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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을 넘어 고향 강릉에 간 시인 윤후명
이승하
윤후명의 본명은 윤상규尹尙奎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빙하의 새」가 당선되었을 때도, 1977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문지시선을 발간하기 전 일련번호 없이 시집을 냈을 때도 그의 이름은 윤상규였지만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이 당선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윤후명尹厚明이 된다. 이후, 소설가 윤후명의 활동은 눈부셨다.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합쳐 10권 이상을 출간하면서 상도 적지 않게 받고, 그럼으로써 80~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한다. 그러다 보니 시작詩作은 아무래도 소홀한 바가 있는 것 같아 1970년대의 시를 분석한 「산업화 시대의 시인들」이란 평론(1992년 《현대시학》에 6개월 동안 연재)에서 윤상규 시인을 지목하여 시사적인 가치를 십분 부여한 뒤에 이런 말로 결론을 맺었다.
현실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시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시기에 이러한 초월적인 에스프리는 단연 이채를 띠었다. 윤상규의 작업은 역사의 진보에 대한 회의에서 초래된 새로운 방법론의 전개였기에 더욱 이색적이었지만 장르를 바꿈으로써 종결되고 만 느낌이 있다.
아뿔싸! 내가 쓴 이 글을 윤후명 선생님이 보았던 것이다. 문단 행사장 같은 데서 나를 봐도 별 말씀이 없었는데 내심 이를 갈고 있었다. 1992년 제2시집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를 내면서 당신은 장문의 해설을 본인이 직접 쓴다. 시인 자신이 권말해설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파격을 감행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놀랍게도 윤후명 선생님은 “나는 영원히 시인이기에 내 작업은 결코 ‘종결’되지 않았다.”고 해설에다 썼고, 그 시집에 사인까지 하여 내게 부쳐주셨다. 본인은 시를 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쓰고 있었다고 내게 강력하게 항의한 셈이었다. 나는 시집을 잘 받았다는 전화를 드리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윤후명의 소설은 시 같다. 국내 어떤 작가보다도 감각적인 문체를 구사하고 있는데, 그래서 ‘구수한 입담의 작가’가 아니라 ‘섬세한 감수성의 작가’로 평가받는 것 같았다. 윤후명이라는 이름으로 간간이 시를 쓰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눈에 잘 뜨이지는 않았다. 시인 윤상규의 작업은 종결되고 만 것 같다는 나의 언급에 당신은 치미는 울화를 지그시 누르며 위의 글을 썼던 것인데, 제3시집은 언제 나오느냐 하면, 2012년이다. 서정시학 간 『쇠물닭의 책』이다. 그 상간에 ‘시와 소설 그림집’, ‘육필시집’도 내기는 했었지만 두 번째 시집과 세 번째 시집의 거리는 딱 20년이다. 그런데 시선집 『강릉 별빛』(서정시학, 2017)을 낸 이후 소설가 윤후명은 시인 윤상규로 돌아간 것인 양 활발히 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마도 동인 ‘70년대’가 다시 모여 동인지를 내게 된 것이 한 계기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70대가 되어 다시 모인 ‘70년대’ 동인 강은교ㆍ김형영ㆍ윤후명ㆍ정희성은 지금 이 시대의 그 누구보다 시를 열심히 쓰고 있는 현역시인이다. 이번에 《시와 표현》에 발표하는 신작시 4편에 대한 리뷰를 청탁받고, 시에 대한 소감을 쓰기 전에 군말을 너무 길게 했다.
남대천 둑방길 밑 납작한 함석지붕
도롱이집이라 부르겠네
삿갓 하나로 몸을 가리고
예전 단오장 가듯 둑방길을 가겠네
대관령에서 남대천 흘러내려
바다로 가는 길
나도 그 길 따라 바다로 가겠네
도롱이는 비에 젖어 세상일 궂다 해도
나는 바다에 이르러 궂은 일 없다 하겠네
머나먼 세월 지나 둑방길에 오르니
남대천에 비친 대관령 다시 보이고
나 태어나 이제야 나를 찾네
오랜 눈길로 내 지난날을 찾아가
남대천의 대관령을 다시 보는 도롱이집
―「대관령 13」전문
윤후명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다. 떠나온 지 오래되었을 것이고, 자주 가보지는 못했겠지만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할까, 나이 70대에 접어들어 소설집 『강릉』과 시집 『강릉 별빛』을 낸 것으로 미루어 고향 찾기를 의식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작시 「대관령」 창작도 그 일환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시적 화자는 대관령에서 남대천을 거쳐 동해로 이르는 물길을 따라가고 있다. 시발점은 남대천 둑방길 밑에 있는, 납작한 함석지붕의 집이다. ‘도롱이집’이라고 이름붙인 집이 그 고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인지 소년 윤상규의 추억 어린 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 보인다. “머나먼 세월 지나 둑방길에 오르니/ 남대천에 비친 대관령 다시 보이고/ 나 태어나 이제야 나를 찾네”는 자신이 왜 이 연작시를 쓰고 있는지에 대한 아주 명확한 해명이다. 남대천에 비친 대관령은 육신의 고향이며 영혼의 안식처다. 전에는 고향에 대해 시큰둥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야’ 고향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나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향은 어떤 곳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아직도 고향은 태를 묻은 곳이고 뼈를 묻을 곳이다. 일가친척이 살고 있고 죽마고우가 반기는 곳이다. 그의 어린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며, 또한 그 자신의 기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시인의 고향 찾기는 계속된다.
