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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래희망파랑새 원문보기 글쓴이: 김강철수
② 토말(땅끝)에서 보길도로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해남하면 남도여행, 남도여행하면 해남이 일번지가 아닌가 싶다. 그런 해남을 한가한 여행이 아닌 업무차 볼일로 와서는 실로 바쁘게 기둥에 손만 짚어보고 떠나온 형국이라 내심 안타깝고, 글을 쓰는 내내 미진한 마음 끊이질 않아 시간이 나면 꼭 다시 여행을 해 볼 요량으로 가는 방법, 그리고 자료들을 검색하다 보니 어떻게 여행글이 엉성하게 만들어 지고... 해남의 녹우당,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보는 여행에 앞서 다분히 역사적 인물이야기라.... 보길도에 직접 와서보니 그 느낌이 조금 다르고 다시 짚어보니 그에 대한 견해도 달라졌지만 어디까지나 그 건 개인 생각일 뿐, 나는 그저 쉬운대로 여행이야기나 쓰련다. 글을 쓰는 사람의 실력이 있어야겠지만, 특별한 전문가가 아니니 어림잡아 사려깊은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라면서.... 해남-갈두리 토말(땅끝)은 1시간걸리며 요금은 3,700원이며 30분간격으로 운행하며, 땅끝(갈두리)에서 땅끝전망대-땅끝탑을 돌아 보려면 원점회귀로 한시간정도 소요. 서울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광주도착 ▶ 광주에서 해남(녹우당을 거쳐) ▶ 땅끝, 토말(갈두리)까지 버스 ▶ 갈두리에서 ▶ 보길도(1박) ▶ 완도(서울행타면 여행종료이지만)▶ 청산도를 거쳐 ▶ 완도 ▶동서울터미널(버스로 돌아왔다.) tip 섬으로 연계해서 여행을 다닐 경우에는 차를 두고 현지 택시를 이용하면 싸다. 여행자들과 함께 어울려 택시를 이용하면 싸게된다. (대략 시간당 만원꼴) 해남버스터미널에서 땅끝(토말)까지 승차권! 회수한다기에 아쉬움에 찰칵! 남녘의 봄은 동백으로 피어나고,
방풍림 동백이 흐드러져 지천이다. 봄이 먼저 오는 곳, 보길도는 봄이 먼저 온다. 늦은 4월 무르익은 봄에도 늦게까지 피고지는 동백꽃은 윤선도의 세연지를 붉게 물들이며 감돌아 흐른다. 청보리가 푸르고 마늘이 푸르다. 붉은 동백은 어느 시인의 눈물처럼 떨어져 누웠고.... 어느 뉘라서 노래가..시가 나오지 않으랴~~ 푸른 물 위로 떨어진 붉은 동백꽃은 바람이 불면 작은 배처럼 한가롭게 연못을 떠다닌다. 여름 보길도는 너무 유명하여서 차를 가지고 들어가기에 힘든단다. 줄이 어디까지 이어졌고....힘들여서 섬에 들어가면 성수기 민박은 예약이 아니라...아예 현금예약을 해야하고, 들어갈 때 고생한 만큼 나올 때 또 줄을 서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단다. 그냥 차를 두고 떠나 택시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버스도 있고, 걷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길, 길들~~트래킹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화창한 봄이었다)
해남 버스터미널 화단에 핀 겹동백(한 나무 한 몸에 이렇듯, 알록달록이가 함께 핀다. 신기하고 예쁘다) 서울(용산역)에서 KTX로 광주로 와서 해남행 버스를 탔고 해남에서 토말(땅끝) 갈두리까지 왔다. 갈두리에서 보길도 가는 배를 기다린다. 배는 작아서 차가 몇 대 못 싣게 되어있다. 여름 휴가철에 보길도에 차를 가지고 들어 간다는 것은 족쇄를 차고 들어 가는 꼴이다. 들어가고 나갈 때....몇 시간을 줄을 설 각오가 돼있다면 모를까~~ ▲보길도 승선티켓 ▼ 갈두도에 도착, 배를 기다리며, 전망대가 있었다, 다녀오는데만 딱 30분 빨라도 40여분이 경과하고 배는 40분 뒤에 출발하고 선선히 전망대를 포기했다. 