㎡의 못을 조성하였다.
못가의 호(湖)안은 다음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 호안은 절묘한 굴곡의 곡선으로 이루어졌으며 서쪽과
남쪽 호안은 건물을 배치하고 직선을 이용하여 조성되었다. 서쪽 호안은 몇 번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못
속에 돌출시키기도 하였다.
못 속에는 삼신도(三神島)인 방장도, 봉래도, 영주도가 배치되었다. 남쪽 섬은 1,090㎡, 중앙섬은 66㎡,
북쪽섬은 495㎡ . 못 호안 주변과 섬에는 괴석을 가득히 배치하였다.
못의 호안 높이는 동, 북, 남이 210㎝ 정도이고, 서쪽의 궁전 건물이 있는 호안은 540cm이다.
이는 못가의 누각에 앉아 원(苑)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곳에서도 동양인은 원림(苑林)을 한 곳에 앉아 바라보는 습성을 보여 준다.
연꽃잎이 부분적으로 서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못 바닥에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옮겨와 깔아서 물이
맑았던 것이며, 못 가운데쯤 '井'형 목조물(길이 134cm, 높이 101cm 정방형)을 못 바닥에 박아서 그 곳에
연(蓮)을 심어 연뿌리가 번져 나가지 못하게 만든 시설 때문이다.
못 물의 깊이는 약 18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못을 바다로 상징하여 넓게 보이고자 한 것인데,
연꽃이 가득하면 답답하고 좁게 보이기 때문에 못 바닥에 수초가 나지 못하게 강회나 자갈돌을 깔았던 것
이다.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 가의 5개 건물 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제 1, 3, 5 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 유물을 본따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추정하여 재현한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74년(문무왕 14)에 '궁내(宮內)에 못을 파고 산(山)을 만들고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 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안압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못의 이름에 관해서는 초기에 간행(刊行)된 <동국여지승람(東國
與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등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안압지란 이름은 조선시대 초기에 와서 폐허(廢墟)가 되어버린 신라의 옛 터전에 화려했던
궁궐은 간 곳이 없고 쓸쓸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못 위에 안압(雁鴨)들만 노닐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이상으로 볼때 안압지의 탄생부터 무엇인가를 감추려고 하는 저의가 보이는듯 하지 않습니까?
능비가 기록으로 전하는 주변의 설명이 없었다면 위의 기록처럼 궁중에 연못을 판것으로 알았을것입니다.
그러나 안압지의 최초의 자리는 궁내가 아니었습니다.
연못을 판다음 임해전을 지었지요. 그리고 삼년후에는 안압지의 서편으로 동궁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서쪽이라고 하였으므로 많은 건물중 하나였을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원지(苑池)의 조경시설을 은폐할 의향이 없었다면 왜 떳떳이 이름을 밝혀놓지 못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비로서 기록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까?
적어도 동양에서는 최고로 아름다운 원지라고 하였습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였던 진시황은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였으나 삼신산은 오르지 못하고 난지궁안에
원지를 만들고 봉래산을 모방하였으며, 한나라의 유방역시 삼신산을 찾다가 많은 배와 인원들을 수장시키고
결국 자신의 궁내에 태액지(太液池)를 만들고 봉래. 방장. 영주산을 모방하였습니다.
크기로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를 못합니다만.
최초의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알쏭달쏭한 경진(鯨津)으로 부터 시작하여
월지(月池)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월지는 음택(陰宅)과 상계될수 있다고 보고, 나중에 등장하였다는 안압지
(雁鴨池)에 대하여는 후에 부쳐진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소개되고 있으나 필자는 안압지에 대하여는 압록강
이라는 이름의 근원을 생각할때 개주에서 발견한 용봉(龍鳳)암의 유래에서 옮겨 온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도 듭니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고조선의 역사를 송두리체 접수하기 위해서 발광을 하면서도 그들이 자랑하는 도교의
발원지인 삼신산에 대해서는 확실한 주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에 중국을 통일하였던 진시황이나 한의 고조가 모두 삼신산을 점유하는데는 실패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기록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니까요.
