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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우리 명절 연휴 기간인데요. 우리 옆에 있는 분들 보면서 인사 나누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어떤 현수막에 설날을 설레이는 그날 이렇게 표현을 해놨더라고요. 근데 우리 여성 교우들에게는 설레는 그날이 아니라 몸살 나게 하는 그날일 수 있어서 우리가 함께 서로를 배려하고 또 돌아볼 줄 아는 시간이 돼야 그날이 설레는 날이 되지 잘못하면은 이 설날 이후에 부부싸움하는 그날이 되고 말잖아요.
이번 한 주간은 여러분들이 오늘 기도하신 우리 집사님의 기도처럼 한 주간 우리가 마주하는 사람들이 그냥 형제의 친척 의로 여기지 마시고 한 영혼으로 보시고 우리가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그들은 이때가 아니면 복음을 전해들을 수 없는 우리 형제 친척들도 있잖아요.
작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제목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기 오늘 이야기는 좀 전체적인 스토리를 먼저 쫙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머릿속에 이 상황에 대한 그림을 그리면서 오늘 말씀을 좀 들으면 조금 더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이 바울은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가이사라를 출발하여서 로마로 가고 있어요. 여행으로 가는 게 아니고 지금 재판을 받기 위해 가는 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바울에게 주신 사명에 따라 바울은 그 로마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방법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 길이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23장 11절에 보면 담대하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나님이 이 길을 계획하시고 인도해 주고 계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가는데 유라굴로라고 하는 큰 광풍을 만나게 되고 그 광풍 때문에 그 배에 탄 모두가 다 이제 삶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이르게 됩니다. 그때 천사를 보내셔서 또 한 번 말씀하세요. 27장 24절에 보면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가이사 앞에 서야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이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대로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과 함께한 모든 사람들 단 한 사람도 상하지 않게 하고 모두가 구조되는 이야기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 구원의 이야기를 좀 더 이렇게 확장시켜서 이제 자세하게 말씀을 나눠볼게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셨고 또 천사를 통해서도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유라굴로라고 하는 엄청난 태풍으로 말미암아 뱃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는 이제 그 배에 탄 모두는 다 생명을 잃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근데 바울이 이미 하나님께 들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그들에게 담대하게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을 전하고 난 이후에도 풍랑은 여전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은 열나흘. 굉장히 긴 시간이 폭풍후 가운데 지나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뱃사람들에게 우리는 한 사람도 죽지 않을 것이다. 구원받을 것이라고 장담한 지 한 최소한 11일 정도가 지났을 때라고 생각이 됩니다.
광풍 속에서 얼마나 여러분들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큰 태풍이 왔을 때 배를 타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조금만 배를 타도 배가 출렁출렁하면 얼마나 긴장되고 무서운지 몰라요.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배 속에서 그 광풍을 10일을 넘는 기간 동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막 굴러다니는 거예요. 배가 막 막 이렇게 얼마나 출렁출렁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그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은 바울의 말에 대해서 믿음이 가기도 하고 또 시간이 좀 계속 가니까 의심이 되기도 하고 믿음과 의심이 이렇게 교차되는 그런 경험들을 그들은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광풍을 만난 지 열나흘이 지난 그 밤에 이제 광풍이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탄 배는 아드리아 바다에서 표류하기 시작해요. 아드리아 바다는 지중해 최대의 섬 그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섬과 그들이 출발했던 그레데 섬 사이에 있는 바다입니다. 그러니까 열나흘 동안 이 배가 엄청나게 먼 거리를 굉장히 밀려다니면서 지금 지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정쯤 되었을 때 사공들이 이제 배가 육지에 가까워 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파도 소리가 해변에서부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물의 흐름이 이제 이제 해변에 가까워지면 그렇게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물의 길이를 잽니다. 물의 길이를 재봤더니 그게 약 20길 이 길이라는 게 우리 남자 성인들 이 팔 끝에서 팔 끝 정도의 길이를 한 길이라고 보통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20길이면 약 37m 근데 조금 있다가 또 재니까 이제는 15길 27m 이게 수심이 점점 얕아진다는 말은 지금이야 우리가 등대가 있고 또 지도가 있고 GPs가 있고 이러니까 어느 정도 바다를 다 알고 이렇게 지금은 항해를 하는 시대이지만 지금도 배들이 사고가 나잖아요.