큰 산 아래 흘러 내려온 남대천
얄룽창포강이라고 해도 좋다
브라마푸트라강이라도, 메콩강이라도 좋다
한강일까
산은 형제봉 혹은 부부봉
독도의 동도와 서도
새 한 마리가 어디로 날아갈까 하늘을 가로지른다
아니, 먼 산과 들을 건너와
세상을 날아가고 있다고 하자
오래 전 범일국사가 태어난
우물가에는 한 그루의 탑이 자라고 있다
탑은 너무나 오래 세상을 내다보아
그루터기에 창문이 달려 있다
새는 창문 밖 남대천에 목을 축인다
―「대관령 14」전문
이 시에 나오는 범일국사(810~889)는 신라 말의 선승으로서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국사성황’으로 신앙되고 있다. 강릉을 비롯한 영동 지역의 수호신으로, 해마다 강릉단오제를 통해 제의를 받는다. 대관령 일대는 어느새 아득한 설화의 공간이 된다. 자료를 찾아보았다. 남대천은 강릉시 남쪽에 있는 강으로 대관령과 삽당령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성산면 오봉에서 합쳐져 강릉시를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특히 남대천 상류에 우거진 소나무 숲은 강릉시의 경관을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강릉의 농업용수와 상수도의 수원지 역할을 하는 젖줄이다. 남대천 주변으로 단오공원, 강릉단오문화관, 임영관살문 관아유적지 등이 있다. 매년 음력 5월 5일이면 이곳 둔치에서 단오제가 개최된다. 새가 상징하는 것은 생명이고 유한이며, 탑이 상징하는 것은 기원祈願이고 무한이다. 대관령에 가서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와 세상을 내다보는 탑을 보면서 시인은 자신의 70년 인생을, 50년 문필 생활을 회상해보았을 것이다. 자라나는 탑은 역설이다. 사람들의 관심 밖이던,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탑이 생명을 갖고서 현현하는 곳, 대관령이다. 강릉이다. 고향이다.
숲속으로 들어간다
몸을 잎 뒤에 감추면
내 몸에서 새록새록 돋아나는 잎사귀
떠나간 사람을 닮는다
어디를 닮았을까 살피는 동안
나 대신에 잎사귀들이 내가 된다
그 사람이 내가 된다
숲은 우거지고 나는
잎사귀의 하나가 되어
어떤 얼굴을 닮는다
내가 잎사귀가 되는 게 아니라
잎사귀가 내가 된다
내가 남긴 사랑의 흔적이
바람에 잠깐 흔들린다
대관령이 잎사귀 뒤에 수줍게 선다
―「대관령 15」전문
참으로 묘한 시다. 화자가 숲에 들어가서 잎사귀가 되는 과정이다. 잎사귀가 내가 되고 내가 잎사귀가 된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이 이루어진 계기가 ‘사랑’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서로 사랑한 뒤에 이별하였고, 지금은 그때를 회상하고 있다. 덩치 큰 사내가 나뭇잎 뒤에 몸을 감추면 파릇한 생명이 무수히 돋아난다. “그 사람”인지 나인지 분간 못할 잎사귀가 같은 나무에서 돋아나는데,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한 몸에서 돋아나므로 나인지 너인지 구분 못할 그것은 한때 너와 나눴던 사랑의 모습이자, 그 시절이 무성하게 그리운 현재적 상황이다. 너와 나는 지금 나뭇잎이 되어 나무의 몸 안에서 동체同體를 이루었다. 너를 향한 그리움의 절정에서 대관령도 잎사귀 뒤로 다가선다. 사내보다 더 우람한 대관령에게는 어떤 그리움이 있기에 그 높은 고지에서 고개 한 번 숙이지 않고 먼 데로 눈길을 주고 있을까. 연작시 16번은 아주 구체적이다. 일제 강점기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쉬지 않고 누에실을 잣는다
남양에서는 전쟁이 한창
잠업蠶業학교는 반쯤 문을 열고
선생님들은 다리에 각반을 둘렀다
누에가 몇 번 잠을 잤나?
