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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27. [역경의 열매] 김종생 (1-15) 어린 시절 가난은 큰 아픔… 친구·선생님 방문 소식에 기겁
어머니 혼자 생계 책임, 수업료 제때 못내
중학교 입학 후 집안일 돕느라 공부 뒷전
가난 통해 주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배워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에서 만난 김종생 한교봉 상임이사. 그는 “만약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가난을 원망하며 잘못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석현 인턴기자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가장 많이 되새긴 단어는 ‘가난’이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는 가난 덕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 곁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내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가난을 통해 나는 주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배웠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간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어 행복한 삶이었다.
내 부모님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아버지는 자상하고 자식 사랑이 극진한 분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는 늘 뒷전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얼마 안 되는 종중(宗中) 땅에 콩 고구마 열무를 심었다. 장에 내다 파는 일까지 당신께서 직접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 혼자 힘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수업료를 제때 못내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다. 참깨 농사를 지어도 참기름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고추 농사를 지었지만 우리집 김치는 항상 하얀색이었다. 닭을 키웠지만 계란은 항상 내다 팔았기에 그 흔한 달걀부침 한번 먹지 못했다.
나는 대전의 변두리였던 대덕군 회덕면 중리에서 7남매(2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전체 순번을 따지자면 다섯 번째였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학교를 파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야 했다. 땔감과 소꼴을 준비하느라 놀 겨를이 없었다. 바쁜 집안일 탓에 공부에 재미를 못 느꼈다. 버스비 5원이 없어 매일 걸어 다닌 것은 견딜 만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놀러 온다거나 선생님의 가정방문 소식을 접하면 경기를 할 정도로 싫었다. 그 시절 가난은 큰 아픔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한 커피 회사에서 나온 커피 병을 갖고 온 뒤부터는 이게 내 도시락 반찬통이 됐다. 그러나 김치와 장아찌의 염분으로 병뚜껑은 금방 녹이 슬었다. 김칫국물이 새어 나왔다. 국물은 가방 속 책과 노트를 붉게 물들였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붉게 물든 내 교과서와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성경책 옆면이 같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 집안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중고 가방의 가죽을 이리저리 박음질하고 붉은 구두약으로 광을 낸 가죽 가방을 선물해 주셨다. 비닐 가방 하나 사주기도 부담스러운 아버지의 묘안이었으리라. 당시 가난하지 않은 집이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아버지는 두 아들은 물론 다섯 딸을 전부 대학 공부까지 시키겠다는 신념이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별도의 수입을 얻기 위해 종친회 일을 시작했다.
가난은 돈하고만 연관된 게 아니었다. 사회성을 익히는 데에도 장애가 됐다. 내가 내향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데에 가난이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성경에는 가난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가난한 이들과 고아와 과부는 한 세트처럼 등장하곤 한다. 주님은 ‘그들의 주님’이 되신 분이다. 나의 가난이 부끄러움만이 아니었던 건 바로 그런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약력=대전신학대 신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목회연구과정 수료, 평택대 사회복지학 박사, 대전지역사회선교협의회 간사 및 총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이사, 명성복지재단 이사, 한국교회봉사단 상임이사.
* [역경의 열매] 김종생 (1) 어린 시절 가난은 큰 아픔… 친구·선생님 방문 소식에 기겁
* [역경의 열매] 김종생 (2) 어머니와 다섯 누이만 남게 된 집… 집안일 도맡아
* [역경의 열매] 김종생 (3) 3박 4일 부흥회 참석 후 등교… '김 목사'라 비아냥거려
* [역경의 열매] 김종생 (4) '기독교로 위장한 국가전복단체' 누명에 30개월 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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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종생 (15·끝)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작은 위로자' 됐으면…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종생 (2) 어머니와 다섯 누이만 남게 된 집… 집안일 도맡아
어렵고 거친 일들은 모두 나의 몫
다양한 일들 해내며 ‘일머리’ 생겨
일 처리 인정받자 더욱 일에 매진
어린시절 살던 집에서 찍은 부모님 사진. 우리 가족은 당시 대전 변두리에 있는 대덕군 회덕면에 살았고 부모님은 모두 농부였다.
우리가 가진 땅은 종중 땅 산비탈의 밭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는 고욤나무에 감나무 접을 붙여 감나무 100여 그루를 심어 돈을 벌었다. 그 까닭에 우리 집은 ‘감나무집’으로 불리곤 했다. 감나무를 지키기 위해 과수원에 집을 지었고, 이곳은 처음엔 원두막처럼 사용하다가 결국엔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가 됐다.
아버지는 고욤나무를 심어 키운 뒤 여기에 감나무 접을 붙이곤 했다. 고욤나무를 대목(代木)으로 삼아 접을 붙여야 감이 맛있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랐는데, 언젠가 교회에서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접을 붙인 이야기(롬 11:17)를 듣게 됐다. 나는 이때부터 생뚱맞게도 감나무집 아들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아버지는 부족한 수입을 채우기 위해 서울로 떠나셨다. 형도 일찍 서울로 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결국 집안에는 어머니와 나, 다섯 명의 누이만 남게 됐다.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감성적인 성향이 나에게 깃든 것은 이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일 듯하다.
어쨌든 집안에 남자가 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 거친 일들은 모두 나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무를 하는 일, 소꼴을 베는 일, 감을 따는 일, 감을 시장까지 옮기는 일….
이런 일들을 모두 내가 감당해야 했다. 물을 길어오는 일과 변소의 거름을 퍼내는 일 역시 나의 과제였다. 밭에 고랑을 내고 콩을 심고 고추와 들깨와 고구마를 심는 일도 도맡아 했다. 장마가 끝나면 빗물 때문에 움푹 팬 길을 다시 고르고 한겨울엔 소복하게 길에 내린 눈을 싸리비로 치워야 했다. 이렇듯 다양한 일들을 담당하면서 일에는 요령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을 시작할 때 대략적으로 전체 그림을 구상한 뒤 세부적인 ‘부분’을 더해 ‘설계’를 마무리하는, 이른바 ‘일머리’가 생긴 셈이다.