그런데 이때 당시에는 그런 게 전혀 없으니까 이게 그냥 배들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그냥 육지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육지에 가까우면 이제 더 위험해지는 거예요. 왜 암초에 걸릴 수 있고 또 여러 가지 여러 가지 위기로 배가 파손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같이 등이라도 있어서 좀 비춰보면 그래도 좀 위험성을 줄일 텐데 등이 어디 있습니까?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원래 사공들의 역할은 어두운 때 그리고 배가 얕은 곳으로 가면 더 얕은 곳으로 밀려가지 않도록 이때 닻을 내려가지고 닻을 내려서 배를 고정시키고 밝을 때 배를 움직이게 하는 게 이 사공들의 역할입니다.
근데 이 사공들이 은밀하게 움직여요. 이 상태로는 날이 밝아도 살 길이 없겠다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으로 볼 때는 지금 이 상황이 곧 배가 난파될 것이다. 육지에 가까워질수록 진흙에 걸리거나 암초에 부딪혀서 깨어지고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공들은 원래 자기들이 해야 될 역할, 닻을 내리는 역할이 아니라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이제 거룩배 한마디로 이 큰 배가 육지에 이렇게 다다를 때 직접 못 가니까 사람들을 작은 거룩배에 태워가지고 나르는 그 거룩배를 내려가지고 이 사람들만 자기들만 빠져나가려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때 사도 바울이 이 모습을 보고 이 상황을 무산시켜요. 지금 얼마나 이 사공들도 얼마나 지금 위기의 상황이라고 십며칠을 그 풍랑을 견디고 살아왔으니 그리고 지금 이 지흙 같은 어둠 가운데 배가 곧 파산될 거라고 자기들은 예측이 가능하니 자기들 마음에 우리 나라도 살고 싶다고 하는 그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죠.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근데 바울이 이 상황을 간파했어요. 어쩌면 여러분 이 상황이 절박한 순간에 이기적인 우리 자기 중심적인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만 살려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지만 세월호 선장이 그 선장이 끝까지 남아서 자기 역할만 감당했더라도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다들 안타까워하고 있잖아요.
근데 그 사람은 자기 먼저 살겠다고 선장의 자리는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자리고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자리니까 살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사공들도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신분으로 이송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죄수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근데 사공들이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 걸 보면서 이제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말을 합니다. 이 배에 저 사람들이 있지 않으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그래서 사공들이 탈출하는 것을 좌절시켜버립니다. 거룩 배를 잘라버려요. 바울을 신뢰하고 있는 이 백부장 윤리호의 명령을 받아서 군인들이 사공들이 타고 가려고 했던 거룩배를 끊어버립니다. 이 거룩배라고 하는 거는 그들이 큰 배에서 육지로 옮길 때 그들의 이동 수단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데, 그리고 바다에서 배를 버린다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는데 백부장이 얼마나 이 바울을 신뢰했는지도 볼 수 있는 장면이에요.
드디어 이제 날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이제 율리오라고 하는 백부장이 바울을 지지해 주고, 그리고 바울의 말에 따라서 지금 움직여준 것처럼 바울은 이제 실질적인 이 배에 더 영적 리더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들이 여러 달 동안 그 큰 풍랑 속에서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큰 위기 속에서 배불리 뭘 먹을 수도 있겠습니까? 죽음이 바로 앞인데 지금 막 엄청난 그 풍랑 속에서 뭘 먹었겠어요? 그냥 하루하루 겨우겨우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그들 그들을 향해서 바울은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33절 중반과 34절 네 앞부분인가요? 네 여기를 보면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먹지 못하고 줄인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 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오.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아멘 여러분 그 죽음의 위기 속에서는 아까 전에 그 사람들처럼 사공들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막 일어나요. 그리고 막 날카로워집니다. 서로 막 이기주의적이고 더 상대방을 막 내려 깔죠. 어쩌면 이 열나흘 동안 긴장하며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먹으라고 하는 이 바울의 첫 번째, 그들을 향한 이 이야기는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하는 그런 효과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에 찬 이 바울의 단원 속에서 그들은 희망을 발견하고 먹고 힘을 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결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위기 속에서 지금 아직 위기가 끝난 게 아니에요. 지금 여전히 그들은 불안한 상태입니다. 잠깐 잔잔해진 느낌을 갖고 있는 거예요. 지금 어딘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공들이 본 것처럼 곧 파손될 수도 있는 그런 위기의 상황이에요.