삼신산의 조경시설은 고구려의 진주지, 백제의 궁남지, 신라의 안압지, 고려의 만월대 동지와 수창궁원등,
조선의 경회루외 다수의 원지등이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경주의 안압지는 일본의 나라시대 원지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모르고 있던 사이에도 한국의 삼신산 조경문화는 예집트. 불란서. 독일등으로 진출하여
한국인들의 뿌리깊은 전통문화를 세계인들에게 빛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마침 봉황이 등장하는 장면을 오동나무와 같이 엮어서 소생의 화신이라고 설명 드렸기에 그렇
다면 19행에 등장하는 적오(赤烏)란 무엇인가를 간단하게 설명드려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학계에서는 지금까지도 봉황과 삼족오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가르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
로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구분은 너무도 명확한 것입니다.
<19행> … 풍교를 흠모하여, 단증(丹甑)이 여러 번 나오고, 황▨(黃▨)이 하늘을 진호하였도다. … 적오
(赤烏)가 재앙을 나타내고, 황웅(黃熊)이 우러름을 표시하니,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홀연히 …
*풍류도를 흠모하여 선계(仙界)에 예를 올리는 행사를 여러번 증험하였고, 황룡이 하늘길을 진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가마귀가 울어 혼백을 부르고, 황웅이 묘자리로 인도하니 갑작이 흔들리는
촛불처럼 홀연히 떠나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도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새종류에 대해서는 죽은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역활을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봉황은 환생을 돕는 화신이라는 역활을 맡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황룡이 천계로 오르는 영혼을 진호 한다고 하니 무엇인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게 사실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오라고 하는 삼족오는 무슨역활을 맡았기에 재앙을 나타낸다고 하였을까요.
역시 가마귀는 음역의 화신으로 생명을 불러가는 저승의 화신이었습니다.
같은 태양의 상징이지만 봉황은 양의 상징이요 삼족오는 음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반반이 음과 양으로 갈라지고 일년은 4계가 있지만 생성과 소멸이 구분되는 음양의
계절이 있습니다.
무덤안에만 있어야 될 가마귀의 로고가 밖으로 나와 활개를 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음 기회를 빌려 조금더 상세한 의견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침부터 뒷동산에서 울어대는 가마귀소리는 까치 소리와는 너무도 다른것입니다.
못 속에는 삼신도(三神島)인 방장도, 봉래도, 영주도가 배치되었다.
남쪽 섬은 1,090㎡, 중앙섬은 66㎡, 북쪽섬은 495㎡ . 못 호안 주변과 섬에는 괴석을 가득히 배치하였다.
못의 호안 높이는 동, 북, 남이 210㎝ 정도이고, 서쪽의 궁전 건물이 있는 호안은 540cm이다.
이는 못가의 누각에 앉아 원(苑)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곳에서도 동양인은 원림(苑林)을 한 곳에 앉아 바라보는 습성을 보여 준다.
연꽃잎이 부분적으로 서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못 바닥에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옮겨와 깔아서 물이
맑았던 것이며, 못 가운데쯤 '井'형 목조물(길이 134cm, 높이 101cm 정방형)을 못 바닥에 박아서 그 곳에
연(蓮)을 심어 연뿌리가 번져 나가지 못하게 만든 시설 때문이다.
못 물의 깊이는 약 18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못을 바다로 상징하여 넓게 보이고자 한 것인데,
연꽃이 가득하면 답답하고 좁게 보이기 때문에 못 바닥에 수초가 나지 못하게 강회나 자갈돌을 깔았던
것이다.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 가의 5개 건물 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제 1, 3, 5 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 유물을 본따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추정하여 재현한 것이다.