이런 시절을 거치면서 집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졌다. 나는 많은 일을 처리하면서 집안에서 인정과 지지를 받는 존재가 됐다. 일에 대한 칭찬과 지지는 나를 집안일에 매진하게 하는 동기가 돼주었다.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교우 관계도 집안일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가난도 학교와 공부를 등한시하게 만든 이유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돼서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고에 입학했다. 누이들도 소위 지방의 일류학교를 진학했는데, 나는 삼류학교라 할 수 있는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자괴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집안일로 인한 희생자’라는 지위를 나 자신에게 부여하며 자위하기도 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받았던 것은 이후 내 인생의 큰 자산이 됐다. 아마도 아버지는 당신의 역할을 버겁게 감당하는 어린 아들이 대견스러워 부채감 때문에 인정을 해주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몸 아끼지 않고 애쓰는 것이 가상해 자주 칭찬을 해주시곤 했다. 비록 가난한 집에서 내가 짊어져야 했던 짐은 무거웠지만, 집안에서 나의 역할은 필요했고, 역할 이상으로 인정과 지지를 받았던 것은 책임감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3) 3박 4일 부흥회 참석 후 등교… ‘김 목사’라 비아냥거려
교회 일 도우며 자연스레 신학교 진학 꿈
부흥사경회가 공부보다 중요하다 생각
담임·친구들 만류에도 집회 끝까지 마쳐
김종생 목사가 20대 초반, 집 앞 감나무 옆에서 찍은 사진. 김 목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10대 시절 하나님을 만나 신학교 진학을 결정했다.
중학교 2학년 성탄절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선배로부터 성탄절 행사에 오라는 말을 듣게 됐다. 이웃 동네인 송촌리에 있던 금암교회(현 동부제일교회)였는데, 처음 간 자그마한 교회에선 까까머리 학생들이 학생회라는 이름으로 자치회 모임을 하고 있었다. 여학생부터 남학생까지 나이도, 성별도 다양했다. 이들은 스스럼없이 새벽송을 같이 돌았다. 나는 이들과 섞여 교회 속 일원이 됐고 신앙심도 갖게 됐다. 시골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일은 내가 집에서 하던 일과 비슷해 낯설지 않게 교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무 난로를 사용하는 교회에서는 늘 나무가 부족했다. ‘나무 조달’은 나의 책무가 됐다. 교회에는 남자들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나는 교회에서 일손이 필요할 땐 자주 불려 다니곤 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는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면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당시 매일 새벽예배를 앞두고 교회에서는 누군가 새벽종을 쳐야 하는데, 전도사님이 사시는 사택과 교회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종 치는 것이 보통 부담이 아니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초종과 재종을 치는 일을 담당하게 됐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전도사님은 “김 선생은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틈나는 대로 말씀하셨다.
이러한 일들이 하나둘씩 쌓이고 반복되면서 언젠가부터 나는 신학교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고, 그러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다니는 공고는 일반고가 아니어서 학교에서는 진학을 위해 별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태였다. 학원 공부로 대학 진학을 준비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학원에 가야 했다.
교회 일을 도맡아온 내가 교회를 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일뿐더러, 교회로써도 나라는 ‘인적 자원’의 상실은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진학을 위해 대전 선화동에 있는 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학원 가까운 침례교회를 다니게 됐다. 손위 누나와 친구가 다니고 있는 교회여서 나 역시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얼마 뒤 이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열었는데, 향후 신학교에 갈 사람으로서 공부보다는 부흥사경회가 더 소중하다고 여겨 3박 4일간의 집회 참석을 결행했다. 둘째 날 저녁에 담임 선생님이 학교 친구들과 같이 교회에 찾아오셨다. 선생님은 “시험이 코앞인데 고3 학생이 할 짓이냐”며 혀를 차고 돌아가셨다. 하지만 나는 집회를 마치고 나서야 학교에 돌아갔다. 학교에 가니 나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이때 내게 붙은 별명이 ‘김 목사’였다.
침례교회에 잠시 출석한 것이 계기가 돼 별생각 없이 침례신학대에 진학했다. 그토록 꿈꾸었던 학교였건만, 신학교에서 배우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라 목회 기술자를 양산하는 ‘인학’(人學)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즈음 선배의 소개로 대전의 네비게이토선교회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경험한 로마서 강해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려볼 수 있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책 읽기는 나의 습관이 됐고, 당시 경험으로 내 인생 행로는 크게 달라졌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4) ‘기독교로 위장한 국가전복단체’ 누명에 30개월 옥고
대안 교육 현장과 여러 공동체 체험 후
‘한울회’란 이름으로 직접 공동생활 시작
군부정권 바뀌며 ‘의식화 모임’ 타깃 돼
김종생(맨 뒷줄 왼쪽) 목사가 네비게이토선교회에서 활동하던 당시 동료들과 찍은 단체 사진.
대학생을 상대로 한 네비게이토선교회에서는 세 가지에 관심을 두었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이었다. 둘째는 사람의 변화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었다. 셋째는 생활을 같이하는 공동체를 통해 기독교 신앙과 가치를 구현하자는 거였다.
그래서 대안 교육을 하는 거창고와 풀무고, 오산학교 등의 사례를 통해 신앙과 철학을 배웠다. 가족 단위로 공동체를 이룬 원경선 선생 중심의 풀무원, 문동환 목사 중심의 도시 공동체인 새벽의 집, 한국 떼제 공동체, 이현필 선생의 삶이 스며있는 남원의 농촌 공동체 동광 등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삶과 철학을 배우기도 했다.
대안 교육의 현장을 둘러보고 여러 공동체와 교류한 경험은 유익했다. 이 도전을 구체화하자는 취지에서 우리는 실험 차원에서 공동체를 꾸려보기로 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생이란 하나의 실험 과정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 역시 진지하게 공동생활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의 울타리라는 의미를 담아 ‘한울회’라는 이름으로, 대덕군 회덕면 중리에 있는 초기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집을 얻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방 두 칸이 전부인 공간에서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이 함께 살았다. 각자 자신만의 일정을 가지되, 방문객은 순번제로 오게 하고, 전체가 함께하는 ‘공동의 시간’과 ‘공동의 자리’를 구분했다.
