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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 九의 의미
무주구천동 / 청와대 /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여보게. 좀 잡았나? 오늘은 수확이 좀 괜찮으이. 난 벌써 구령(九嶺)이야."
"난 온통 잔챙이고 큰놈이래야 구우일모(九牛一毛)네."
"자넨 구서(九暑) 내내 별 재미 못 보더니만…"
"구서뿐인가, 지난 구동(九冬)에도 그랬지. 그래도 오늘은 꼭 구척장신(九尺長身) 같은 잉어 한 마리는 낚고 가야지."
"고놈들이 모두 구중심처(九重深處)로 모두 숨어 들어간 모양인데, 구산팔해(九山八海)를 뒤적인 들 무슨 소용이겠나?"
낚시꾼들이 물가에서 온통 '구(九)'자 타령을 하고 있다. 고기잡이와 아홉(9)이 무슨 관계가 그리 있기에 '구'에서 시작해 '구'로 끝나는가?
□ '구(九)'자가 들어간 성어들
우리네 한자 단어나 성어를 보면 '구(九)'자가 들어간 것이 무척 많다.
'구(九)'자는 지사문자(指事文字)로서, 다섯 손가락을 위로 펴고 나머지 손의 네 손가락을 옆으로 편 모양을 나타내어 '아홉'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많음'이나 '깊음' 또는 '길게 뻗음' 등을 나타낼 때 이 글자가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세계 구성설에서 일컫는 모든 산과 바다를 '구산팔해(九山八海)'라 하고, 아홉 번이나 통역을 거듭함이라는 뜻으로 아주 멀고 먼 나라를 가리킬 때는 '구역(九譯)'이라 한다.
낚시꾼들이 고기를 많이 잡았다는 뜻으로 '구령(九嶺)'이란 말을 쓰기도 하는 것은 아홉 마리 잡았음을 열 마리째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으로 일컫기 때문이다. '아홉 고개'라고 직역되는 '구령'이란 말이 재미있다.
그럼, 여기서, '구'가 '아홉'이라는 뜻 외로 쓰이는 몇 예를 들어 보자.
'온 누리'와 관계되는 관련 단어에는 '나라의 영토'라는 뜻으로 쓰이는 '구령(九嶺)'이 있고, '너른 하늘'과 관련되는 성어로는 '구만리장공(九萬里長空)' '구만장천(九萬長天)', '구천구지(九天九地)' 등이 있다.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은 '구천(九天)'이나 '구원(九原)'이고, 땅속 깊은 밑바닥은 '구천(九泉)이다. 먼 곳에 있다고 인식되는 저승은 '구천지하(九天地下)'라 한다. 높은 하늘에서 땅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떨어진다는 뜻으로 풀리는 '구천직하(九天直下)'는 강한 형세를 일컬을 때 쓰인다.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나타낼 때도 '구'자를 많이 사용한다. '구중궁궐(九重宮闕)', '구금(九禁)', '구중심처(九重深處)' 등으로, 이 모두 '구'가 통과해야 할 벽(문)이 많음을 뜻하고 있다.
'구공(九功)'이나 '구우일모(九牛一毛)'에서의 '구'는 '많음'을 나타낸다. '구공'은 백성의 생활의 기본인 여러 가지 일을 잘 닦는 임금의 여러 공적을 뜻하는 말이고, '구우일모(九牛一毛)'는 아홉 마리 소에 털 한 가닥이 빠진 정도라는 뜻으로, 대단히 많은 것 중의 아주 적은 것의 비유로 쓰인다. 중국에서는 구주(九州=세상)의 장관, 곧 천하의 제후들을 '구백(九伯)'이라 했는데, 이 역시 '많음'이나 '세상'을 '구'로 대신한 것이다.
'많음'의 뜻과는 달리 '구척장신(九尺長身)'처럼 '구'가 '큼(大)'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홉 번 꺾어진 양의 창자로 직역되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은 '구회지장(九回之腸)'과 함께 꼬불꼬불하면서도 험하고 긴 길을 말할 때 흔히 쓰인다. ('구회지장'은 장이 뒤틀릴 정도로 무척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쓰인다. ) 비슷한 말로 쓰이는 '구곡간장(九曲肝腸)'은 굽이굽이 사무친 깊은 마음 속을 나타내고.