잘못하다간 서방 사조지로絲調之路로 갈 뻔했지
아니면 남방 면전緬甸 방면으로 가서
누에처럼 머리만 쳐들고 누워 있을지
고치를 삶으며 어머니는 먼 산을 걷는다
오디처럼 검붉은 하루하루
잠사蠶絲교실은 삐그덕거리는 물레소리
저 큰 산이 막혀 바깥으로는 갈 수 없는 검붉은 하루
남대천 물고기 오르는 소리에
눈을 감는다
―「대관령 16」전문
잘 안 쓰는 한자어가 나온다. ‘絲調之路’는 실크로드의 한자 표기다. ‘緬甸’은 지금의 동남아시아 미얀마를 가리키는 한자 표기다. ‘蠶絲’는 누에고치에서 켠 실로서 잠업학교, 잠사교실은 일제 강점기 때 전국 곳곳에 있는 농잠학교를 가리킨다. 이 시에 나오는 어머니는 고치를 삶으며 먼 산을 걷는다.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들은 다리에 각반을 둘렀다”가 무슨 뜻인가 하면,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은 학교 교사들에게 군복을 입게 하였고 칼을 차고 수업시간에 들어가게 하였다. 학교에서도 연일 군사교육이 이루어졌다. 여학생들은 간호교육을 받았다. 대피훈련도 하루가 멀게 이루어졌다. 군인이 아닌 교사가 다리에 각반을 둘렀으니, 한반도 전체가 병참기지였다. 어머니는 눈만 뜨면 누에실을 잣고, 누에고치를 삶고, 물레를 돌렸다. “저 큰 산이 막혀 (대관령) 바깥으로는 갈 수 없는 검붉은 하루”를 보낸 화자의 어머니는 시집 『강릉 별빛』의 「어머니의 대관령」과 「어머니의 감자」에도 등장한다.
이부자리 트레일러에 싣고
옛날 육군 제28사단의 청년장교는
어머니를 살핀다
대관령을 넘는 길 옆 콩밭 뙈기
콩꽃 두두豆豆 꽃피었는데
없는 것까지 말하는 사랑 언제 오려나
―「어머니의 대관령」부분
어머니는 감자를 깎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감자를 깎아 항아리에 담근 어머니
앙금을 내려 떡을 빚으면
떡을 빚으면
대관령 호랑이도 내려온다고
떡을 먹지 않는 호랑이도 굶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감자를 깎는다
―「어머니의 감자」부분
고향을 찾는다는 것은 어머니를 찾는 것이다. 그의 이전 시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던 어머니가 이와 같이 나오게 된 이유도 시인이 귀거래사를 읊조리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시인은 어머니의 사랑의 역사도 살펴보고 어머니의 유년시절도 추리해본다. 어머니는 대관령의 어머니이다. 대관령은 또한 어머니의 대관령이다. 대관령 저쪽, 즉 영동 사람이다. 대관령을 넘기가 그렇게 힘든데, 소년 윤상규는 대관령을 넘어 대처로 나갔고 어머니는 영동의 바람을 맞고 눈을 맞으며 영등할머니가 되어 영동을 지킨다. 신작 중 마지막 시는 연애시다.
먼 길을 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젯밤에도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
갈 길은 늘 아득하다
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그게 사랑이다
―「사랑의 길」전문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인에 따르면 먼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은 멀고 아득하고 우주만큼 넓다. 그래서 예측불허다. 그저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미래의 어느 날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될 때까지, 그러니까 죽음이 우리의 영육을 해체하기 전까지는 상대를 갈망해야 한다. 하지만 사랑의 일대기는 우리의 뜻대로 펼쳐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시간보다 그리워하는 시간이 더 길다. 오래 그리워하다가 잠시 만나거나, 그리워만 하다가 대개 죽고 만다. 시인의 사랑의 행로는 “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하는” 것이다. 즉, 캄캄한 밤을 꼬박 새우면서 광막한 길을 걷는 것이 사랑이다.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그래서 사랑의 길은 순탄할 수 없다. ‘그들은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살았다’라는 말은 완결된 사랑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위 시에서 시인은 완결된 사랑이든 미완의 사랑이든 막막한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수많은 시와 소설이, 음악과 미술이, 오페라와 뮤지컬이, 연극과 영화가 왜 만들어지는가. 사랑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의 책임감으로,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연인이 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사랑을 지켜내려면 아픔과도 동행해야 한다. 이 시의 화자처럼 밤에 은하수를 건너가야 한다.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에는 이런 절창이 실려 있다.