진지한 실험이 한창이던 1980년 2월, 아직은 쌀쌀한 어느 날이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 형사 여러 명이 들이닥쳤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위 ‘의식화 모임’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대상자를 물색하던 중, 젊은이들이 같이 살면서 많은 젊은이가 드나든 우리의 보금자리가 타깃이 됐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형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연행됐다.
당시 나는 방위병 신분으로 동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군인 신분인 나는 보안부대로 연행됐다. 오랜 취조, 그리고 고문의 우여곡절을 지나 우리가 만든 한울회는 ‘기독교로 위장한 자생적인 공산주의자들로 국가를 전복하려는 단체’가 돼 뉴스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우리의 공소장에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초대교회 공동체 내용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동생활을 하던 3명, 성경을 같이 공부하는 젊은이 10여명, 집회 참석 및 관련자 30여명이 반란의 계획을 꾸몄다는 거였다. 이 사건을 다룬 재판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짜 맞춘 흔적이 많고, 많은 부분이 확대 해석된 부분이 수두룩해서 대법원에서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되는 핑퐁 재판이 되고 말았다.
길고 지루한 재판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용과 형식’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됐다. 우리 모임이 교회와 교단, 나아가 학교 등의 조직에 소속돼 있었다면 이런 피해는 없었을 거였다. 이전까지 나는 ‘내용’만 좋으면 된다고 믿었다. ‘형식’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옥고를 치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내용이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형식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과자의 낙인과 30개월이라는 많은 수업료를 내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5) 며칠째 ‘쉰밥’ 나오자 집단 단식… 주동자로 찍혀 ‘독방’
의미있는 수형 생활 보낼 방법 고민 중
‘옥중전도사’로 주중 예배 인도 맡게 돼
수형자들 고충·교정 선교 필요성 느껴
김종생(왼쪽) 목사가 육군교도소에서 함께 생활한 동료들과 훗날 찍은 기념 사진.
한울회 사건으로 나는 헌병대 유치장에 감금됐다. 조사는 보안부대에서 이뤄졌다. 국가보안법을 어겼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나는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육군교도소로 이감됐다.
억울함을 삭히면서 1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매일 고민했다. 그러던 중, 교도소 원목의 위로 방문을 통해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됐다. 내가 있던 특별 사동의 주중 예배를 인도해줬으면 한다는 제안이었다. 나의 죄목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사상적인 언급은 절대 엄금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그 순간 사도행전의 바울이 떠올랐다. ‘옥중 전도사’라는 직무에 조금은 의미를 부여하는 수형 생활이 시작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목회자로서의 내 경력이 미미했기에 재소자들을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옥중 기간을 발전의 기회로 삼기 위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수불석권(手不釋卷)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밤낮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동안 읽지 못했던 성경도 시간을 정해 놓고 읽으며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깊이 되새겼다. 볼펜을 주지 않았기에 성경 속 함축적인 문장이 좋아지면 묵상하고 또 묵상했다. 구약성경의 공동번역 시편은 많은 울림을 주었다. 자작시를 쓴 뒤 컬러 화보의 책에 눌러 보관하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침에 쉰밥이 배식됐다. 재소자들은 의아해 했는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튿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쉰밥이 나왔다. 아무리 재소자 신분이지만 쉰밥을 먹고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쉰밥이 나오면 특별 사동 전체가 단식하는 것으로 정하고 방마다 통보했다. 그리고 다음 날도 역시 쉰밥이 나왔다. 우리가 생활하는 특별 사동은 60여명 전체가 단식에 돌입했다.
교도소라는 특별한 조직, 특히 군인 출신이던 재소자들의 집단 단식은 허용될 수 없었다. 나는 단식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됐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검정 호스로 엄청나게 맞았다. 그리고 가로 30㎝, 세로 60㎝ 네모난 시멘트 공간에서 ‘감옥 속 감옥’ 생활을 일주일간 하게 됐다. 일명 ‘독거 특창’인데 이곳에 들어갈 때는 양손을 가죽으로 고정하기에 여름철 모기는 횡재를 맞은 듯 움직일 수 없는 내 몸에서 피를 빨아 먹곤 했다.
그 후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쉰밥을 먹지 않게 됐고, 그 일로 재소자들은 나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다윗 당시의 아둘람 굴에 있던,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삼상 22:2)가 전부 그곳에 모여 있었다. 수형 생활 중 만나본 재소자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재수가 없어서 감옥 생활을 하게 됐다는 거였다. 그 실체야 다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조와 제도의 희생자라는 사실이었다. 가정과 학교, 나아가 친구 관계가 건강하지 못했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여러 정황이 만든 결과물’이 곧 그들이었다.
내 징역 기간은 상급심에서 줄어 결국엔 2년 6개월간 이뤄졌다. 수형 생활로 갇힌 자의 고충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됐고, 교정 선교가 부족하다는 사실도 체감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6) 출소 후 대전신학대 편입, 신학 공부에 몰두하는데…
학교 행정 형평 문제로 학생들 불만 터져
분규 일어나 성명서 쓰는 일 떠맡으며
편입 도움 주신 교수들과 불편한 사이 돼
김종생(왼쪽 두 번째) 목사가 대전신학대 재학 시절 교수, 동료들과 찍은 사진.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됐고, 그분을 의지하게 됐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
나는 출소하면서 신학 공부를 곧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이전에 다니던 학교는 나의 전과 사실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곳을 찾아야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인 대전신학대에 편입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그곳에 있던 김진영 교수님이 환대해 주셨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데는 김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신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교도소 생활은 나의 관점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틈틈이 책을 읽게 됐고, 교수님들의 강의도 이전보다 성실하게 들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신 이영호 교수님,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를 통해 기독교 사상을 폭넓게 이해하게 해주신 고(故) 송기득 교수님,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사회학적 관점으로 보게 해주신 김조년 교수님의 강의는 정말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대전신학회와 현대목회연구회라는 이름의 독서모임을 만들어 같이 책을 읽고 진지한 토론을 이어가기도 했다. 교수님들을 통해 접하는 새로운 가르침도 좋았지만, 동료 신학생들과 보내는 시간도 각별하게 여겨졌었다.