'길다'는 뜻의 말로는 '구동(九冬)', '구하(九夏)', '구서(九暑)' 등의 말이 있는데. 각각 '긴 겨울', '긴 여름', '긴 더위' 등을 가리키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구(九)'는 단순히 '아홉(9)'의 뜻을 나타내는 것뿐이 아니라, 많음(多), 김(長), 넓음(光), 깊음(深) 등의 뜻을 안고 있다. 한자 자전에도 보면 '九'가 '아홉(9)'의 뜻과 함께 '많다(多)'의 뜻을 함께 적어 놓고 있다.
길거나 많음을 순 우리말로 나타낼 때는 '아홉'보다는 '아흔아홉'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ㆍ아흔아홉고개 ; 경기 화성 동탄면 중리 / 용인 처인구 이동면 서리 / 전북 무주 적상면 방이리
ㆍ아흔아홉골 ; 제주시 해안동 어승생 수원지 동남쪽 / 전북 진안 동향면 능금리 / 경남 합천 가야면 죽전리 석계동 북서쪽 /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 남동쪽 / 전북 순창 동계면 어치리 회룡 동북쪽
ㆍ아흔아홉배미골착 ; 전남 목포시 달동 개축골 서쪽.
ㆍ아흔아홉또가리골짝 ; 경남 충무시 무전동 말구리 동쪽.
ㆍ아흔아홉목 ; 제주도 서귀포시 월평동 월평 남쪽.
ㆍ아흔아홉동산 ; 북제주 구좌읍 송당리 진머리굴렁 북쪽의 산.
ㆍ아흔아홉간집 ; 경기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 서울 구로구 시흥동 / 경기 이천 부발면 산촌리
□ '구천동'이란 이름에 관한 설
우리 나라 한국 10대 관광권의 하나인 명승인 덕유산(德裕山).
전북 무주군 무주읍에서 40리쯤 되는 곳에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있고, 그 앞으로 내가 흐르는데, 그 위에 다리가 얹혀 있다.
바로 구천동 입구.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은 여기서 시작하여 남으로 덕유산까지 갈 지(之)자로 이어지는 1백리의 긴 골짜기이다.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굽이굽이 펼쳐진 계곡엔 사시사철 맑은 물소리가 울리고, 울창한 숲과 기암 등이 선경을 이룬다. 구중천엽(九重千葉)의 계곡마다엔 멋진 경승지의 이름들이 붙어 있다. 그래서, 덕유산 하면 누구나 무주(茂朱)를 떠올리게 되고, 무주 하면 아름다운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을 떠올리게 된다.
백두대간이 이루어 놓은 많은 골짜기 중 가장 멋지고 길고 유명한 구주무천동.
이 곳을 찾는 이들은 무주구천동이란 이름에서 우선 '구천(九千)'이란 말에 생각을 많이 모은다.
"그 사람 무주구천동에서 온 거 아냐?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누만."
이처럼 무주구천동은 일반 세상과 너무 다른 '깊고깊은 산골'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
'구천동'이란 이름이 나오게 된 연유에 대해서 요즘의 자료들에선 그 동안 전해 온 이야기들을 인용,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 설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두 성씨 집안이 살아서 그렇게 됐다는 설.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살았다 함. (한글학회 지명총람) / 암행어사 박문수의 설화에 의하면, 이 곳에 구씨와 천씨의 성을 가진 집안의 집단 주거지라고 해서 두 성씨를 따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네이버 사이트) / 윤증의 <유광려산행기>에서 처음으로 '동(洞)'자를 붙여 썼고, 어사 박문수가 천(千)씨 부자(夫子)와 관련해 구천동민을 신도로 다스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또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산다고 해서 구천동(具千洞)이라 한다고 하는 말도 있다. (이명현의 무주구천동 리조트) / 구천(九泉)을 지나가는 구천동은 구(具)씨와 천(千)씨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구천동이 되었다고도 하고---. (야후 사이트)
다음은 바위가 많아서 그렇다는 설.
기이한 바위가 9천이 있다 함. (한글학회 지명총람) / 이 곳에 기암괴석들이 9천 개가 널려있는 곳이라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네이버 사이트)
다음은 중이 많이 머물러서 그런 이름이 나왔다는 설.