*못안에는 삼신도를 배치하였는데 크고 작은 세개의 일곱섬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단순한 삼신산의 상징이었다면 세개만의 섬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섬 크기의 순서를 중앙에 있는 섬을 가장 작게 만든것인데 이것은 현장을 원형대로 축소한
축경입니다. 그리고 발굴당시 들어난 섬들의 외형은 돌을쌓아 거북이의 형태로 조형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신산 설화에 등장하는 거북이의 전설때문인데 실재로 그 모델이 되었던 거북 바위들이 지금까지
도 바다 현장에 남아 있습니다.
안압지는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2월 조에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는 단순한 기록밖에는 없는데, "특히 못 가운데 3개의 섬과 북쪽과 동쪽으로는 12 봉우리
를 만들었고, 이것은 동양의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삼신산과 무산십이봉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사서에서 인용한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정문옆에 서있는 안내문에도 이러한 기록들이 보이고 있는데 무산십이봉은 중국 섬서성의 아미산 선경을
말하는 것인데 왜 이곳에 끼었는지가 궁금하군요.
처음에는 없었던 시설을 후대에 추가로 보충한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거대한 계획으로 이루졌던 원지를 단 두줄의 기록으로만 남겨놓은 배경이 무엇일까요.
더구나 이 원지를 조성하던 시기는 당나라와 7년 전쟁을 치루느라 국력이 극도로 쇄진할때였습니다.
<삼국사기>의 임해전에 관한 기록을 보면, 697년 9월에 효소왕이, 769년 3월에 혜공왕이, 860년 9월에
헌안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아 큰 잔치를 하였고, 931년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임해전은 정사를 보는 궁이 아니고, 잔치나 나라의 손님들을 모시는 기능을 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1975년 3월 24일부터 1976년 12월 30일까지 2년 여에 걸쳐서 문화재연구소에서 연못 내부와 주변 건물지
등에 대해 발굴을 실시하였는데, 출토된 유물은 와전류를 포함하여 3만여 점이나 되고 건물지 26동. 담장터
8개소. 배수로 시설 1기 등이 확인 되었습니다.
1980년 서쪽 호안에 접한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시켰으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초석을 복원하여 노출시켰다고 합니다.
안압지 출토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4면에 56자가 새겨진 일종의 주사위인 모재 주령구와 길이 13㎝, 직경
3㎝인 남근입니다.
모재 주령구는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의 놀이 모습을 엿볼 수 있는것인데,三盞一去(술 석잔을 한꺼번에
마시기), 自唱自飮(한번 노래하고 한번 마시기) 등의 명령문구가 있는 주령구는 당시의 태평성세 양상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기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남근은 궁녀들이 가지고 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 평성궁터에서도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과연 남근을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하면 그만일까요? 궁녀들의 자위용 이었을꺼라고?
뭔가 해석이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것이 자위용으로 쓰이던 것이라면 가장
은밀한곳에 감춰져야 하는 것이기에 원지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봅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계획적으로 매장되어 있던 기원(祈願)용으로 추정합니다.
남근의 상징은 생명의 원천인 신(神)이기때문에 망자의 환생을 기원하는 기구로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입니다. 경회루 원지에서도 매장되어 있던 구리로 만든 용을 발굴하고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경회루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서 벽사용으로 매장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의혹을 풀었던 예가
있습니다.
안압지의 바닥에 쌓인 뻘 속에 묻혔다가 발굴된 목선도 있는데 길이 6.2m, 넓이 1.1m, 깊이 60㎝ 로 큰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목선은 당시(신라)의 것으로 다행히 진흙 뻘 속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천여 년을 썩지 않고 보존되었던
것인데, 단순한 뱃놀이용으로 보기보다는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을 연결하는 상징용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외에도 금동보살좌상, 금동삼존판불, 토제풍로, 금동초심지가위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더이상의 설명은 줄입니다.
남근은 한민족의 시조할아버지를 상징하는 '신위'로 봅니다.
이 신위는 조선이라는 글자의 첫획에도 등장하는 것이며, 첫획인 '│'은 남근의 상징입니다.