길지 않은 신학교의 수련 기간은 내게 재미있고 신나는 시간이었다. 특히 가난하고 병들고 귀신들린 이들을 위해 이 땅에 성육신하신 주님의 존재를 되새길 수 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교도소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와 눈먼 자와 눌린 자’(눅 4:18)들이 모였던 아둘람 동굴의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사람들과 더불어 사시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신 분이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지독한 가난과 막막한 수형 생활을 겪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세상의 ‘밥’으로 오시어 밥이 되어주시고, 자신의 살과 피까지 제공해 주신 주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게 나의 사명이 됐다. 하나님은 내게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었고, 공동의 선을 지향할 이유를 가르쳐주셨다. 이런 하나님을 나는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에 좋은 일만 이어질 순 없을 터였다. 학교 행정의 형평성 문제로 학내 분규가 일어났다. 그동안 쌓여 있던 불편한 사안에 대해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어쩌다가 학내 분규의 의견을 결정해 발표하는 성명서 작성이 나의 몫이 됐다. 피해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성명서를 쓰는 일을 맡게 됐다. 이 일로 교수님들과 나는 다소 불편한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신학교 편입을 주선하고 도움까지 줬던 교수님들이 곤란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나는 이때의 경험으로 평생 그분들에게 죄스러움을 느끼게 됐다. 이런 우여곡절 이후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목사 고시와 목사 안수를 거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7) 달동네 공부방 열고 공부는 물론 무료 진료·급식 제공
신학교 재학 중 사회 선교 중요성 알게 돼
달동네 주민 위한 종합 지원프로그램 운영
많은 동참으로 좋은 섬김의 도구로 성장
김종생(왼쪽 네 번째) 목사가 대전에서 공부방 사역을 하던 시절 동료들과 찍은 단체 사진.
신학교 재학 중이던 시절, 나는 대전 낭월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일했다. 이곳에서 나는 사회 선교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에서 총무를 역임하신 고(故) 박창빈 목사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나는 사회 선교에 대한 훈련도 받기 시작했다. ‘도시사회선교권 강화훈련’의 수강생이 됐다.
나는 ‘대전지역사회선교협의회’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협의회는 노회의 전문성이 부족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2~3개 노회가 함께 사회봉사를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단체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는 도시화와 공업화로 인한 그늘이 짙어지던 시기였다. 도시 변두리에는 달동네가 들어섰고, 이 동네 아이들의 학습 결손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학생들의 미진한 학습을 돕기로 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문화 활동을 벌였다. 식사를 제공했고 무료 진료를 통해 달동네 주민의 보건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도 진행했다. 가장 많이 신경을 썼던 프로그램은 ‘공부방 활동’이었다. 공부방은 도시 공장 주변의 야학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단순히 공부를 가르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공부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종합적인 지원 프로그램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대전 지역에도 비슷한 성격의 공부방을 세워 운영하기로 했다. 보문산 자락에 ‘보문 공부방’이, 성남동 지역에는 ‘성남 공부방’이 만들어졌다.
대전의 공부방은 유미란 선생이 시작한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의 ‘산돌 공부방’을 벤치마킹한 형태였다. 이런 곳에 아이들이 올까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매일 어린이들이 몰려들었다. 대학생 자원봉사자의 발길도 이어졌다. 주민들의 반응도 좋았다. 주민들의 호응을 보는 일이 흥미진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공부방의 공간을 임대하는 것, 그 안에 책걸상 등 집기를 마련하는 일, 간식과 음식 제공을 위한 주방 도구를 갖추는 일 등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실무자들의 열정과 인근 교회들의 동참 덕분에 공부방은 아주 좋은 섬김의 도구로 자리매김했다.
1980, 90년대의 건강보험은 전 국민으로 확대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빈민들을 향한 무료 진료와 급식 제공은 가장 일반적인 섬김 사역이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수련회와 캠프를 열었는데, 이들 활동은 공부방 어린이들이 학수고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협의회에서 운영하는 공부방 2곳의 운영위원장이 됐다. 재정과 자원봉사자 확충, 때로는 외부와 연결하는 중재자 역할까지 감당해야 했다.
공부방에서는 교회 청년들도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나눔의 뜻을 실천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들의 열정과 성실함이 고맙게 느껴진다. 자원이 많이 부족하던 시절에 대학생이거나, 혹은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초년생이던 그들이 항상 자신이 가진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던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특히 대학생들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공부방 아이들을 위해 쓰는 일에 인색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당시 함께해 주었던 그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8) 사회 복지 사역 현실은 ‘막노동’… 일 잘하고 욕먹기도
위탁 받은 사회복지관 맨손으로 운영
인사청탁·형평성 문제 등 난감한 일 발생
기도로 지혜 구하며 우수 복지관으로 정착
김종생(가운뎃줄 왼쪽 두 번째) 목사가 월평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할 당시 직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공부방 사역을 하면서 이웃을 돌보는, 좀 더 ‘종합적인’ 일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즈음 접한 소식이 달동네 빈민에게 주택을 제공하는 영구임대주택사업이 대전에서도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장소는 대전의 월평동이었다. 주택 단지에는 빈민들을 돌보는 사회복지관이 2곳 들어서는데, 이곳들을 민간에 위탁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대전노회유지재단’이라는 종교법인이 월평종합사회복지관 운영을 맡았고, 나는 이 일에 뛰어들게 됐다. 그런데 막상 위탁받은 복지관은 1712㎡(약 518평) 크기의 건물이 전부였다. 복지관 운영에 필요한 각종 집기는 법인에서 부담해야 했다. 직원들도 우리가 충원해야 했다. 누이들 돈을 빌려 겨우 집기 일부를 구매했는데 그때 들어간 돈이 무려 1억5000만원에 달했다.
인사 청탁을 비롯해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일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아하게 일하고 싶었으나 막상 마주한 사회복지 사역의 현실은 ‘막노동’ 그 자체였다. 매일 짐을 떼고 나르는 일,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는 일,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후원받아 나누어주는 일, 물건을 나누어주다가 형평성 문제로 욕을 먹는 일….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 일에 뛰어들게 된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고뇌의 현장에서 나는 직원들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직원들과 공동 운명체가 된 것이 그나마 그 시절 내가 느낀 위안이자 희망이었다.