예전에 절이 많이 있어서 중 9천 명이 머물렀다 함. (한글학회 지명총람) / 성불자(成佛子)가 9000명이나 다녀갔다고 해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야후 사이트) / 조선 명종 때 광주 목사를 지낸 임갈천이 쓴 덕유산 향적봉기에 의하면 성불공자 9천 명이 이 골짜기에서 수도를 하였으므로 구천둔(9천명이 은둔한 곳)이라고 하였으며, 그들의 아침밥을 짓기 위하여 쌀을 씻은 뜨물이 개울물을 부옇게 흐렸다고 한다. 당시 이웃 고을 금산에 살던 한 여인이 수도를 하기 위해 구천둔에 입산한 남편과 약속한 3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남편을 찾아나서서 2년 동안을 헤맸으나 워낙 계곡이 깊어 결국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이 때부터 '구천둔'이라는 지명이 구천동으로 바뀌어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숙종 때 소론의 거두 윤명제 같은 이는 구천동이 들어있는 덕유산을 불교의 소국이라 일컬을 만큼 이 곳 덕유산 속에는 1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네이버 사이트) / 예전에 구천동은 북한의 삼수갑산과 더불어 심산유곡의 대명사로 쓰였다. 갈천 임훈의 <등덕유산 향적봉기>에 구천동을 불공을 이룬 자 9천명이 머문 둔소(屯所)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 했다고 한다. (이명현의 무주구천동 리조트)
□ '구천'의 '구(九)'는 '길고 심하게 굽음"의 뜻
이처럼 '구천동'에서의 '구'를 거의 '아홉(9)'과 관련지어 여러 가지 설을 펼쳐 내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 아홉과는 별 관련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구(九)'는 단순히 '아홉'의 뜻만 아니라 '크다'나 '길다'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주구천동은 엄청나게 긴 골짜기이다.
이 길고 아기자기한 골짜기를 우리 조상들은 단순히 '심곡(深谷)'이니 '장동(長洞)'이니 하는 말로의 표현이 별로 마뜩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생각해 낸 것이 '길고 굽음'의 뜻으로 많이 씌어 온 '구(九)'자를 취했을 것이고, 이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 '천(千)'이라는 숫자까지 보태어 '구천(九千)'이란 말을 생각했을 것이다.
<대동여지도>에서는 덕유산 북서쪽 골짜기가 '구천동(九泉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같은 지도에 있는 '구천동(九千洞)'은 거제 땅에 있으며, 덕유산 골짜기가 아니다. 경남 진해시 소사동 소사저수지 서북쪽에도 구천동(九川洞)이란 골짜기가 있다.
골짜기를 나타내는 말로는 대개 한자 '곡(谷)'이 쓰이지만, 경치가 좋거나 골이 깊어 사람들이 자주 오르내리는 곳이면 '곡(谷)' 대신에 '동(洞)'을 많이 쓴다. 그래서, 이름난 골짜기에 '자하동천(紫霞洞天)', 두문동(杜門洞), '선불동(仙佛洞)' 등의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우리 나라에선 '동(洞)'이 '동네'의 뜻으로 많이 쓰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그런 뜻으로 사용하는 일이 많지 않고, 대개는 '골짜기'의 뜻으로 쓰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행정지명에선 '동(洞)'자가 끝음절로 들어간 것을 별로 볼 수가 없다. 일본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나라로 관광 온 중국인이 이러한 '~동' 지명들이 많은 것을 보고, "한국에는 골짜기 이름이 참 많다."고 한다는데, 이는 '동'을 그쪽에서는 대개 '골짜기'로 생각하는 탓이다.
'동(洞)이라는 글자는 '고을'이나 '마을' 외에 '골', '구렁', '굴', '골짜기', '깊다', '비다', '공허하다' 등의 훈을 갖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전에는 이 글자가 '마을'보다는 '골짜기'라는 의미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 글. 배우리
[출처] 무주구천동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작성자 name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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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터와 궁정동
배우리의 땅이름 순례 / KBS 라디오 (대담 김홍성 아나운서)
청와대터와 궁정동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배우리
청와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하는 곳 아닐까요? 아니 조선시대에도 나라님의 터가 된 그 곳, 과거엔 어떤 곳이고 어떤 역사를 간직해 온 곳인지, 주인이 바뀔 이 시점에 한번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1. 청와대와 그 일대라면 동(洞)으로라면 어디가 될까요?
‘청기와의 건물’이라는 청와대(靑瓦臺)는 지금 사용하는 새 주소로는 청와대로 1번지가 되는데, 동이름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 지점은 종로구 세종로 1번지이다.
많이 들어 본 효자동, 청운동, 궁정동 등이 이 일대에 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중에 궁정동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돌아보고자 한다.
2. 궁정동. 40여 년 전, 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큰 사건(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었던 곳 아닌가요? 그래서 많이 들어 본 동이름인데, 청와대의 바로 옆이죠?
옛 한양의 주산이었던 북악(北岳), 그 남쪽 산기슭,
자하문 터널의 남쪽이고, 청와대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서쪽편이 된다. 인왕산과 북악산 기슭이 안고 있는 아주 조용하고 아름다운 동네이다.