그런데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바울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이 침착한 모습, 그리고 평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때부터 정말 수년간 수백 년간 기독교는 탄압을 받았습니다. 순교를 당했죠. 그런 상황 속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씀들을 붙들고 위기 속에서 내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되는가를 분명히 배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이 우리에게까지 온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위기 속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까? 어떠한 위치에 서 있습니까?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합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감사한 후에 떡을 떼어 나눕니다.
그리고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숫자를 누가는 기록하고 있죠? 선장, 선주, 군인 죄수를 합하여 276명이었다. 아마도 음식을 나눠주기 위해서 그 사람 수를 헤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모두 이제 배불리 먹고 난 이후에 한 일은 남은 음식들 남은 미를 다 바다에 버리는 거예요. 바다에 버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배를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서 배가 가벼워야 육지에 최대한 가까이 들어갈 수 있잖아요. 지금까지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먹을 것들, 자기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귀한 물건들, 그런 것들은 생명과 비교해 보니까 그냥 바다에 던져버릴 것에 불과했던 것이죠.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맘모니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물질, 나도 모르게 뭔가 내가 추구하는 어떤 것 그것들을 더 소유하려고만 해요. 근데 지금 이 모습을 보십시오. 생사의 위기 속에서 가장 그들이 먼저 한 일이 뭐라고요? 먹고 난 다음에 다 버렸어요. 살기 위해서 다 버렸어요. 지금 바울이 이렇게 이끌어가고 있는 이 판단과 행동은 굉장히 믿음이 가득한 행동이었고 그리고 치밀한 행동이었습니다.
남은 음식을 바다에 버리는 그들, 그들 안에는 무슨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버렸을까요? 이 배에서 우리는 분명히 살아서 육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확신 그리고 이제는 이 배에서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육지에 내려가서 우리는 음식을 먹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 확신을 더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도 여겨지는 한 대목이에요. 드디어 날이 밝아왔습니다.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경사진 해안이 이제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제 그곳을 향해서 그들이 최대한 해안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이제 행동들을 해요. 나름대로 닻을 끊어버리고 이제 돛을 올려서 바람의 힘을 이용해서 배를 최대한 해안가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 속에서 이 배가 모래톱에 걸리게 돼요. 지금에야 배들이 튼튼하지만 그 당시의 배들은 얼마나 오랜 긴 과거 전이니까 얼마나 약하겠습니까? 이미 그 광풍으로 인해서 많이 파손되어 있던 이 배가 또 여러 파도를 만나다 보면 그곳에 갇혀가지고 배는 파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도착한 섬은 멜리데라고 하는 섬이에요. 이 멜리데이라고 하는 섬은 주변이 모래와 진흙 알갱이가 부서져서 약 5m 깊이의 진흙이 깊이 형성되고 있는 그런 지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배가 한 번 딱 그 진흙 사이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거룩배라도 있었으면 거룩배의 사람을 실어서 좀 이렇게 사람들을 이동이라도 시킬 텐데 조금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그런데 거룩배도 이미 끊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때 죄수들을 총괄하고 있었던 군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죄수들이 헤엄쳐서 이 배에서 도망갈 수 있으니까 죄수들을 다 죽이고 우리 이제 수영 쳐서 갑시다.
근데 그들이 그 군인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뭐냐면 그 당시에 로마 법에서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들을 군인들이 놓치게 되면 그 죄인의 대가를 군인이 치러야 되는 그런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도 역시 사형 선고를 받고 가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잖아요. 어쩌면 이 군인들도 앞에서 거룩배를 내리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하는 그 사공들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자기들만이라도 살겠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죄성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지난주 오후에 우리가 자기 중심성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나눴었는데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기 중심성이 우리 안에 있는지 그것들이 계속 여전히 남아서 쓴뿌리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이번 명절 기간 동안에 여러분들의 친척들의 형제들을 만날 때도요. 내 안에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만나면 늘 불평불만밖에 나오지 않아요. 탓을 합니다. 남 탓
이 상황에서 백부장인 윤리오가 중요한 역할을 해요. 바울을 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군인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은 먼저 육지로 헤엄쳐 나가라고 명하고, 수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뒤에서 배가 깨어져서 이제 널려 있는 널 조각이나 부유물들을 의지해서 육지로 가라고 명합니다. 결국 276명은 바울의 말대로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모두가 이제 그들이 살게 되는 상황입니다.