우리는 ‘공부하고 토론하는 복지관’이 되기 위해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다행스럽게도 개관 후 얼마 되지 않아 대전시는 물론이고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우수 복지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 비결을 배우려고 복지관을 찾았다.
대전 대덕구 자활지원센터도 운영하게 됐는데 그간 수행한 복지사업과는 결이 매우 달랐다. 예컨대 아파트 단지마다 버려진 중고 자전거를 고치는 일을 벌였다. 아파트들에 협조 공문을 보내 중고 자전거를 수거한 뒤 수리해 되파는 사업이었다. 공공기관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도 벌였다. 당시 학교와 관공서 화장실은 ‘청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일자리는 빈민들을 위한 자활 사업에 활용됐다. 물론 시행착오도 많았다. 노동하지 않아도 지원을 받아온 선례와 관행 때문에 자활이라는 노동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설혹 노동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양질의 노동자를 만들어내기는 더 어려웠다. 소위 자활 대상자로 분류되는 분들은 나이가 많거나 건강이 좋지 않거나, 근로 의욕이 떨어지는 분들이었다. 이런 분들이 양질의 상품을 생산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일보다 사람 관계가 더 어렵다고 하던데, 자활의 현장이 바로 그랬다. 틈새시장을 찾아낸 뒤 사람들이 요구하는 상품을 만들어내려고 발버둥쳤다. 납품기일을 맞추려고 밤샘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마주쳐야 할 손바닥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나는 이런 허탈감을 자주 느껴야 했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9) 예장통합 사회봉사부 총무로 선출… 소외된 현장 찾아
‘적절한 정치’만 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눈물과 아픔 이웃의 소리 들으려 노력
홀로된 사모·은퇴목회자 가정도 지원
김종생(오른쪽) 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로 재직하던 시기, 인천에서 ‘북한 콩기름 75t 지원 감사예배’에 참석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대전에서 월평종합사회복지관과 정림종합사회복지관, 대덕자활지원센터, 유성구노인복지관 등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이들 기관에 몸담으면서 늘 자문한 것은 ‘일반 사회복지’와 ‘기독교 사회복지’의 차이점이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기에 복지 기관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 탓에 10여년간 여러 기관을 운영하면서 대전에서는 주목을 받았으나 기분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다. 타성에 젖어 내가 이룬 성과에 취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도 많았다.
떠날 때가 됐음을 직감하고 있을 즈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에서 사회봉사부 총무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나는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지원을 희망한다고 쉽게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1차 인사위원회에 참여한 위원은 사회봉사부 실행위원 15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노회에서 선출된 목사와 권역별 순번이 돼 대의원이 된 분들이었다. 실행위원회에서 지원자 8명 가운데 2명을 추천했고 2차 인사위원회가 열렸다.
당시 나는 ‘총회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얼마간 순진한 마음으로 지원한 터라 인사위원회 과정을 거치면서 당황할 때가 많았다. 총회는 지연과 학연의 인맥이 작동하는, 완전히 색다른 세계였다. 걱정도 되고 후회도 됐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고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총무 자리에 앉게 됐다. 제도권 사회복지 기관 종사자 때와는 다른, 종교직으로서의 별정직 공무원 세계에 몸을 담게 된 것이다.
총무의 역할은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적절한 정치’를 해야 하는 자리였다. 어느 직원의 말처럼 총회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았다. 주님을 의식하고 교회를 의식하는 것보다는 힘 있는 총대들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 생존 법칙처럼 여겨졌다. ‘이러려고 그렇게 몸부림치며 총회 입성을 희망했던 것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렇지만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한 가지 일을 하고 싶었다. 아픔과 눈물이 있는 소외된 현장의 소리를 찾아 듣는 것이었다. 내가 들은 이웃의 신음을 전문가 입장을 담아 해법을 제시하고 제도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가령 발달장애인에게도 세례가 행해질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나는 그 근거를 찾기 시작했고, 결국엔 중풍 병자가 그 친구들로 말미암아 병 고침과 구원을 얻게 된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했다. 장애 탓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발달장애인도 그 부모의 고백을 통해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했다. 이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감격스럽게 느껴진다.
홀로 된 사모님들을 대상으로 목회자 유가족협의회를 조직하고, 이를 총회 산하 단체로 자리매김하게 한 것도 큰 보람을 느낀 일이었다. 은퇴한 목회자들을 위한 정책도 만들었다. 은퇴 목회자 중에는 연금에 가입하지 않아 노후가 막막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목회자들을 위해 이들이 자녀로부터도 도움을 받기 힘든 경우, 총회와 노회가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조한 일 역시 큰 기쁨으로 남아 있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10) 사랑의 연탄 나누기 운동… ‘마을 목회’로 발전
소외 주민에까지 목회 확대하는 계기 돼
홀로 남겨진 목회자 유가족들 삼중고
‘목회자 유가족협의회’ 만들어 고통 위로
김종생 목사는 ‘목회자 유가족협의회’가 만들어지는 데 일조한 일에 대해 큰 보람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2007년 8월 30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었던 ‘목회자 유가족 실태조사 연구발표회’.
우리 교단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영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처럼 ‘브랜드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고민 끝에 ‘사랑의 연탄 나누기’ 사업을 시작했다(총회는 지금도 이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게 해준 분이 연탄은행 설립자인 허기복 목사다. 나는 지금도 어쩔 수 없이 연탄을 사용해야 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사랑의 연탄 나누기’ 운동을 벌이면서 연탄 가격 수준과 연탄 배달의 어려움을 알게 됐다. 가난 탓에 연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경제적인 곤란함을 넘어 불편함과 번거로움까지를 떠안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총회는 연탄 후원을 위한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대상자를 찾거나 추천받기 위해 자연스럽게 관공서와 접촉하게 됐다. 연탄 봉사는 교단을 홍보할 기회로 자리잡았다. 아울러 지역 사회와의 접촉면도 넓어졌다. 연탄 외에도 김치와 쌀, 나아가 내복이나 방한복에 이르기까지 지원 품목은 계속 늘어났다.