지금은 서울 종로구에서 인구로 보아 가장 작은 법정동이 돼 버린 궁정동(宮井洞)이다.
3. 궁정동, 과거에 궁의 우물이 있어서 궁정동인가요?
지금의 궁정동 일대는 조선시대엔 한성의 북부 순화방(順化坊)의 지역이었다.
육상궁의 이름을 딴 '육상궁동'이란 동네가 여기 있었고, 근처엔 산머리를 돌아가는 곳의 마을이라 해서 나온 이름의 '돈골'이 변한 '동골', 겨울에도 따스한 물이 나온다는 '더운우물골', 새로 다리 놓은 다리가 있었던 '새다리', 쪽박으로 물을 퍼냈던 '박우물골' 등의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들은 각각 한자로 '동곡(東谷)', '온정동(溫井洞)', '신교(新橋)', '박정동(朴井洞)' 등으로 표기해 왔는데, 일제 때인 1914년 4월 1일 일제가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행정구역을 통페합, '육상궁동'과 '온정동'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궁정동(宮井洞)'이라 하였다. 따라서, '궁정동'이란 이름은 일제 잔재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그 옛날의 유명했던 '더운우물골' 등의 마을들이 없어지고 이젠 그 곳에 '무궁화동산'이라는 공원이 생겼다.
4. 조선시대엔 이 일대가 어떤 곳이었을까요?
북악과 인왕이 뿜어 낸 땅의 기운은 좋았던지 이 일대에 많은 인물을 났다.
여기서 조선시대의 많은 인물들이 났고, 경치가 좋아 영조, 정조, 순조 임금 등이 거둥하여 경치를 즐겼으며, 문인들이 많이 찾아 글로써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유명한 장소였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활짝 열린 청와대 앞길. 새롭게 트인 그 길에 지금은 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내왕을 한다. 그 이전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지역이었다. 더구나, 그 길의 한켠에 있는 궁정동은 우리가 이름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먼 하늘의 동네'였다.
5. 이 지역을 자주 지나다니는데, 길가 언덕쪽으로 무슨 궁(宮) 같은 것이 보이던데요.
조선시대엔 지금의 이 궁정동에 '육상궁'이란 궁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건물이 있다. 이 육상궁은 지금의 청와대 입구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갈림길에 있는데, 임금을 낳은 후궁 일곱 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라 해서 '칠궁(七宮)'이라고도 불리웠다.
애초엔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사당이었던 육상궁은 영조 20년(1744)에 묘호를 '육상묘(毓祥廟)'라 했다가 그 29년(1753)에 궁(宮)으로 올린 것이다. 후에 후궁 5분의 신위를 합사하여 '육궁(六宮)'이라 하다가 1929년 7월에 순빈 엄씨의 사묘 덕안군을 또 합사하여 칠궁이 되었다.
6. 북악 기슭에는 바위들이 많던데, 더러는 역사를 간직한 바위들도 있겠죠?
육상궁의 북녘 개울가인 북악 기슭에 있는 '대은암(大隱巖)'이란 바위는 중종 때 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젊고 유망한 선비들을 대량 학살한 원흉 남곤(南袞)의 집 뒤에 있었다.
그 대은암 일대의 경치가 뛰어나 남곤의 글벗인 박은(朴誾)과 이행(李荇)이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박은은 남곤이 공명에 눈이 어두운 것을 희롱하여 그 집 뒤에 있는 바위에 '대은(大隱)'이라 크게 써 놓고, 집 옆의 바위엔 '만리뢰(萬里瀨)'라고 써 놓고 돌아갔다.
'대은'은 '크게 숨어 있음'의 뜻으로, 주인이 벼슬에 눈이 어두워 알아 주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고, '만리뢰'는 '만리나 되는 먼 거리에 있는 내'의 뜻으로, 이 역시 바로 집 곁에 있으면서도 알아 주지 않아 멀리 있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크고 편편한 이 바위에서 박은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남곤의 처세술을 은근히 꼬집기도 했다.
주인이 벼슬 높고
세력이 불꽃처럼 타오름에
문 앞에 문안드리는 거마(車馬)들이
그치지 않네.
삼년에 단 하루도
동산을 돌아보지 않아
만약 산신령이 계시다면
응당 재앙을 내리리다.
출세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남곤은 젊어서 부모의 상을 입고 있는 중에도 벼슬 욕심 때문에 박경(朴耕)이 반역을 꾀했다가 모함해 죽이기도 했고, 심정(沈貞)과 짜고 조광조 등의 선비를 얽어 기묘사화를 일으켜 학살하기도 했다.
