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집은 중국말로 각수(覺壽)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어려서 미사색부(彌沙塞部)의 승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율품(律品)에 오로지 힘을 써서 정밀하게 뛰어났다. 겸하여 『선요(禪要)』에도 빼어났다.
송(宋)나라의 경평(景平) 원년(423) 7월에 양주(楊州)에 이르렀다. 앞서 사문 법현(法顯)이 사자국(師子國)에서 『미사색률(彌沙塞律)』의 범본(梵本)을 얻었다. 그러나 미처 번역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울의 여러 승려들은 불타집이 이미 이러한 학문을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그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그 해 겨울 11월에 용광사(龍光寺)에 모여 34권으로 번역하였으며, 『오분율(五分律)』이라 일컬었다. 불타집은 범문(梵文)을 잡고, 우전국(于闐國) 사문 지승(智勝)이 번역하였다. 용광사의 도생(道生)과 동안사(東安寺)의 혜엄(慧嚴)이 함께 붓을 들고 대조하여 교정하였다.
송(宋)나라의 시중(侍中) 낭야왕(瑯琊王) 연(練)이 시주가 되었다. 다음해 4월에 비로소 마쳤다. 대부(大部)에서 계(戒)의 핵심과 갈마문(羯磨文) 등을 추려내어 베낀 것이 모두 세상에 유행한다. 뒤에 불타집이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4) 부타발마(浮陀跋摩)
부타발마는 중국말로 각개(覺鎧)라 하며 서역(西域)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품행(品行)이 분명하고 곧았으며, 총명함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삼장(三藏)을 배우고 익혔다. 특히 『비바사론(毘婆沙論)』을 잘했다. 항상 이 부(部)를 수지하고 독송하여 마음의 요체[心要]로 삼았다.
송나라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서량(西凉)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도태(道泰)는 뜻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파미르 고원의 서쪽 지역을 두루 돌아다녔다. 널리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범본(梵本) 『비바사(毘婆沙)』 3만여 게송(偈頌)을 얻어 가지고 고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운 채, 눈 밝은 장인을 발돋움하고 기다렸다. 부타발마가 이 논을 공부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그 당시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이미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무건(茂虔)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무건이 재위에 있던 승화(承和) 5년(437) 정축년 4월 8일, 곧 송나라 원가(元嘉) 14년(437)에 양주성(凉州城) 안에 있는 한예궁(閑預宮)에서 부타발마를 청하여 번역하였다. 도태가 붓으로 받아 적고,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이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義學僧] 3백여 명과 더불어, 문장의 뜻을 바로잡기를 거듭 두 차례나 하여 비로소 마쳤다. 모두 1백 권이다. 사문 도연(道挻)이 서문을 지었다.
얼마 후 위(魏)나라의 오랑캐 탁발도(託跋燾)가 서쪽으로 와서 고장(姑臧)을 정벌하였다. 양(凉)나라가 멸망하는 난리통에 경서와 온갖 도구들이 불타버려서 40권이 없어졌다. 오늘날에는 60권만 남아 있다. 부타발마는 난리를 피하여 서역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