교인만을 대상으로 하던 목회가 소외된 주민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지역 목회자들 시야에 ‘마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탄 봉사는 그렇게 목회의 성격도 바꿔놓았다. 몇몇 지역의 목회가 ‘마을 목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돼주었다.
목회자 유가족을 상대로 펼친 일들도 기억에 남는다. 2006년 9월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로 재임하고 있을 때 목회자 유가족들과 첫 간담회를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윤의근 목사님이 사회봉사부장을 맡고 계실 때였다. 당시 우리 교단 목회자 유가족은 175가정이었다. 목회자 유족들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장을 잃은 슬픔과 정체성 혼란,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2007년 9월 총회에서 ‘목회자 유가족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사회봉사부 산하 단체가 만들어졌다. 재정적인 문제로 잠시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목회자 유족들의 간절함이 하늘의 보좌를 움직였던 것 같다. 교계 지도자들의 마음이 모아졌고 그렇게 이 조직은 힘차게 출발할 수 있었다.
홀로 된 사모들의 교회 내 지위와 직분, 그리고 경제적 지원은 제도적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을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은 생활비와 자녀 교육비였다. 자신들을 향한 교인들의 인식,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도 허투루 여길 수 없었다.
가령 어느 교회에 가든지 이들은 자신이 어떤 호칭으로 불려야 할까 생각하며 난감해하곤 했다. 사모라는 호칭은 사별 후 맨 먼저 잃게 되는 이름이었으니까 말이다.
호칭이 사라지면 관계는 금방 서먹해진다. 내가 아는 어떤 사모는 새로운 교회에 가서 권사도 집사도 아닌, ‘성도님’으로 불리다가 새신자 등록과 함께 교리 공부까지 했다. 목회자 남편을 떠나보낸 사모들에게 적절한 호칭이 필요한 셈이다.
목회자였던 남편을 먼저 하나님 곁으로 떠나보낸 사람들은 큰 아픔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교회의 관심과 지원은 줄어들지만 ‘목회자 가족답게’ 생활하길 기대하는 시선은 오히려 더 강해지곤 한다. 우린 그들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돌봐야 할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11)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현장서 한국교회 하나로 뭉쳐
기름띠 제거 위해 기독교 단체 모였지만
경쟁적 각개약진… 피해복구 중구난방
교계 중진들, 봉사사역 함께하기로 합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2007년 12월 서해안 기름유출 현장에서 기름띠 제거 작업을 벌이고 있다.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과 예인선이 충돌해 원유가 유출되는 사고가 났다. 유조선 탱크에 있던 1만2547㎘(7만8918배럴)의 원유가 태안 인근 해역에 유출돼 태안군과 서산시 양식장, 어장 등 8,000여㏊가 원유에 오염됐다. 온갖 어패류가 폐사했고 짙은 기름띠는 만리포 천리포 모항 천수만 안면도는 물론 전라도까지 퍼졌다. 그야말로 엄청난 재난이었다.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로서 현장에 달려가야 했다. 우리는 만리포교회에 현장상황실을 만들었다. 당시 사고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현지에 도착한 기독교계 단체는 10여개에 달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캠프를 차리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독교는 물론이고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방제 작업에 참여했다. 현장에 나와 있는 실무자들은 교계가 벌이는 활동이 각개약진 형태를 띠고 있어 아쉽다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그해 5월 샘물교회 단기선교팀의 아프간 피랍사태를 겪으면서 상당히 위축된 상태였다. 자랑스럽게 여기던 해외 선교 활동이 하루아침에 비난의 대상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교계 중진들(조용기·김장환·김삼환·손인웅·오정현·권오성·최희범·조성기 목사 등)이 두 차례 모여 숙의한 끝에 이번 방제 작업만큼은 한국교회가 하나가 돼 뛰어들자는 합의가 나왔다. 이렇게 서울에서는 ‘연합 봉사’라는 방침이 정해졌고, 현장에서도 ‘봉사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개별적으로 진행해 온 개신교의 기름띠 제거 자원봉사 사역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름띠 제거를 위해 2007년 12월 18일은 ‘한국교회 자원봉사의 날’로 정해졌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개목항에는 한국교회 지도자 700여명이 모여 자원봉사단 발대식을 했다. 이듬해 1월 11일 연세대 강당에서는 ‘서해안 살리기 한국교회봉사단’이 출범했다.
원유 유출 사고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하나 됨의 당위’라는 과제를 한국교회에 던져 주었다. 도회지의 대형교회부터 농어촌의 작은 교회, 도시의 개척교회까지 사회정의와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하기 위해 서해안으로 달려와 방제 작업에 전념했다.
환경 선교 혹은 생태 정의에 대한 입장과 견해가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바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그리고 회심의 기도를 드리면서 기름띠를 걷어 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기름을 닦으시던 어느 권사님의 고백처럼 “바다가 죽으니 사람도 살 수 없네요”를 모두가 몸으로 경험했다. 바다와 육지, 도시와 농촌, 교회와 사회를 별개로 생각하며 환경과 관계없이 전도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바다라는 환경과 우리가 소중히 여겨온 전도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을 현장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적어도 기름유출 현장에서만큼은 한국교회가 서로의 입장과 관점을 내세우지 않았다. 교회는 가장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켰다. 이런 과정을 통해 3·1운동 이후 가장 칭송받는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역사가 만들어지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12) 한국교회봉사단,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 상처 보살펴
논현동 고시원 참사 희생자 장례 돕고
용산 철거민 화재 피해자·유족 위해
정부로부터 사과와 피해보상금 받아내
김종생(가운데) 목사가 2009년 서울 논현동에서 벌어진 고시원 살인 사건과 관련해 유족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은 서해안에서 기름띠 제거 방제작업 자원봉사와 함께 지역 주민을 위로하기 위해 쌀과 생필품 지원사업, 무료진료사업, 조손가정 어린이 돌봄 사업도 벌였다. 2008년 5월에는 만리포해수욕장에서 자원봉사자 1만여명과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민 위로와 소망의 날’을 개최했다.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태안 지역에서 생태여름수련회를 가지도록 홍보하고 독려하기도 했다.