7. 북악산 남쪽 기슭 일대에 유명 인물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보면 풍수적으로도 터가 좋지 않았을까요?
대은암 부근엔 숙종 때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집이 있었는데, 여기에선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가 태어났다. 그 옆엔 또 선조 때 학자 구봉 송익필(宋翼弼)이 태어난 집터가 있었다.
궁정동 2번지엔 중종 때 서윤(庶尹) 김번(金藩)의 집이 있었다.
학조대사가 조카 김번을 위해 이 집의 터를 잡아 주었는데, 북악(北岳)의 모양이 목성(木性)이어서 그 기운을 받아들이도록 집을 지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 후손들이 번성해서 조선 인조 때의 정치가 김상용(金常容), 한학자 김상헌(金常憲), 현종 때의 정치가 김수항(金壽恒) 등의 인물이 나와 세칭 '장동김씨(莊洞金氏)'라 해서 장안에 널리 알려졌다.
지금의 청와대 옆에는 경농재(慶農齋)라는 재실이 있었고, 그 앞에는 '팔도배미'라는 논이 있었다. 이 논은 우리 나라 8도의 모양을 따라 여덟 배미를 만들어 놓은 것인데, 임금이 몸소 이 논에서 농사를 지어 농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농민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근처 북악산에도 많은 바위가 있는데, 궁정동쪽에 있는 바위만 해도 '병풍바위', '맷돌바위' 등 이름난 것이 많다. 병풍바위는 바위가 병풍처럼 넓은 자락으로 벼랑을 이룬 것이고, 맷돌바위는 두 개의 큰 바위가 맷돌처럼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8. 조선시대 이후로는 이 지역이 어떻게 변해 왔나요?
조선 말까지도 많은 기와집들이 있었던 이곳에는 일제 때 근처에 총독부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쇠락해지더니 8·15 광복과 또 6·25 이후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마을이 없어져 갔다. 특히, 근처에 청와대 일대의 정화와 궁정동 안가의 확장 등으로 해서 주민들은 하나하나 마을을 떠나고 지금은 그 일부만이 남아 몇 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고, 그 옛날의 기와집들의 위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지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의 총성이 울렸던 궁정동 안가(安家)는 80년대 초 건물이 헐려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그 앞에는 한식 양옥으로 지어진 한국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한국관은 중요한 시국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각종 관계 기관 대책회의가 열리거나 대통령이 주요 인사를 조용히 만나는 곳으로 활용돼 왔다.
서울시에서는 지난 93년 이 곳에 있었던 안가 등의 건물들을 허물고, 궁정동 55-3의 2200평 필지에 무궁화동산을 조성하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활용할 수 있게 꾸며 놓았다.
조선시대인 많은 문인들이 모여 글로써 좋은 경치를 읊었던 더운우물골 일대, 4공화국 이후엔 공작 정치의 회동과 밀실 연회의 산실인 청와대 안전 가옥터가 지금은 이렇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 궁정동
옛날의 그 유명한 ‘더운우물골’ 마을이 없어지고 이젠 그 곳에 ‘무궁화동산’이라는 공원이 하나 생겼다.
‘더운우물골’ 마을은 한자로는 ‘온정동(溫井洞)’이라 했다.
조선 말까지도 많은 기와집들이 있었던 이 곳에는 일제 때 근처에 총독부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쇠락해지더니 광복과 또 육이오 이후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마을이 없어져 갔다. 특히, 근처에 청와대 일대의 정화와 궁정동 안가의 확장 등으로 해서 주민들은 하나하나 마을을 떠나고 지금은 그 일부만이 남아 몇 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고, 그 옛날의 기와집들의 위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1979년 10월 26일 이 곳의 한 안가에서 큰 역사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탕 탕 탕.
---그 자리도 바로 이 곳이다.
서울시에서는 지난 93년 이 곳의 안가를 허물고, 궁정동 55-3의 2200평 필지에 무궁화동산을 조성하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활용할 수 있게 꾸며 놓았다.
공작 정치의 회동과 밀실 연회의 산실인 청와대 안전 가옥터가 이렇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 육상궁(毓祥宮) [육궁] (고적)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사당. 영조 20년(1744) 묘호를 육상묘라 하다가 9년 후인 영조 29년(1753)에 궁으로 올렸다. 융희 2년(1908) 7월에 저경궁, 대빈궁, 연우궁, 선희궁, 경우궁을 폐하고, 그 신위를 모두 이 궁에 합사하여 육궁이라 불렀다. 1929년 7월에 순빈 엄씨의 사묘 덕안궁을 또 합사하여 실지는 칠궁이 되었다.