어둠이 더 짙어지기 전에
너를 잊어버려야 하리 오늘도
칠흑 같은 밤이 되면
사라진 길을 길삼아
너 돌아오는 발자욱 소리의
모습 한결 낭랑하고
숨막혀, 숨막혀, 숨막혀, 숨막
혀를 깨물며 나는 자지러지지
산 자 필必히 죽고
만난 자 정定히 헤어지는데
어쩌자고 어쩌자고 너는
어쩌자고 어쩌짜고
온몸에 그리운 뱀비늘로 돋아
발자욱 소리의 모습
내 목을 죄느냐
소리죽여 와서 내 목을 꽈악
죄느냐, 이 몹쓸 그립은 것아,
―「어쩌자고, 어쩌자고」전문
유사 이래 제일 많이 창작된 것이 연애시일 것이다. 동양에서 제일 오래된 시가집인 「시경詩經」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시가 연애시다. 「시경」은 풍風, 아雅, 송頌으로 분류되는데, ‘풍’ 160편은 각 지방의 민요로 거의 다 남녀의 연애감정과 이별의 아픔을 다뤘다. ‘아’는 공식 연회에서 쓰는 의식가이며, 송은 종묘의 제사에서 쓰는 악시樂詩다. 서양에도 서정시가 많은데, 원류는 연애시만을 줄기차게 쓴 여성시인 사포(Sappho)라고 할 수 있다. 사포는 기원전 6세기 때 사람으로 시와 음악과 무용을 학동들에게 가르치면서 수강료로 살아갔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최초의 예능교사라고 할까.
이 땅의 고대가요 중 제일 먼저 창작된 것이 유리왕의 「황조가」이니, 연애감정이 있었기에 유리왕은 일국의 왕이면서 또한 시인이었다. 「공무도하가」와 「구지가」보다 앞서 기원전 17년에 창작된 이 작품은, 당나라에서 시집온 치희雉姬가 본국 출신 왕비 화희禾姬의 질투를 견디다 못해 자기 나라로 가버리자 유리왕이 시름에 겨워 쓴 것이다. “꾀꼬리들아 너희들은 어쩜 그리 의좋게 지내고 있느냐. 나는 아내를 잃고 이렇게 슬픔에 잠겨 있는데.”
윤후명은 역시, 뛰어난 시인이었다. 나는 세상의 무수히 많은 연애시 중에서 이 시를 제일 좋아한다. 발자욱 소리만 들어도 그 소리가 어찌나 낭랑한지 숨이 막히는 것이 사랑이란다. 숨이 막혀 혀를 깨물며 자지러지는 것이 또한 사랑이란다. “발자욱 소리의 모습”이니 상상인가 환상인가. 그 발자욱 소리만 들어도, 그 모습만 떠올라도, 목이 꽈악 죄는 기분을 당신은 느껴보았는가. 사랑의 감정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귀가 먹게 하고 숨이 꽈악 막히게 한다. “숨막혀, 숨막혀, 숨막혀, 숨막/혀를 깨물며 나는 자지러지지”가 이 시의 백미가 아니랴. 끝내는 “소리죽여 와서 내 목을 꽈악” 죄는 “이 몹쓸 그립은 것”을 시인은 사랑한다고 한다. 미치도록. 아아, 어쩌자고.
윤후명 소설의 대표작으로 나는 「둔황의 사랑」과 「누란의 사랑」을 꼽고 싶다. 그 외의 단편소설들에서도 장편이 성취하지 못한 문예미학이 구현된다. 그는 누가 뭐래도 사랑의 시인이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 이제는 고향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그의 사랑의 길은 대관령고개를 넘어 강릉으로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그리움으로 가슴 졸이던 청년이 이제는 고향 가는 길로 나서서 그곳을 그립다고 말한다. 그러한 그리움을 마음껏 풀어내는 시들을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한다. 예전에 시인이었고 지금도 시인인 윤후명, 그의 문학적 행보를 지켜보는 마음이 즐겁기만 하다. (2017년 12월 26일에 쓴 글)
윤후명
이 글이 발표되자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신작시에 대한 평을 잘 써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훗날 당신의 시집 『강릉길, 어디인가』의 서평 부탁을 내게 직접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