기독교 연합단체인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태안 현장에서 방제작업에 참여한 교회들을 대상으로 환경교육을 담당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사회복지 단체인 성민원은 태안 현장에서 수많은 봉사자에게 식사와 간식을 제공했다. 특히 눈에 띄는 단체는 한국교회희망연대였다. 한교봉과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단체로, 기름유출 현장에서 자원봉사단을 꾸려 방제작업을 하는 단체였다.
한교봉과 한국교회희망연대는 서로 호흡을 맞추다가 결국엔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하나 된 힘을 바탕으로 세상의 낮은 곳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서였다. 2010년 한국교회희망연대의 ‘희망’을 ‘한국교회봉사단’의 중간에 삽입해 ‘한국교회희망봉사단’이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 당시, 한교봉을 통해 자원봉사에 참여한 교회는 2000여곳, 성도 수는 17만여명에 달했다. 여기에 자체적으로 자원봉사에 참여한 교회와 기독교 관련 단체를 합하면 모두 80여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기름유출 사고 당시 서해안으로 달려간 전체 봉사자 120만명 가운데 3분의 2가 기독교인이었던 셈이다.
2008년 10월 2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고시원에서 일어난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3명이 숨지고 6명이 크게 다쳤다.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동동거리는 이들을 위해 ‘한국교회가 함께하는 논현동 고시원 참사 희생자 장례예배’를 드렸다. 나는 이런 활동을 벌인 한교봉에서 사무총장을 맡아 뜻깊은 일들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용산 참사가 있었다. 서울시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용산에서는 철거 작업이 진행됐는데, 일부 철거민 세입자들이 투쟁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진상규명과 책임 소재를 두고 서울시와 용산구, 재개발조합과 피해 유족은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중재를 위해 피해 유족의 남일당 농성 현장으로 출근하곤 했다. 인명진 목사의 소개로 서울시 도시개발국장을 만났고, 피해 유족과 재개발조합의 관계자와 대화하면서 해법을 모색했다. 종교계가 모두 이 문제에 참여하는 형식을 띠기 위해 천주교와 불교 관계자들도 동참하게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린 중재와 합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최종 합의 내용에 따르면, 정운찬 당시 국무총리가 정부를 대표해 참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깊은 유감의 뜻을 표명키로 했다. 유가족 위로금과 철거민 피해보상금, 장례 비용 등은 재개발조합이 부담하기로 했다. 이렇듯 극적으로 합의가 이뤄졌지만, 참사가 남긴 상처는 너무나 크고 깊었다. 유가족 자녀 학비 지원을 포함해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13) 지구촌 아픔의 현장 함께한 한국교회… 구호·재건 총력
7.0 규모 강진으로 큰 피해 본 아이티
구호의 일원화 위해 정부와 공동 대책
현지에 고아원·직업학교 등 설립해
김종생(왼쪽 다섯 번째) 목사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 현지인들과 대책회의를 열고 있다.
중남미 카리브해에 있는 아이티는 한국인에겐 생소한 나라다. 아이들이 진흙 쿠키로 허기를 달랜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가난한 국가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2010년 1월 12일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이 일어났다. 지진을 겪어본 나라도 아니고 경제적 기반까지 열악하며, 내진 설계가 제대로 된 건물이 없는 곳이기에 피해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통신 회선이 다 끊겼고 육로로 피해 지역에 접근하기 힘든 곳도 많았다. 구호를 위해 아이티를 찾는 비행기의 행렬이 이어지면서 공항은 포화 상태가 됐다. 민간 비행기의 착륙을 통제할 정도였다. 아이티 수도에는 교도소들이 있었는데, 이곳들이 다 무너지면서 재소자(약 4500명)가 대규모로 탈출해 곳곳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31만명을 웃돌았고 이재민은 300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이런 아픔의 현장에 한국교회가 있었다.
한국교회 역사상 이렇게 많은 교회가 낯선 이국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나선 경우는 사실상 처음이었다. 아이티 구호와 지원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원탁회의를 열었다. 아이티를 돕기 위해 주요 교단과 기독교 NGO들이 ‘한국교회아이티연합’을 구성했고, 대표에 손인웅 목사를 추대했다. 구호의 ‘중복’과 ‘누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외교통상부, 코이카와 함께 아이티에 코리아타운을 공동으로 세우는 방안을 논의했다.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은 이 조직의 간사 역할을 맡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교봉이 한국교회가 벌이는 아이티 구호 프로그램의 심부름꾼이 된 셈이다.
한국교회에는 당시 140억원에 달하는 성금이 답지했다. 각 교단과 기독교 NGO들은 각자가 벌일 사업의 규모와 내용을 공유했다. 여러 차례 모여 아이티에 대해 공부했고 여러 정보를 나눴다. 이때 일은 한국교회의 높아진 위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교봉은 아이티 구호와 재건을 위해 국민일보와 함께 공동모금을 시작해 37억원을 모았다. 긴급구호 사업을 벌였고 현지 NGO와 아이티 개신교협의회, 미국교회 등과 협력해 콜레라 퇴치사업과 고아원 설립, 70여개 교회 재건 사업 등도 진행했다.
아울러 25억원을 투자해 아이티 최고의 시설물로 평가받는 직업학교(KHAPS)를 설립하기도 했다. KHAPS는 1만5750㎡(4764평) 부지에 2233㎡(675평)의 강의실과 교직원 숙소, 기숙사, 커뮤니티센터(예배실 등) 등을 갖춘 시설이다. 현재도 이 학교는 매년 4개월씩 3학기 과정으로 영어 컴퓨터 스페인어 등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티에서 전기 관련 사업을 하는 최상민 사장이 이사장을 맡아줘 매우 큰 힘이 됐다는 사실을 이 지면을 통해 감사드리고 싶다. 한국교회의 관심은 아이티 구호와 재건 사업에 큰 보탬이 됐을 것이다.
당시 아이티 구호 활동을 벌이면서 이 나라가 처한 상황을 보며 안타까울 때가 많았다. KHAPS의 경우 5년째 운영하고 있는데 고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학교의 원활한 운영과 여기서 배출되는 인재들의 육성에 한국교회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14) 위안부 피해 할머니 쉼터 마련… “모두 하나님 은혜”
2010년 8·15 대성회서 할머니들 발언 후
새 터전 마련 위해 명성교회에 도움 요청
불교신자 김복동 할머니 “한국교회에 감사”
김종생(오른쪽) 목사가 2012년 10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을 기념하는 입주 감사예배에서 발언하고 있다.
