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7/190912]어느 집 농(籠)의 내력
시골집을 리모델링하고자 가구들을 정리하면서 쉽게 ‘처치’하기가 거시기한 가구가 있었다. 오래된 2층장롱, 그동안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가져온 혼수로만 알고 있었다. 받침대도 없고 여닫는 시건장치도 고장났으나, 어쩐지 버리기는 너무 아까웠다. 왜 어느 집이나 그런 가구 한둘쯤 있지 않던가. 아내가 어찌어찌하여 전주의 고가구 복원 전문가를 찾아냈다. 그것말고도 증조부의 손때가 묻었다는 부담(책 등을 담는 종이상자)과 나무궤짝 그리고 어머니가 평생 옷을 짓거나 수선하던 다리 달린 브라더 미싱도 함께 복원을 부탁했다.
두 달여만에 가져온 고가구 농<사진>과 어머니의 유품이 한마디로 비까번쩍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복원한 분의 설명이 기가 막혔다. 농이 아주 오래되었고 가치가 있는 것같다는 것이다. 아버지께 여쭸다. 그때에서야 전혀 모르고 있던 우리집 농의 내력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나는 두 분의 얘기를 듣고 ‘우리집 농의 내력’이라는 글을 써, 복원된 농의 깊숙한 부분에 넣어두었다. 우리 형제들과 우리 아이들이 조상(祖上)들이 사용하던 농의 내력을 앎으로써 ‘옛것의 소중함’을 알 수 있게 하자는 뜻으로. 다음은 그 전문(全文)이다.
우리집 ‘가보(家寶) 1호’ 농(籠)의 내력
이 농은 증조부 최정선(1874-1935)이 1923년 5월 전남 구례(求禮)장에서 구입하여 정착지인 전북 임실군 둔남면(현 오수면) 봉천리 냉천마을로 지게를 이용해 가져온 것이다. 5대 독자인 아들 형우(1904-1934)의 결혼을 앞두고, 시아버지가 며느리 하채녀(1908-1986)를 맞으려 마련한 혼수품(婚需品)이다. 구례군 토지면 간전리가 원적(原籍)인 증조부는 증조모 신효임(1880-1907)이 젊어 타계함을 비관, 아들을 업고 섬진강에 뛰어들었다 요행으로 살아났으나 백내장으로 시력을 상실했다. 이후 고향을 떠나 전북 임실군 등의 동네서당을 전전하며 한문교재와 문방사우(文房四友) 등을 파는 이동서적상을 하시다, 현재의 곳에 정착하였다. 그 기구한 행적이 ‘호남지(湖南誌)’에 전하고 있다. 1934년 12월 참척을 당하여 식음을 전폐한 지 5개월만에 외아들의 뒤를 이었다. 당시 27세 할머니 슬하엔 8세, 2세 아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효자인 아버지 세태(1927-)는 어머니 강기순(1930-2019)과 1946년 결혼, 4남3녀를 낳아 기르고 가르치며 한미한 집안을 일으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층으로 된 이 농은 전면 농짝문이 느티나무이고 나머지부분은 꾸지뽕나무이며, 뒷면은 소나무이다. 앞면의 경첩은 모두 백동이며 옆면의 신주(손잡이)는 황동인데,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현재 경첩만 판다해도 기백만원은 된다고 한다. 당시 상당히 고가(高價)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100년 이상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최근 고향집을 수리하면서 고가구 복원 연구가를 만나 옛멋을 한껏 살린 가구로 재탄생되었다. 이에 우리집 가보 1호로 삼아 소중하게 보존하라는 뜻으로 그 내력을 적어 후손들에게 알린다.
노출 써가래로 환골탈태한 거실에 떠억 허니 자리를 잡자 주변까지 빛나는 장식품이 된 것은 ‘참말로’ 좋은 일이었으나, 한 가지 흠은 복원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록 비싼 것이었다. 어쩌면 앤틱가구를 새로 사는 게 쌀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가 마치 할머니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신 것처럼 좋아하고 흡족해 하셔 그것으로 충분히 보상(報償)이 되었다. 또한 썩음털털한 나무궤짝과 부담, 어머니의 재봉틀도 새 것처럼 복원되어 빛을 발했다. 궤짝에는 어머니가 짜신 아버지 삼베 수의(壽衣)를 소중히 넣어두었다. 고가구의 가치를 아는 ‘임자’를 만나 불쏘시개로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 ‘가보 1호’로 변신하게 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전남 장성에 사는 한 방외지사는 100년 전 할머니가 쓰던 농을 복원했다고 하니 자기일처럼 기뻐하며 잘했다면서 직접 보려고 달려오기도 했다. 그 덕분에 말리고 있던 민물새우를 몽땅 싹쓸이해가기도 했지만, 이것도 좋은 일이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를 부기(付記)한다. 우리 선조들은 원래 ‘장롱(欌籠)’을 알지 못하고, 이런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옷을 넣어 보관하는 가구는 ‘장’과 ‘농’으로 구별되는데, 장은 옷 등을 세로로 걸어 보관하는 가구이고, 농은 옷 등을 가로로 넣어 보관하는 가구라고 한다. 요즘에는 한 가구가 두 가지 기능을 하므로 ‘장롱’이라 부른다. 또한 ‘반닫이(반다지는 틀린 말)’는 두껍고 궤 모양의 가구로, 앞의 위쪽 절반이 문짝으로 되어 아래로 잦혀 여닫게 되어 있고, 가장 오래 전부터 사용된 가구라고 한다. 머리맡에 놓고 옷이나 물건 등을 넣거나 그 위에 쌓아놓는다고 하여 ‘머릿장’이라도 부른다. 전문가로부터 들은 장과 농 그리고 반닫이(머릿장)의 구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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