설문해자의 설명에 따르면 발음은 '신'이며, 모양은 '자지自持'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 우리말로 인식했던 '자지'는 사실 '한자'의 발음이었던 것입니다.
이 '自持(│)'는 서청고감에서도 편찬 당시에 궁에 그런 문자가 기록된 청동화폐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어서 │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고대의 실존인물의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구려에서는 이 '自持'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신라왕관의 한 복판에도 이 '自持'의 형상이
새겨진 것이며, 한민족의 묘제에서도 '망주석'이 좌우에 서있는데 이 또한 한민족의 시조로서 죽어서
그 분에게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남성의 상징을 '自持'라고 하며 이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선조, 조상'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와
神이라는 글자로 발전되어갑니다.
따라서 안압지에서 발견된 남근은 소위 학자라는 자들이 '여성용'이라는 무식하기 이를데 없는 평가로
얼마나 역사에 문외한인가를 스스로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부여의 궁남지에서도 역시 '남근'이 발견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민족 계열의 나라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근원을 정확히 인식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을 중요한 장소에 모시는 것은 시조할아버지인 '神'의 보살핌을 바라는 것과 함께 자신들의
이분의 정통성을 이은 자손이라는 의미로서 천자를 내세울 수 있는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朝鮮이라는 글자는 고조선을 개벽하신 분들의 신위를 순서대로 당시의 상형문자로 남긴 것이며,
│은 이중에서 첫번째 시조 이름인 것입니다.
영원히 후손들에게 기념되는 이름으로 이를 예기에서는 '百世不遷'이라고 하는 것입니다.(茶香)
남성의 성기 모형을 조경에 이용한 용례는 포석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포석지에 물을 공급하는
귀두석(龜頭石)입니다.
이 포석정이 어디입니까? 무열왕이 혼례를 치루던 성스러운 장소였습니다.
물이 흐르던 유상곡수 위에는 루각이 있었고, 혼례를 치룬 임금은 이곳에서 초례를 보냈다는 설도 있습
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역대로 화랑의 풍월주들이 임석을 하던 화랑의 본영이었지요.
개울의 건너편으로는 이궁인 신궁이 있었구요. 윤을천 개울 가운데는 오악을 닮은 바위에 2인용 욕조가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풍설처럼 술잔을 돌려가며 시조나 읊었던 중국의 난정과는 다른 장소였습니다.
어쩌면 이곳에 문무왕의 출생의 비밀이 있는지도 모를일입니다.
그리고 이 안압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서들도 나와 있지만 특별한 연구의 흔적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전문학자들께서 자료를 제공하고 모방송국에서 출판을 담당한 어떤 책에는 이러한 원지문화의 일부분이
일본식이라고 한탄하는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인지 수긍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옛날 신라의 조정에는 월지전(月池典) 또는 월악전(月嶽典)등의 관직을 두어 안압지등의 관리를
전담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고 합니다. (고경식 1989 16~17)
문무대왕에 대한 제사는 나라에서 불천위로 세분을 모시고 지내고 있지만 안압지에서는 용왕을모시고
제사를 올리던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신심용왕(辛審龍王)’이라 새겨진 그릇이 여러 점 발견된 점과 안압지 옆에
있었던 관청이 동궁(東宮)이었는데, 여기에 소속된 관청 중에 ‘용왕전(龍王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제사를 관장하던 기관일것이라고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무대왕이 호국용으로 화신하였다고 가정할때 이 제사는 바로 문무대왕께 올리는 제사라는
얘기가 되겠지요. 동북쪽으로는 호국사찰인 황룡사가 있고, 북서쪽으로는 용으로 화신한 선묘낭자가 의상
대사를 도와서 화엄불교의 도량인 부석사를 세워 지키고 있고, 남쪽으로는 자장율사가 아홉마리의 용들을
교화시켜 호국용으로 교화시킨 통도사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사천왕사를 지은 명랑대사가 주석하던
원원사에 용왕전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때 신라의 전신인 진한(辰韓)과 진한의 전신인 진국(辰國)등이 모두 용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실감케 합니다.