□ 칠궁
한국 역사상 정계에 큰 소용돌이를 일으킨 여인 하면 장희빈이 연상될 것이다. 3대 독자인 숙종이 30세 넘도록 왕자를 못 보자 궁녀인 장씨를 가까이 하여 경종을 낳았고 이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당시 노론 소론 서인 정객들이 반대하여 이들을 숙청하는 기사사화가 일어났다. 이어 아들을 못 낳은 민비의 폐비를 반대한다 하여 선비사회가 쑥밭이 되고 그 폐비를 죽게끔 저주한 무고(무고옥)로 조정이 피비린내 속에 묻혔다.
이렇게 억울하게 민비가 죽은 후에 있었던 일이다. 장희빈에게 속아서 민비를 내쫓은 것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이 밤중에 궁 안을 거니는데, 나인 방에서 음식상을 차려 놓고 큰 절하는 그림자를 보았다. 사연을 물으니 민비의 은혜를 입은 나인으로 민비의 제삿날을 맞아 생시에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던 중이라면서 임금님에게 들켰으니 백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하고 엎드려 울었다. 고운 심성에 감동한 숙종은 이 나인 최씨에게 숙빈 호칭을 내리고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를 질투한 장희빈이 최숙빈을 독 속에 가두어 죽이려 했지만 임금에게 들켜 구제 받는다. 이 최숙빈과 사이에 낳은 임금이 바로 영특하신 영조다.
영조는 임금으로 즉위하자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당을 경복궁 가까이 짓고 육상궁으로 궁호를 내렸다. 조선조 사직이 기울던 순종 때 성안에 산재돼 있던 임금을 낳은 후궁의 사당 여섯 궁의 신위를 이 육상궁으로 모아 칠궁으로 통합한 것이다.
남향으로 나란히 서 있는 맨 동쪽에 진종의 어머니를 모신 연우궁, 영조의 어머니를 모신 육상궁, 황태자 이은의 어머니를 모신 덕안궁, 순조의 어머니를 모신 경우궁, 세칭 뒤주대왕인 장조의 어머니를 모신 선희궁,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을 모신 대빈궁, 맨 서쪽 끝이 원종의 어머니를 모신 저경궁이다. 칠궁으로 합칠 때 생시에 사이가 나빴던 장희빈과 최숙빈을 한 울타리 안에 모시는 것에 반대여론이 있었지만 그 혼들의 원한을 배려하여 함께 모셨다. /// (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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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외로워, 구중궁궐 왕처럼
살다보면 권위주의적으로 바뀌는 터와 절간 같은 집무실…
청와대의 ‘불통’에는 건물 구조가 적잖은 역할을 해
미국에선 곧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고 이명박 정부는 출범 1년을 맞는다. 권력의 심장부, 청와대와 백악관에 쏠리는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다. 두 나라의 권부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다른가. 앞으로 10여 회에 걸쳐 백악관과 청와대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은 2000년 10월~2002년 3월 청와대 출입기자를 지냈고, 2003년 7월~2006년 6월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국 정치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편집자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이 국민뿐 아니라 참모들로부터도 고립돼 있다. 백악관에서 혼자 볼링하는 대통령을 만나고 매료된 어느 말단 보좌관의 이야기는 청와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청와대(왼쪽)와 백악관 전경. 청와대사진기자단·REUTERS/ LARRY DOWNING US ELECTION
1990년 2월20일 청와대 관저 신축 공사장 바로 뒤편 수풀 속에서 글씨가 새겨진 표석이 발견됐다. 그동안 짙은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신축 공사 과정에서 비로소 사람들 눈에 띈 것이다. 화강암 암벽을 깎아 만든 가로 250cm, 세로 120cm 크기의 이 표석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청와대는 금석학 대가 임창순(1999년 사망) 옹을 모셔다 글씨 감정을 부탁했고, 임 옹은 300~400년 전에 글씨가 쓰여졌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청와대는 옛 본관 터에 ‘천하제일복지’라고 쓴 표석을 세웠고, 이 사진은 청와대 홈페이지에도 올라 있다. 그러나 실제로 수백 년 전에 이 표석이 세워졌는지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표석 발견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인사는 “표석이 조선시대에 세워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일제시대 때 이곳에 조선총독 관저를 지으면서 표석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추정만 있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풍수학의 대가로 꼽히는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조선시대엔 지금의 청와대 터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었다. 특정 지점에 표석을 묻어놓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게 하는 건 대원군이 많이 썼던 일종의 정치적 수법”이라고 말했다.