22절의 말씀처럼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 그러니까 배만 잃고 모두가 살게 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제가 길게 지금 이야기를 쭉 이어왔습니다. 굉장히 성경에서도 이 이야기를 길게 다루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배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구조된 이야기를 우리에게 자세하게 우리에게 기록하고 있을까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라고 하는 것 몇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 한번 같이 따라 해볼까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광풍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또 그 속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줄 믿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어려운 질문이 발생하죠. 왜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는 살리시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구원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물론 풍랑에서 만난 이 배에서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생명이 구조된 것이지 그들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경우에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과 자기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고 다스리는 성경 속의 원리를 보게 됩니다.
바울과 함께 구조를 받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을 겁니다. 바울이 뭔 말을 해도 니가 나랑 똑같은 죄인인데 죄수가 무슨 그런데 이 구원이 그 과정 속에서 정말 하나님이 하셨음을 그들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가는 여정 속에 이런 거친 바다와 풍랑을 만나는 상황들을 분명히 마주하게 됩니다.
근데 여러분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바울과 같이 내가 너와 함께할 거야 너는 결코 상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가 결과를 알지 못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가야 하는 상황들이 대부분이죠.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주장하고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나아간다면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이러한 역사는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바울과 같은 똑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우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기를 원하는데요. 빌립보서 1장 20절 21절 말씀을 한번 우리의 고백으로 같이 올려드리겠습니다. 시작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아멘 우리는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유라굴로 같은 광풍을 만날 수 있고 또 그와 같은 고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없다고 하는 사실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지고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이 항해를 마치기까지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거나 저지할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고 평안할 수 있어요. 그렇죠. 내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셔. 내가 지금 비록 수술대에 올라가야 할 그 위치에 있어도, 내가 비록 지금 병환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내 힘이 다 빠지는 상황이 있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하나님의 선한 뜻은 분명히 이루어져라고 하는 분명한 확신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도 하나님께 맡기고 일어설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마치 이 본문에 나온 난파선과 같은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 깨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그러한 깨어진 그런 배를 우리는 타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서 몇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여러분들 들으셨죠? 다들 위기의 순간에 나만 살겠다고 상대방을 죽이거나 상대방은 상관없이 자기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죄성입니다. 사공들이 그랬고, 군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위기의 순간 죽음의 순간에 침착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동하고 그 믿음으로 확신 있게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남파손 위에서 나만 살겠다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나만 살겠다고 우리 가족만 배부르면 된다라고 그렇게 계속 우리를 가르치죠.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래서 이 배에 탄 사람들이 바울을 마지막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기 자신들과 너무 다른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으로 행동하는 그 사람, 그의 말이 너무 다름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 위기의 순간에 바울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명이 만위에 주님께서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명히 다를 이유가 있다고 하는 것이죠.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이 불리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소수의 하나님이 찾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하길 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하나님은 의인 열 명을 찾으셨어요. 단 의인 10명이 없어서 그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예루살렘 거리를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여러분 단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예루살렘을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이 난파선 속에서 한 사람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생명줄과 같은 겁니다. 사도 바울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그 276명의 그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예레미야에게 말씀한 이 이야기는 슬프게도 그 한 사람이 없어서 결국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인 바벨론 느브가네셀 왕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맙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무늬만 신앙인, 무늬만 직분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하늘의 소망 교회에는 무늬만 가득한 신자들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이 알렉산드리아 배를 침몰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배에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바울로 인해서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모든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여러분 이번 명절은 굉장히 길어요. 그렇죠 명절 긴 연휴 기간 여러분들 보내실 때 그 기간 동안 만나게 될 수많은 가족들 형제들, 또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수많은 이웃들, 그들 안에서 여러분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먼저 기억하길 바랍니다.
아까 전에 바울이 난파선 안에서 어떤 존재와 같다고요? 생명줄의 존재라고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 가정에서 생명줄과 같은 존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여전히 홀로 지금 신앙생활하는 분들도 계세요. 늘 명절만 되면 제사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분들도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생명줄이에요. 여러분들이 만나는 그 사람들 속에서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 여러분들로 인해서 여러분들 가족들 여러분들 이웃들이 살아나게 되는 살려지는 귀한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