용은 단순한 형이하학적인 이메지로만 해석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물을 소생시키고 암흑을 가르는 동방의 밝은 빛을 상징하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문무대왕께서도 상상의 동물인 용으로 화신하는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셨겠습니까?
깊은 관찰로 살펴보면 안압지가 문무대왕의 감춰진 유택이었다는 방증들이 도처에 널려있는 셈입니다.
동궁의 소속기관들
용왕전 [龍王典]
신라 시대 동궁관(東宮官)에 소속된 관청. 태자궁(太子宮)인 동궁관에는 용왕전을 비롯하여 동궁아(東宮衙)
어룡성(御龍省) 세택(洗宅) 급장전(給帳典) 월지전(月池典) 승방전 (僧房典) 포전( 典) 월지악전(月池嶽典)
등 9개의 관아를 두었음. 용왕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담당하였던 듯함. 소속 관원으로... 출전 네이버 백과
화두(話頭)로 등장한 경진(鯨津)의 정체


사진설명: 1, 안압지 조감도 2, 복원된 경주 안압지의 야경입니다. 누각이 물에 비추이는 모습이 무척 이나 아름답습니다. 언듯 삼신산의 누각이 물에 비추이는듯 보이지지 않습니까? 이 안압지는 문무대왕께서 서거하시기 6년전인 674년에 착공되었습니다
이 비문은 전국의 금석문분야 전문가들께서도 연구결과를 내놓지 못한 난제입니다.
신라문무대왕릉비(新羅文武大王陵碑) [前面] <1행> … 국 신라 문무왕릉의 비이다. 급찬(及飱)인 국학소경(國學少卿) 김▨▨(金▨▨)가 교(敎)를 받들어 찬하다. <2행> … 하늘을 짝하여 사물을 잘 다스리고, 땅의 경계를 구분하며, 덕을 쌓아 …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신에 응하여 … <3행> … 경진씨(鯨津氏)를 파견하여, 삼산(三山)의 궐(闕)을 비추고, 동으로는 개오(開梧)의 지경을 막고, 남으로는 ▨계(▨桂)의 ▨과 이웃하고, (북으로는) 황룡을 맞아 주몽(朱蒙)을 태우고, … 백무(白武)를 이어 받아 …을 우러르며 … <4행> … 그 능한 바를 다 잘하여 이름과 실제가 다 이루어지고, 덕과 지위가 겸하여 융성해지니, 땅은 8방 (八方) 먼 곳까지 걸쳐 있고, 그 훈공은 삼(한)(三(韓))에 뛰어나, 그 높고 넓음을 다 일컬을 수가 없는 분이 우리 신(라) … <5행>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 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6행> …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옥란(玉欄)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石紐)를 보고 금여(金輿)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 <7행> … 대왕은 생각하심이 깊고 멀었으며, 풍채가 뛰어났고, 도량은 하해와 같았으며 위엄은 우뢰와 같았다. … ▨은 바야흐로 자취를 거두고 봉화는 멎고 척후는 파해지니, 만리의 맑은 기운은 부지런히 … 를 열었다. … <8행> … 간▨(簡▨)의 덕에 내외가 평화로워지고, 광대한 기풍에 원근이 편안하고 깨끗해지니, ▨공(▨功) 성▨(盛▨)은 장래에 … 하고, 쌓이고 뭉친 순수함과 곧음은 후예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워 주었다. … <9행> … ▨▨사회(▨▨舍誨)는 곧 성철(聖哲)의 뛰어난 모습이라, 은혜로써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너그 러움으로써 사물을 다스리니, … 한 자는 그 시기를 알고, 덕을 이어받은 사람은 모두 그 이웃을 알아보니, 그 명성이 한하(閒河)에까지 넘쳤다. … <10행> … ▨봉(▨峯)을 ▨하여 ▨간(▨幹)하고, 5백년을 기약하여 큰 명을 내려주니, 거하면 모두 … 함을 얻었고, … 비춤은 단부(丹府)에 거의 가까웠다. 의(義)는 성(性)에 부합하여 일어나고, 깊은 정은 … 을 살펴 … <11행> … 바탕을 돕고, 정(情)의 근원은 맑디맑아, 삼키어 받아들임은 금▨(襟▨)에 ▨하였다. … 하시는 말씀은 규범을 이루고, 용모와 행동은 가히 볼 만하였으며, 학문은 고(금)을 두루 통하였다. … <12행> …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에 … (하고), 주나라는 교재(橋梓)의 ▨에 경의를 표하였다. … 당나라 태종문무성황제(太宗文武聖皇帝)가 사직의 ▨에 응하여 … <13행> … 임금이 돌아가시고 풍악은 멎었다. 