모노레일도 유혹하고 전망대에 올라가면 토말, 갈두리항의 전경을 한 눈에 다 바라볼 수가 있을 터인데.... ▼ 바위 이름이 '맴암'? 이었지 싶다. 카렌더에도 많이 나오는 일출사진 지금은 밀물때라 밉지만 썰물에 이 바위의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많다. 포토포인트라고 안내팻말이 씌어져 있다. 바위 사이로 해가 뜨는 모습!! 많이들 보셨을 이미지....상상만으로도 ...멋지던, 좀은 엉뚱한 장소에 생뚱스런 자태여서....그 얄망궂은 모습에....은근한 친근감이 더하던...ㅎㅎㅎ 드디어 보길도를 들어 갈 배가 들어 오고 보길도에도 두 군데로 나뉘어 출항했다. (둘러가는 배, 직항하는 배) 아마 이 배가 아니고 저 뒤에 들어오고 있는 배를 탔을 성싶다. 먼저 여기 보이는 이 택시를 흥정(도서지방은 택시가 모두 4륜구동)4시간 선회에 4만원으로~~ 여행자 tip 택시를 이용하면 득이 되는 이유는 기사분이 아주 좋은 가이드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역주민으로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가이드를 대동하는 셈이라 아주 좋습니다. 그냥 바다가 아니라....완전 양식밭이예요! 보길도 들어가는 배를 타고 깜짝 놀랐지요, 겨우 뱃길만 도로처럼 조금 열어놓고는... 양식밭에 뜬 부표들이 마치 사월초파일 연등처럼 울긋불긋 바다를 수놓고 있었습니다.~ 보길도 섬 전체를 선회하는 관광이다. 사진에는 잘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바다가 양식밭이었다. 전복, 미역, 다시마, 등 양식과 관광객의 수입으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부자들이란다. 택시아자씨의 말을 빌자면....보길도 주민 전체가 알부자라는데...ㅎㅎ ▼산위에서 바라보니 영락없는 새카만 자갈밭, 해변이었다. 예송리해수욕장 내려와 보니 위에서 보이던 시커먼 색은 아니었다. 그냥 그런 차돌멩이 빛깔이다. 예송리해수욕장의 까망 차돌
춘백은 떨어져 붉게 물들고..... 미역을 말리고 있는 아저씨를 찍자 바쁘던 일손을 잠시 멈추고 짐짓 포즈까지 취해 주신다. 역시 보길도는 주민들 모두가 관광객을 위하나 보다 했더니, 기사 아저씨왈 "제 친한 친구넘이예요. ㅎㅎㅎ " 그럼? 친구의 손님을 위해서 .....부지런한 손길을 잠시 멈추고 이런 모델포즈를 ? ㅎㅎㅎㅎ~~ (우리가 셋이었으니~~카메라도 셋? ) "감사합니다아~" 그 시커먼 자갈마당에 또 이런 시커먼 미역을 널어 말렸으니....당연 시커멓게 보일 밖에~~ 미역이나 다시마를 사가라고 동네 할머님이 말씀하셨지만...이제 막 보길도 관광 시작인데 ~~ 죄송!! 내 카메라만 그저 휴대용 디카 익서스.... 에혀, 경관은 좋더러먼...거의 입체감 하나 없는 평사진들로만.....
흐린 날 오후, 하염없이 혹시나 구름속에서 나타날지도 모를 일몰을 기다리느라.... 기다리던 일몰은 구름에 가려 열릴 듯 열릴 듯...감질나게만 하고 영영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바위 절벽을 잘도 오르내리는 염소 가족들 포카스가 동백에 꽂히지 않았군요. 이런 일이....우째? ▼ 멀리 보이는 뾰죽산 그 앞에 가면...지금 한창 공사중이네요.
뾰죽산 부근에는 지금 제주도를 오고갈 선착장을 만드는 중이랍니다. 제주도와 아주 가깝다네요. ▲ 보이는 뾰죽산 바로 뒤를 돌아가면 짜잔~~!!! 이런 돌이 지천인 해변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공룡알 해변 공룡알 같이 보이지요? 큰돌이든 작은 돌이든 죄다 공룡일처럼 아주 크고 동글동글한게 인물이 훤합니다. 밀물이 되면 공룡알 해변은 더 커지며 계단식으로 되어있다네요. 저 섬까지 바닷속 전체가 다 이보다 더 둥근 돌로 층층이 덮혔다는데 물이 많이 빠지는 날, 보게되면 장관이라네요...거 참!! 섬만 아니라면 슬쩍 안아오고 싶도록 동글동글해서 예쁜 돌!!