2019년 1월 28일 별세한 김복동 할머니는 열네 살 때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집을 나섰다가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평일에는 15명쯤, 토·일요일에는 셀 수가 없다. 너무 많아서. 한 50명쯤 됐을 거라. 씻을 시간도 없이 짐승만도 못한 삶을 견뎌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돌아온 것은 가족들의 외면이었다. “내가 나를 찾으려고 하니까 큰언니가 말렸어. 조카들 생각해서라도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그래도 나를 찾고 싶었어. 예순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 신고하고 큰언니가 발을 끊었어. 우리 아버지, 엄마 제사 지내주는 조카들까지. 나를 찾고, 더 쓸쓸해졌어.”
이것은 국가와 사회, 교회가 개인의 소중한 삶이 폭력의 역사에 묻혀버리도록 침묵했을 때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8월 15일 서울광장을 비롯한 전국 81개 도시와 해외 75개 도시에서 기독교인 100만명이 참석한 ‘한국교회 8·15 대성회’가 열렸다.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이순덕 할머니는 발언자로 나서 “일본 정부가 아직도 잘못을 사죄하지 않고, 공식 배상에도 나서지 않고 있다”며 “한국교회가 이 일에 함께해 하루빨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서울 명성교회는 새 성전 입당 기념으로 2012년 3월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단독주택을 매입했다. 이를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은 무상으로 새로운 생활 터전을 받게 됐다.
정의기억연대는 당시 서울 서대문 충정로에 위안부 할머니 쉼터 ‘우리 집’을 운영했지만, 시설이 낡고, 재개발 지역으로 옮겨달라는 통보까지 받은 상태였다. 정의연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필자는 명성교회에 쉼터 현황을 알렸고, 김삼환 목사의 공감과 교인들의 동의 속에 지금의 연남동 쉼터를 받게 됐다. 2012년 10월 입주 감사예배에서 불교 신자인 김복동 할머니는 “짐승도 자기 누울 곳이 있는데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새 쉼터가 생긴다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다”며 “사회에서는 늘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한국교회와 함께하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마포 쉼터는 지하 1층(방 2개, 화장실 1개), 지상 2층(방 5개, 화장실 3)의 주택이었다. 이곳에는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하는 할머니들의 건강을 고려해 승강기가 설치됐다. 고(故) 이순덕 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가 살아생전 머물렀으며, 마지막까지 길원옥 할머니가 거주하다가 지난해 6월 가족에게 돌아가면서 8년의 역사가 마무리됐다.
30여년 전, 서울 연동교회 교인인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관심과 배려 속에 1991년 8월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였던 자신의 아픔을 최초로 증언했다. 기자회견 이후 238명의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모였다. 92년부터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수요 집회가 열렸고, 일본 정부는 93년 사과문을 발표했다. 앞으로도 한국교회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옆자리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길 소망한다.
***[역경의 열매] 김종생 (15·끝)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작은 위로자’ 됐으면…
베트남 이주 여성의 비극적 죽음 계기로
다문화 가정 돕기 위한 사업 펼치는 등
우는 자들 섬기며 나누는 삶 이어갈 것
베트남 출신 여성 윤민주씨의 고향 지인들이 2019년 1월 21일 베트남 현지에서 열린 ‘암소은행 2차 전달식’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15년 12월 벌어진 일이다. 당시 서른한 살이던, 베트남 출신 여성 윤민주씨가 남편한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곱 살이던 딸도 목숨을 잃었다. 윤씨에게 남편은 편집증 증세를 보였고, 2014년 살해 시도를 했었는데 당시 법원은 접근 금지명령을 내렸지만 허사였다. 남편은 모녀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윤씨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부부갈등과 고부갈등, 가정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이주민 여성과 자녀를 위한 쉼터 ‘유니게의 집’에서 3개월 넘게 머물렀다. ‘유니게’는 사도 바울의 제자였던 디모데의 어머니로, 그리스인 남편을 둔 성경 속 다문화가정 여성이다. 쉼터는 명성교회가 후원해 2013년 3월 연 곳으로 여기엔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 몽골 필리핀에서 온 여성과 이들의 자녀 40여 가정이 거쳐 갔다.
2016년 11월, 윤씨의 1주기를 즈음해 그의 고향을 찾아 추모 행사를 열었다. 고인의 이름으로 의미 있는 일을 진행하기 위해 그가 나온 초등학교 시설을 보수해주었고, 주민센터엔 컴퓨터를 기증했다. 형편이 어려운 그곳 주민들을 위한 ‘암소 은행 사업’도 시작했다. 이 사업은 분양해준 송아지가 성장해 새끼를 낳으면, 이 새끼를 은행에 갚는 형태였다.
당시 나는 윤씨의 고향을 방문한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티리(윤민주)의 죽음은 비극적이지만 슬픔이 승화돼 아름다운 선물을 남기게 된 것처럼 좋은 선물을 남기는 인생이 되자. 베트남과 한국이 교류하며 함께 희망을 만들어 나가자.”
이후에도 나의 관심은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로 향했다. 이들에게 사고와 질병은 예고 없이 닥쳤고 재해는 이들의 일상을 뒤집어놓곤 했다. ‘백성의 작은 위로자’가 될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아온 나는 이런 아픈 사연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2019년 화재로 교회 건물이 전소된 전남 여수의 낭도교회, 같은 해 사고로 두 딸을 잃은 전남 신안 새생명교회의 이성진 목사님 등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달란트를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일이 곧 섬김이고 나눔일 것이다. 힘들 때마다 나를 격려하고 위로했던 성경 말씀을 떠올려 본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2) 이런 말씀들은 내게 큰 힘이 돼주곤 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엔 갖가지 사연으로 울고 있는 이들이 많다. 나는 그들 곁으로 가고 싶다. 나는 그들이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가 됐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좋아하는 찬양인 ‘예수님은 누구신가’의 노랫말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갈음하고 싶다.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신 주님,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신 주님….”