무진 이후에 … <14행> … 순(舜)임금은 바다와 같이 덕을 내려도 절현(截懸)이 있었고, 요(堯)임금은 해와 같이 밝게 비추어도 은▨(垠▨)이 없었다. … <15행> … 빛나고, 구렬(九列)은 천부(天府)를 관장하여 … <16행> … 천사(天使)도 감통(感通)시켜 그 재앙을 그치게 하니, 편안하고 쉽게 건너 … <17행> … 이웃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 자주 이쪽 저쪽으로 붙으려 하면서, 겉으로는 …을 믿는 척하니 … <18행> … (소정방을) 웅진도행군대총관(熊津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군왕(君王)을 … <19행> …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이 고슴도치와 올빼미처럼 모여들어 (진군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 <20행> … 적의 수도(首都)에 이르자 그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그 좌리(佐吏) 들도 … <21행> … 삼년이었다. 용삭(龍朔) 원년(元年)에 이르러 … <22행> … 보배로 여기는 바는 오직 어진 사람이니, 선(善)을 행함을 가장 즐거워하고, 인(仁)을 ▨함을 … <23행> … 조야(朝野)가 모두 즐거워하니, 굳이 애써 행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 <24행> … 진백(秦伯)의 터전를 다시 일으켰다. … <25행> … 교화가 북으로 읍루(挹婁)에까지 접하니, 벌떼처럼 … <26행> … 군왕에게 조서를 내려, 사지절(使持節) … 으로 봉하였다. … <27행> … 군(軍)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깃발이 … <28행> … 꾀는 손을 뒤집는 일처럼 쉽게 나왔는데, 절묘하기가 … [後面] <1행> … 환산(丸山)에 공(功)을 기(紀)한 장수가 있어 … <2행> … 곧바로9주를 일광(一匡)하고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 <3행> … 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는 56세였다. … <4행> … 땔나무군이나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 … <5행> … 화장(火葬)을 하라 하니, 그달 초열흘에 화장하여 … <6행> … 천황대제(天皇大帝)께서 … <7행> … 왕례(王禮)에 맞았다. 군왕(君王)은 국량(局量)이 … <8행> … 나라를 … 하는 방법에 (부합하였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8정(八政)의 ▨과 같았다. … <9행> … 돌아가시니, 참으로 백대(百代)의 현왕(賢王)이시요, 실로 천(千)(古의 성스러운 임금이셨다.) … <10행> … 맑고 아름답기 선비 같으시고, 삼언(三言)을 빌지 않아도 준▨(駿▨)을 알았다. … <11행> … 못을 여니 호량(濠梁)을 방불하였고, 비단과 돌을 펼쳐 … <12행> … 손님이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안개처럼 모여 들니, 이를 말하여 아침에 많고 … <13행> … 묘(昴)에 들어가서는 돌아감을 잊으시고, 웅(熊)을 맞추시고도 돌아가지 않으셨다. 태자 계(雞) … <14행> … 단청(丹靑)은 기린각(麒麟閣)에 흡족하고, 서책은 운대(芸臺)에서 닳고 헤어졌다. <15행> … 삼가 절을 드리고, 이만 그치며 명(銘)을 쓴다. <16행> … 천 갈래의 가지가 되어, 삼산에까지 뻗어 비치네. 아름답고 성한 덕은 멀리 …에 전해져 … <17행> … 진실로 무용(武勇)하시고 진실로 대덕(大德) 있으시고, 다재다예(多才多藝) 하였네. 아랫사람을 생각하여 거머리마저 삼키시고, … <18행> … 아홉 번 정벌하고, 친히 삼군을 통솔하시어 … 위엄과 은혜는 혁혁히 빛나, 저 아득히 먼 옥저(沃沮)와 예(濊)까지 찾아와 역(役)을 청하였네. 