송시열이 제주로 귀양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이때 섬 동쪽 끝 백도리 해변석벽에 자신의 심경을 한시로 새겼으며 택시에 내려서도 동백나무 울창한 숲을 10여분쯤 걸어가면 푸르른 남해와 기암절벽이 만나는 곳에 글씐바위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우암, 송시열의 글씐 바위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런 절벽을 지나야 해요. 아찔하지요? 송시열의 안각시문을 찾아 나 선 길은 절경이었지요. 귀양조중에 배가 풍랑을 만나 잠시 머물었던 곳 이라는군요. 우직한 충정을 바위에다 새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지요? 우암과 고산...그 두사람의 느낌이 확연히 다른......여러 각도에서 마음이 착찹했지만 역사가도 또는 그 무엇도 아니기에 그저 눈으로 풍취나 즐기다 떠나는 한 낱 민초일 뿐.... 흔적이 애매해서 지나쳤다가 막다른 길에서 다시 되돌아 나오며 발견했지요. 얼핏보면 모르고 지나치기 딱 좋습니다. 송시열상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반신좌상(半身坐像) 초상화이다. 송시열은 평생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등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한 후 이조판서·좌의정 등을 역임한 인물로, 힘있고 논리적인 문장과 서체에 뛰어났으며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였다. 충정을 바위에 새긴 게 아니라....하늘에다가 새기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과격한 성격의 그는 고산을 공격하고 둘 사이는 좋지않게 됩니다. 고산이 물론 20년 연배인 셈입니다. 고산은 낙향하여.... 세상을 외면했고 송시열은 강직한 성격에 부러짐을 당한 거라는 개론을 펼쳐봅니다. 고산의 유토피아, 보길도에까지 우연찮게 흘러와서 이렇게 암각화를 만든 그 아이러니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보길도 하면 떠오르는 윤선도,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본관 해남(海南).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 ·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8년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보길도의 관광 백미인 고산 윤선도의 부용정 모습 남녁의 봄은 동백으로 피어나고 윤선도의 보길도
봄이 가장 먼저 온다는 땅끝....해남하고도 보길도 망끝~~ 동백이 피고지고 늦봄까지도 지천으로 떨어져 누운 붉은 동백꽃을 만나 보게된다. 그 당시에도 단청을 입히지 않았을까? 고산 윤선도의 흔적은 부리던 노비들의 난동에 의해서 모조리 전소되고...그나마 옛사람들의 전언에 의해서 다시 복원되었다지만, 외로운 섬, 그 한가운데 350여년이 지난 작금의 시선으로 보아도 은폐된 아방궁같았음을 뉘라서 모르랴~~
노비들의 방화로 소실되어 고증에 의해 다시 설립한 것이라 한다. 문들이 올려져 있지만...겨울난방을 위한 아궁이도 비치되어있었다 한다. 고산 윤선도는 개인적으로 굳이 짧은 지식의 느낌으로 부언하라치면 그냥 '예술가'라 칭하고 싶다. 청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부잣집의 아들, 예술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시문이 특출한 인평대군의 사부였었고 정치적 시련을 몇 번 겪고는 낙향하여 섬을 낙원으로 꾸미고... 세연지를 바라보며 詩나 읊었던 선비이며 세상의 시시비비가 싫었던 자유주의자! 로맨티스트였던 것 같다. 세연지의 돌 모양도 예전과는 많이 틀리다 한다. 보길도를 한바퀴 돌아 보면서 부용정의 앉은 곳은 연꽃의 화심인 형태였다. 보길도의 산들은 부용정을 중심으로 연잎처럼 둥그런 곡선으로 감싸안고 있었다. 택시 기사분의 설명을 듣고보니...과연 그랬다. 풍수지리상으로도 아마 명당자리였던게지~ ▲판석보/판석보를 넘쳐 흐르는 물 보길도의 물은 거의 부용정 으로 모이게끔 되어있단다. 늘 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고....판석보는 돌과 흙으로 막아져서 물이 가물때는 농삿물로 유용했다한다. ▼ 흑약암/세연지와 칠암은 제각각 이름을 다 갖고 있다. 동쪽 산등 너럭바위 옥소대에서 관현악을 연주하면 반원형으로 생긴 서쪽 토성벽에 부딪쳐 소리가 세연정쪽으로 몰아준다. 북쪽에 마련된 동대와 서대에서는 기생들이 춤을 추고 못에서는 동자가 연심을 따고 있으며 세연정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밖을 내다보면 선경이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이곳이다.
보길도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새벽 완도행 첫 배에 오르기 전, 흐린 날씨에 잠깐 나온 일출을 만나다.
땅끝~보길도 (해광운수) 해광훼리5호/장보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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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두리(땅끝)에서 보길도는 선박이 08:20-17:30까지 1일 2시간간격으로 7회운항하며 요금은 편도 7,300원.
유배가던 송시열이 쓴 글씐바위
주소 : 보길면 부황리202외
규모 : 25,268평(83,532㎡)
시대 : 조선시대(17세기말)
내용 : 병자호란으로 제주로 향하던 중 보길도 절경에 취하여 머물렀으며 어부사시사등 주옥 같은 한시가 창작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 양식을 취하고 있는 곳으로 고산 윤선도 선생이 조그마한 세 채의 기와집을 동쪽과 서쪽, 그리고 중앙에 각각 짓고 주자학을 연구하는 등 주로 기거하던 낙서재, 낙서재 바로 건너 산 중턱 절벽 바위 위에는 한칸집의 조그마한 정자인 동천석재,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있는 세연정, 반반한 자연석으로 내부가 비도록 세워 만든 것으로 일명 굴뚝다리라고도 하며 세연지에 물을 저장하였다가 회수담으로 흘려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는 판석포 등이 옛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땅끝출발
보길도 출발
선박명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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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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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호/해광훼리5호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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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광훼리5호/장보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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