“형식에 압도돼 궁중문화에 젖는다”
청와대 자리가 명당이란 주장은 오래전부터 풍수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제기됐다. 고려시대 숙종 9년에 왕실의 이궁(離宮)을 현 청와대 터에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수백 년 전부터 청와대 터를 길지(吉地)로 여겼다는 뜻이라고 청와대 홈페이지에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그곳의 주인만 되면 권위주의적 인물로 바뀌는 청와대 터는 문제가 많다”고 말한다. 주산인 북악산이 수려하지만 규모가 인왕산에 비해 작아, 이런 곳에 외로이 오래 거주하다 보면 왜소한 독불장군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최 전 교수는 “이건 풍수학적인 해석이라기보다는 환경심리학적 해석”이라며 “청와대 지대가 꽤 높아 이곳에선 남산과 서울 시내를 모두 굽어볼 수 있다. 대통령이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데, 실제로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본관 2층 구조
꼭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청와대는 흔히 구중궁궐에 비유된다. 권부의 상징이란 뜻도 있지만, 국민과 떨어져 권위의 벽에 갇혀 있다는 뜻도 담겨 있다. 실제 청와대에서 근무한 많은 인사들은 본관이 ‘조선시대 왕이 살던 대궐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박준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본관에서 일하다 보면 그 내부 장식과 형식적 웅장미에 압도돼 저절로 궁중문화에 젖기 쉽다”고 말했다.
청와대 홈페이지는 “본관은 전통 목구조와 궁궐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지었다”고 소개했다. 2층 본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단층의 별채를 배치했고, 우리나라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 있고 아름답다는 팔작지붕을 올렸다. 지붕 위엔 청기와를 씌웠는데, 그 수가 15만 장에 이른다.
전통적인 팔작지붕을 올린 점을 비롯해, 건축학적으로 청와대 본관의 가치는 상당히 높게 평가된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 참모들을 가까이 두고 싶어 본관 구조를 바꾸는 방법을 고려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전문가들에게 자문한 결과, 현 본관은 조형미 측면에서 잘 지은 건물이란 평가를 들었다. 내부 구조를 바꾸면 그 조형미가 사라진다는 판단에서 구조 변경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큰 운동장만 한 방에 책상만 덩그러니
그러나 실용성 측면에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청와대 본관(1989년 완공)은 건설 당시 청와대 비서실의 요청으로 수차례 설계 변경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공사비가 치솟았지만 청와대는 시공사인 현대건설에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것 때문에 노태우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 회장의 관계가 냉랭해졌다고 한다. 청와대 본관은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경복궁을 잇는 일직선상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인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대통령 집무실이 서울역 쪽에서 올라오는 센 기를 피하기 위해 약간 비켜서 위치를 잡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청와대 경호실은 경호 차원에서 본관의 내부 구조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청기와가 깔린 팔작지붕의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한겨울에 쌓인 눈이 살짝 녹으면서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마침 순찰 중이던 경호실 요원이 다칠 뻔한 사고도 있었다.
대통령실이 형식적 웅장미를 갖춘 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미국도 처음 백악관을 지을 때 어떤 형식으로 지을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유럽 봉건왕조 지배에서 독립한 신생국의 많은 인사들은 새로 지을 대통령실이 왕궁을 연상시키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아일랜드 출신 건축가 제임스 호반의 설계안을 받아들여, 아일랜드의 레인스터 공작 저택을 본뜬 크고 호화로운 건물을 짓는 걸 밀어붙였다. 대통령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청와대 본관 역시 과거 궁궐의 형식미를 따른 점에선 백악관과 비슷하다. 하지만 오직 대통령 한 사람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란 점이 다르다.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임기 말엔 국민과 멀어진 채 극심한 정치적 위기를 겪은 데엔, 청와대의 구조가 적잖은 역할을 했다. 본관이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다 보니, 그 웅장한 규모에 비해 방 수가 적고 대통령의 동선(動線·걸어서 움직이는 행로)이 길다. 경호실이 본관 구조에 불만을 표시한 이유 중 하나도 동선이 길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이 하루 종일 업무를 보는 집무실에 대해,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인사는 “큰 운동장만 한 방에 대통령 책상과 회의용 탁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흡사 절간을 연상시킨다”고 표현했다. 누구나 청와대 본관에 들어서면 그 웅장한 구조에 위압감을 느낀다. 2층 계단을 올라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면 긴장은 극에 달하게 된다. 어느 장관이 집무실 문을 열고 대통령 책상 앞까지 가는 도중에 너무 긴장해 오줌을 쌌다는 일화가 그럴듯하게 나돈다. 그러니 대통령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다.