잠동하던 … <19행> … 풍교를 흠모하여, 단증(丹甑)이 여러 번 나오고, 황▨(黃▨)이 하늘을 진호하였도다. … 적오(赤烏)가 재앙을 나타내고, 황웅(黃熊)이 우러름을 표시하니,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홀연히 … <20행> …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 경진(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 <21행> … 크나큰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 … <22행> … 25일에 대사(大舍) 신(臣) 한눌유(韓訥儒)가 임금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쓰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
이 비문의 가장 궁금한 대목이 경진씨(鯨津氏)와 경진(鯨津)입니다. 그런데 비석앞면의 제 3행에...
[경진씨(鯨津氏)를 파견하여, 삼산(三山)의 궐(闕)을 비추고, 동으로는 개오(開梧)의 지경을 막고, 남으로는
▨계(▨桂)의 ▨과 이웃하고, (북으로는) 황룡을 맞아 주몽(朱蒙)을 태우고, … 백무(白武)를 이어 받아 …
을 우러르며...]
* 여기의 경진씨는 일명 요지(瑤池)를 높여 말한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경진씨란 삼신산의 궁궐이 물에 비치는 고래나루의 선경을 모두 합하여 표현한것으로 해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너무나도 성스러운 장소이기에 이름을 부를때에도 존경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고래를 앞세우는 이유는 서시(徐市)가 이곳 삼신산을 찾았을때 교룡대어라고 하는 고래가 지키고 있었
다고 하여 삼신산의 바다를 줄여서 표현할때 그렇게 부른것이라고 추측이 갑니다.
그러니까 궐의 그림자를 비치게 하는것은 안압지의 물이겠지요.
두번째로 등장하는 "동으로는 개오(開梧)의 지경을 막고"의 풀이입니다.
*열린 벌판을 벽오동을 심어 울타리를 막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벽오동이란 봉황을 부르는 선경에 없어서는 안되는 나무이지요.
그런데 "남으로는 * 계(* 桂)의 *과 이웃하고"라고 하였습니다.
桂자는 계수나무를 뜻하는 말이니 월계수를 떠올릴수 있으므로 월성과 관계하여 생각할수 있을것입니다.
다음으로 (북으로는) "황룡을 맞아 주몽(朱蒙)을 태우고"...라고 하였습니다.
점입가경으로 골치아픈 대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용과 구슬은 쉽게 풀리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북쪽으로는 여의주(붉은 구슬)를 희롱하는 황룡사가 있다는 뜻으로 풀이를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백무(白武)를 이어받아"...을 우러르며...
*연못의 서쪽으로는 임해전(臨海殿)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더 써쪽으로는 첨성대가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끈을 연결지울 수 있는 대목은 문무에서 오는 백무밖에는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대략 3행에서 제시된 해석문을 근거로 하여 방향별로 무엇들이 인접하여 있었는가를 풀이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맥상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는 문장이 [경진씨(鯨津氏)를 파견하여, 삼산(三山)의 궐(闕)을 비추고,]
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더 자세히 알아보니 해석에 문제가 있는듯 합니다.
그것은 파(派)자의 해석입니다. 원래 이 '파'자의 뜻은 물이 갈라져서 흐르는것을 얘기함으로 나눈다는 뜻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삼신산의 궐을 비추이는 물을 나누어 삼신산 선경을 안압지에 재현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