백악관 웨스트윙 구조
백악관, 말단 보좌관과 대통령의 만남
지금의 청와대는 국민뿐 아니라 참모들로부터도 대통령이 고립돼 있는 구조다. 리처드 닉슨부터 빌 클린턴까지 30여 년간 백악관 보좌관으로 일했던 데이비드 거겐(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은 저서 <권력의 증인>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을 직접 만났을 때의 강렬한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70년대 초, 백악관 말단 보좌관이던 그는 연설 원고를 전하러 밤늦게 백악관 볼링장으로 닉슨을 찾아갔다. “대통령은 (놀랍게도) 혼자서 볼링을 치고 있었다. 닉슨은 잠시 동안이지만 권력의 올가미를 벗어던진 듯했다. …나는 그날 밤 그에게 매료됐다.”
우리 청와대에선 이런 광경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청와대 행정관은 물론 비서관들도 대통령을 마주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공간적으로 대통령 집무실이 비서실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비서실 건물인 위민관에서 대통령이 집무하는 본관으로 가려면 경비 초소를 2개 거쳐야 한다. 거리는 500m 정도, 걸어서 5분가량 걸린다. 본관에 보고하러 올라가는 수석비서관들은 대개 차량을 이용한다. 이런 상태에선 대통령이 여러 명의 참모를 불러놓고 피자를 시켜 먹으며 구수회의를 여는 백악관 풍경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Oval Office)가 참모들의 방과 바로 붙어 있고 백악관 뜰인 로즈가든으로 곧바로 나갈 수 있는 개방형 구조라면, 청와대 본관은 참모들의 접근조차 어려운 폐쇄형 구조인 셈이다.
1998년 2월 청와대에 입성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문제점 때문에 집무실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 두려 했지만, 경호 문제로 포기했다. 경호실에선 “대통령 안전도 안전이지만, 정부종합청사를 드나드는 시민들의 불편이 매우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무실을 청와대 밖으로 이동하는 대신에, 내부 구조를 바꾸는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노 대통령은 과거 정권의 핵심 인사들로부터 ‘대통령은 외롭다. 구중궁궐에서 혼자 지낸다’는 말을 많이 들어 두려움이 컸다고 한다. 또 그가 청와대에 입성(2003년 2월)할 무렵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이 국내에 방영됐다. 노 대통령은 여기 나오는 것처럼 참모들과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격의 없는 회의를 하고 싶어했다. 청와대 본관의 내부 구조를 바꾸라는 지시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그러나 건축학적 가치를 이유로 본관 개조를 포기하고, 대신 본관 가까이에 비서동을 하나 더 신축했다. ‘위민1관’이라고 부르는 건물인데, 비서동 3개 중 유일하게 청와대 안뜰인 녹지원 쪽에 대통령 전용 출입구를 만들고 대통령 집무실도 하나 마련했다. 대통령이 수시로 이 비서동에 들러 참모들과 만나고 직접 집무도 할 수 있도록 꾸민 것이다. 위민1관이 지어진 초기엔 노 대통령이 자주 이곳을 이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청와대 본관 집무실로 다시 회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주일에 서너 차례 위민1관의 대통령 집무실로 내려와 비서실장이나 수석비서관들의 보고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물리적 거리는 주관적 정책 결정으로
공간 배치가 중요한 이유는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니다. 거리가 멀면 참모들과 신속하고 원활한 대화를 하기 어려워진다. 참모들과 쉽게 만나지 못하면 대통령 혼자서 또는 극소수의 측근들만 불러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의 말처럼,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모든 사안을 다 꿰뚫어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대통령은 훨씬 더 독단적이고 주관적인 정책 결정에 휩쓸리기 쉬워진다.
대통령과 국민, 대통령과 참모의 거리를 좁히는 문제는 여전히 청와대의 숙제로 남아 있다. 정치적 위기가 닥쳤을 때 대통령은 더 외로움을 느낀다.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청와대 집무실로 이명박 대통령을 방문했던 한 인사는 본관 부속실 직원들로부터 “자주 대통령을 찾아와 얘기를 해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출처
[제738호]대통령은 외로워, 구중궁궐 왕처럼 : 정치일반 : 정치 : 뉴스 : 한겨레21 (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